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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는 해다.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한다며 학교에서 실시한 야간자율학습 때문이었다.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고교 입시가 아주 치열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2학년생부터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야간자율학습(야자)을 하고 집에 가도록 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십여 리 떨어진 마을에 있었다. 나는 등하교 길을 자전거로 오가고 있었다. 밤 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자 2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성적이 수위권에 있는 나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해 2학기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때였다.

그렇게 시작한 자취 생활은 서른 다섯에 결혼을 하기까지 20여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그사이에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과 연구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  몇 년을 제외하더라도 나는 15년을 훨씬 넘게 나 스스로 밥을 해 먹으면서 지내온 셈이다.

자취 생활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자취생의 가장 큰 애환과 고민거리가 바로 먹는 일, 곧 식사에 있음을. 집에서 다니거나 하숙을 치는 사람은 어머니나 하숙집 주인이 차려주는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말면 그만이다. 그렇게 하는 한 끼 식사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자취생은 쌀을 씻어 안치고 밥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상을 차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 끼니 식사를 위해 들이는 시간과 공력, 준비가 여간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소홀히 할 수도 없다. 별것도 아닌 한 끼 식사가 모이고 모여 한 사람의 목숨을 지탱하지 않는가.

강렬한 김치 맛에 그만 '김치 서리'까지


중 2 때부터 시작한 야자 덕분이었을까. 나는 목표로 한 시내 명문고에 합격했다. 새로운 자취 생활이 시작되었다. 자취방은 학교 뒤쪽 골목길에 자리잡은 평범한 단층 양옥 집에 있었다. 주인 내외분은 순천에서 나고 자란 인정 많은 분들이셨다. 그 자취방에서 고등학교 2년을 보냈다.

2학년 학기말쯤이었을까.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방문으로 들어서는 좁은 쪽마루 위에 양푼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신문지를 들춰보니 먹음직스러운 김장 김치였다. 며칠 전부터 배추와 무를 들여 떠들썩하게 김장 준비를 하시더니 그날 김치를 담그신 모양이었다.

"찬장에 반찬도 떨어져가고 있더구먼. 오늘 담근 김치니까 먹어 봐."

언제 오셨는지 가수 윤수일을 닮아 멋진 주인 아저씨가 뒤에 서서 말씀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집에서 챙겨온 반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차였다. 주인 내외분은 평소에도 이런저런 반찬을 그렇게 가져다 놓아주시는 인정 많은 분들이셨다. 고개를 거듭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날 저녁은 밥 한 그릇을 고봉으로 담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해 겨울방학이었을까. 어느 날,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가 시장기를 느꼈다. 집에서 가져온 마른 반찬 두어 가지와 김치가 있긴 했다. 그런데 문득 주인집 배추김치가 먹고 싶었다. 이런저런 양념을 담뿍 넣어 약간 짜다 싶게 담근 주인집 김치는, 멀겋고 슴슴하게 담근 우리 집 김치와는 전혀 다른 강렬한 맛을 갖고 있었다. 두어 달 전에 처음으로 얻어먹은 그 김치 맛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식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속으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당으로 나섰다. 사위는 고요하기 짝이 없는데,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마당에는 하얗게 내린 눈이 제법 소복히 쌓여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눈에 찍힐 발자국을 생각하면 김치 서리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강렬한 식욕을 불러온 모종의 호르몬 덕분이었을까. 오히려 터무니없는 용기가 생겨났다. 나는 조그만 양푼을 든 채 김장독이 묻혀 있는 마당가 화단을 향해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조심스럽게 독 뚜껑을 열었다. 코끝을 살짝 스치는 김치 향에 미친 듯이 회가 동하기 시작했다. 주저하지 않고 김치 한 쪽을 꺼냈다.

김치 서리의 결정적인 증거인 발자국은 손으로 섬세하게 '땜방'을 해서 없앴다. 발자국이 찍힌 부분 일대를 평평하게 정지 작업을 하듯이 했다. 하고 나니 조금 어설펐다. 하지만 굵은 눈발이 줄기차게 내리고 있어서 그 표가 금방 없어졌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아삭거리는 김치에 밥을 정말 맛나게 먹었다.

