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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당시 즐거워하던 모습들.
 신입생 당시 즐거워하던 모습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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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한 낮의 햇살이 나의 얼굴을 살포시 내리운다. 나는 두 눈을 감고 그 때의 바람의 향기를 찾아본다. 잠시 게으른 꿈을 꾼 듯 기지개를 편다. 잠시 환영처럼 그날의 하늘이 내 게 보인다. 그 때의 시간들까지도.

'응답하라 1994'와는 나는 1년 차이가 있는 95학번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절을 지내왔으니 그 시절의 감성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통관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매주 애타게 기다리며 시청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30일 13회에 간간이 나왔던 군 입대의 상황들은 나의 지난 옛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20살의 천방지축 새내기 대학생활의 추억들

95년 신입생 환영회를 다녀오고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남중, 남고를 나와서 인지 대학 캠퍼스 사방 천지에 여학생들이 보이니 얼마나 행복하던지. 입학 전 과 선배들이 챙겨준 술자리에서 너무도 기분이 업이 되어 실려 나갔다. 다음날 군대 신체검사 날인 것도 까맣게 잊고 말이다.

그 후 한동안 군대 가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지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군대 가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와 동기친구들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대학 1학년 여름 방학이후 부터인가? 나의 대학 친구 캠브리지멤버들은 항상  술자리 때마다 결의를 다졌다.

"남자라면 해병대! 사나이라면 해병대! 이왕 갔다 오는 거 멋지게! 친구냐? 아니냐? 의리! 다 함께 멋지게 가는 거야! 건배!"

이렇게 늘 우리의 구호를 외쳤다. 실상 이 구호는 <내일은 사랑?이라는 드마라에 중독된 이병헌 팬인 친구의 주동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 친구는 그 드라마가 끝났음에도 비디오로 다 녹화를 해서 거의 전편을 소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민수의 팬이기도 했다. 항상 이병헌과 최민수의 대사를 줄줄 외우고 성대 묘사까지 하고 다녔다. 마초의 표본과도 같이 행동하고 우리에게 터프한 남자의 본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렇게 지내는 어느 순간 불쑥 캠브리지 동기하나가 해병대를 지원해서 가버렸다. 우린 내심 뿌듯했다. 우리의 결의를 지켜준 친구에게서 의리를 확인했다고나 할까? 그 이후로 계속 우리는 결의를 다지고 또 다졌다. 그 친구가 휴가 나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대학 MT 때 캠프리지 친구들과 장기자랑 하던 모습.
 대학 MT 때 캠프리지 친구들과 장기자랑 하던 모습.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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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현실감 있게 다가오기 시작한 군대

드디어 2학기 학교 축제 기간에 그 해병대를 간 친구가 휴가를 나왔다. 우리는 의리로 똘똘 뭉쳐서 환영하고 또 환영했다. 그 친구의 군기 잡힌 모습에 우리는 솔직히 좀 놀랐다. 원체 강하고 단단한 녀석이었기에. 게다가 그녀석이 해준 군대 얘기는 어찌나 공포스럽던지.

그날 이후 우리는 슬슬 합리화를 시키기 시작했다. 꼭 군대를 해병대를 가야 하는 건 아니다라는 둥, 자신에게 맞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둥, 그렇게 이리저리 자신들이 정한 군대로 향하고 있었다. 군대갈 날이 다가오면서부터 군인들이 왜이렇게 존경스러운건지. 짝대기 1개, 2개도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우리를 한동안 해병대로 꼬신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그 친구는 한말이 있었지만 모른 척 당당히 현역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어쩌나? 친구를 해병대로 꼬시고 안간 벌인지 그 녀석은 화천에 있는 전방 수색대로 차출되었다.

사실 나는 이 친구 보다 조금 더 이르게 군대를 지원하게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해병대는 지원하지 않았다. 무섭다기보다 그 당시 경찰이 되고 싶은 맘이 있어서 미리 군생활로 겪어 보고 싶은 맘이 컷다.

"야 의경 생각보다 쉽지않아. 차라리 해병대로 다녀와. 형이 보기엔 불규칙하고 자주 시위도 막으러 나가서 힘들거야. 형이 해병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다."

나의 친형은 극구 만류했다. 난 당연히 편해보여서 말리는 줄 로만 알고 내 생각대로 지원을 감행했다.

그리고 '응답하라 1994'의 해태처럼 예상보다 빨리 갑작스럽게 입대가 결정되고 통보되었다. 정신이 없는 나는 주변사람들과의 이별을 잘 정리하지도 못한 채 입대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난히 우리동기들은 사이가 좋아서 MT를 자주 다녔다.
 유난히 우리동기들은 사이가 좋아서 MT를 자주 다녔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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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나를 불러 송별회를 마련해주었다. 우리 과에서 이쁘다는 여자후배들은 다 불러놓고 송별회를 해주는 이유는 대체 몬지(물론 다들 친해서 자발적으로 온 것이었다). 물론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지만 우리과는 미인들이 많다고 타과에 소문이 자자 했었다. 그날따라 과 여자동기들도 이쁜 동기들이 왜 이렇게 많이 왔다가는지. 참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게다가 그날 아끼던 여자후배들에게 국화를 선물 받고서는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까 술이 그날은 무지 땡기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했었던 거 같다. 그래서 동네 친구 중 듬직한 체대 친구와 같이 송별회에 참석하였다. 어려서부터 복싱을 해서 고교 짱출신에 외모며 성격이며 너무도 남자답고 신뢰감 있고 듬직한 친구라 같이 다니면 내가 든든할 정도인 친구였다. 그래서 이날은 신신당부를 하며 부탁을 했다. 내가 과음을 하거나 하면 좀 챙겨달라고. 그러고 나서 나는 내내 건배를 외쳤다."나의 청춘은 이제 끝이구나! 건배! 건배! 건배!, 군대 가는 건 슬프지 않은데 나의 청춘이 가는 게 슬프구나!"라며 유치한 말들로 친구들과 친한 후배들과 마셔대기 시작했다.

"많이 취한 거 같다. 친구로서 걱정되니까 자제해라! 긴장하고! 내가 보고 있으니까 힘들면 바로 신호줘."

어느 순간 나의 듬직한 고향 친구는 술이 얼큰하게 취한 내게 와서 조용히 말했다. 어찌나 신뢰감 있고 듬직하게 말해주는지 한순간에 맘이 탁 놓일 정도였다. 그래서 천천히 자제하며 술자리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술이 확 올라와서 잠시 바람이나 쐴 겸 담배한대를 물기 위해 호프집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20살의 나는 남자는 자세와 폼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런 이상한 신념 때문에 나는 역시나 그날도 폼을 잡았다. 일단 술집 앞에서 고독한 표정으로 거칠게 담배를 하나 물었다. 옵션으로 고뇌에 가득 찬 얼굴까지 장착했다. 그 포즈로 학교 앞 유흥 번화가 거리 한 복판에서 담배연기를 연신 내 뿜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창피하지만 그 때는 내가 생각해도 멋지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르시즘을 느끼면서 그 당시 고독의 상징인 정우성의 흉내까지 내고 있었다.

번화하기로 유명한 1번가의 번화가에 웬 거지가?

그런데 거리가 좀 이상했다. 이 유명한 안양 1번가 번화가는 전반적으로 정리가 잘 되있는 곳이었는데 웬 거지가 한 명 보이는 게 아닌가? 길가는 사람들은 그 거지를 우수수 피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술이 취한 나는 내 눈이 이상한 것인지 혼동되어 자세히 쳐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 눈앞 20여 미터 거리에 왠 흰색 나시티를 입은 거지가 푸시업 자세로 기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오바이트를 조금씩 해가면서 말이다. 마치 골룸이 계곡을 기어오듯 이상한 자세로. 점점 내게 가까이 지나가는 순간 나는 까무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헉! 바로 그 거지는 바로 내 친구였다. 체대를 다니는 그 듬직한 친구. 그 신뢰감 있는 친구'였던 것이다. 난 창피함에 여자후배들에게 고개를 들 수 가 없었다. 미친 듯이 친구를 들쳐업고 친구의 자취방으로 뛰었다. 그리고 음주 좀비 직전의 친구를 변신 전 간신히 재울 수 있었다. 다시 나는 송별회자리로 돌아가 정신없이 자리를 끝내고 친구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어떻게 된 것인지 이제 술이 깬 나의 듬직한 그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曰 "너희 학교 여자후배들이 너무 미인들이라 주는 술을 거부할 수 가 없었어" 라며 미안해했다. 그 날 그 친구는 사과를 몇 번 더 하였는데 전날 밤 친구 자취방에 커다란 피자(피자형태의 오바이트를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를 몇 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송별회는 마무리 되고 있었다. 참고로 그 자취방 주인은 바로 우리를 해병대로 꼬시려 했던 친구였다.

훈련소에서의 모습과 자대배치후 광화문 근처에서의 제대전 모습
 훈련소에서의 모습과 자대배치후 광화문 근처에서의 제대전 모습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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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은 지나 <응답하라 1994>의 화면처럼 나도 훈련소 앞 여관방에 전날 도착해 친구들과 술자리를 한판 벌이며 잠을 잤다. 술이라도 안마시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맘이 왜이리 어지럽고도 불안하던지. 신기하게도 다음날 아침의 모습은 어찌나 응사의 모습과 똑같았을까? 나만 속이 타들어가는 데 친구들은 정말 정신없이 널부러져 행복하게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훈련소앞 해태의 모습과 오렌지족 그 서울 동기의 모습을 반반 섞은 그림으로 훈련소로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그 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도 역시 친구를 배반한 벌을 받았다.

의무경찰을 지원한 나는 우리나라에서 시위진압 전문에 험악하기로 소문난 서울 1기동대로 배치 받았다. 시위 대응 도중 화염병에 몸에 불이 붙기도 하고, 서울 시내를 뛰어다니다 기절 할 뻔하는 개고생을 해가며 제대를 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벌은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아 울고 있는 해고 노동자들을 손을 잡아 일으켜 주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끌고 간 일 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가슴 속에 아픈 모습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복무시절 약자들에게 가혹하고 강자들에게 너그러운 한국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제대 이후 변했다. 이제는 확고하다. 우리나라는 집회 시위의 자유가 있고, 의사표현의 자유는 보장해야 한다고. 

감사하다 '응답하라 1994'

이 드라마를 통해 그 청춘의 시간 속으로 잠시나마 꿈을 꾸게 만들어 주는 행복감의 크기는 측정이 어려울 듯하다. 그 시절을 지나왔던 한 세대로서 촌스러운 추억의 소품 하나 하나 조차도 놓치지 않고 챙겨서 담아내는 모습을 보면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그 감성의 청춘의 시대를 관통하여 다들 어른이 되고 가장이 되고 이웃이 되었다. 시간이 우리를 나이들고 늙게 하여도 <응답하라 1994>를 통해 다시 되찾은 우리의 청춘의 감성은 평생토록 우리 삶의 윤활유가 될 것이다. 어쩌면 남은 시간을 청춘의 감성으로 다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지나온 시간은 추억은 그래서 다 의미가 있는 듯하다.

<응답하라 1994>. 그저 촌스러운 추억 팔이 드마라 일 줄 알았지만 우리들의 아름다운 청춘을 담아낸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가 종영되는 건 상상하기도 싫지만 그 이후의 그리움도 다 우리에겐 인생의 향수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벌써 군대 간 해태가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그저 드라마에서 해태가 군대에 갔을 뿐인데. 그 시절 그 순간 내가 해태를 반쯤 닮아서 일까? 아니면 이 드라마에 푹 빠져서 일까? 그저 추상적으로 얘기 할 수 는 있어도 정확히 찍어내어 말하기가 너무 어렵다. 이 드라마 너무 심하게 매력적이기 때문에. 난 단지 응사 다음 회를 기다리며 해태가 군대를 잘 다녀오기를 기대해 보는 수밖에. 그리고 내일 아침을 추억의 힘으로 더욱 뜨겁게 맞이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태그:#응답하라 1994, #해태, #군입대, #새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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