주인 집 김치 서리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3학년이 되면서 학교에서 좀 더 가까운 정문 쪽으로 자취방을 옮기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김치 서리는 몇 번 더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다. 먹어도 먹어도 배 고픈 자취생 신세와, 풍성한 양념 덕분에 강렬한 맛을 자랑하는 주인 집 김치의 '마력'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로부터 5년 후쯤이었을 것이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순천에 갔다. 나와 마찬가지로 자취를 하면서 내가 다닌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동생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 길에 주인 집을 들렀다. 대문을 들어서니 주인 아저씨가 마당에 나와 계셨다. 처음에는 군복을 입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는 눈치였다.

"여기 아래 학교 다니던 학생이었어요. 1985년부터 2년이나 저 방에서 살았잖아요."

그제서야 주인 아저씨가 윤수일 닮은 그 멋진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주인 아저씨 얼굴에 생기가 별로 없어 보였다. 조금 있다가 나온 주인 아주머니를 통해 투병 중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마음이 짠해 왔다.

마루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년 전의 그 김치 서리 일을 말씀드렸다. 주인 내외분께서는 그랬냐고, 김치 먹고 싶었으면 그냥 좀 달래지 그 어두운 밤에 날도 추운데 왜 그랬냐고 웃음 반 타박 반으로 말씀하셨다. 그냥 달라고 해도 분명히 그냥 주실 분들임을 믿었기에 그렇게 장난처럼 김치 반쪽 가져다 먹었다고, 그렇지만 어쨌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늦은 봄 햇살을 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다 대문을 나섰다.

그뒤로 까맣게 잊고 있던 주인 집 이야기는 뜻밖에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 늦은 봄날로부터 한 3, 4년이 지난 후였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순천 아랫장에 갔다가 주인 아주머니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인 아저씨께서 그예 세상을 버리셨다는 얘기를 하시더란다.

대문간을 나서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결혼하면 아내와 꼭 한 번 찾아뵙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주인 내외는 내가 거수 경례를 하고 대문 계단을 내려와 골목길을 돌아나갈 때까지 대문간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셨다. 그 봄날의 어령칙한 풍경이 주마등처럼 흐릿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가슴 한켠이 먹먹했다.

내게 김치 갖다 준 고마운 사람들... 이제 내가 나눠줄 때

자취 생활 20여년 동안 그런 주인집 내외와 같은 분을 수도 없이 많이 만났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자취집에 연탄 보일러가 없어 장작을 때서 밥을 해 먹고 학교를 다녔다. 쌀쌀한 바람 불던 어느 늦가을 저녁이었던가. 갑작스럽게 자취방에 오신 담임 선생님께서 밥솥에 불을 지펴 주셨다. 선생님의 그 응원과 사랑 덕분에 힘든 자취 생활 가운데서도 부지런히 공부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던 십여 년 동안에는 해마다 김장 김치를 한 상자씩 보내주셨던 친구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께서는 김장철만 되면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에 두꺼운 비닐로 단단히 포장한 먹음직스러운 김치를 친구편에 보내 주셨다. 그 김치는 한겨울 내내 늘 허기에 차 있던 내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보약이었다.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潗)>에 "장에 절인 순무장아찌는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는 겨우내 찬으로 쓰인다"라는 구절을 적어 놓았다. 고려 말의 문인 권근(1352∼1409)은 <양촌집(陽村集)> 10권의 '김장(蓄菜)'이라는 시에서 "시월엔 바람 높고 새벽엔 서리 내려(十月風高肅曉霜) / 울안에 가꾼 채소 다 거두어 들였네(園中蔬菜盡收藏) / 맛있게 김장 담가 겨울을 준비하니(須將旨蓄禦冬乏) / 진수성찬 없어도 날마다 먹을 수 있네(未有珍羞供日嘗)"(이하 후략)라고 읊조렸다.

'침장고(沈藏庫)'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에 김장을 담그는 일을 맡은 관아나, 궁중에 쓰는 김장을 맡아서 담그던 창고를 이르는 말이다. 왕실에서 관아를 만들어 직접 손을 보게 했을 정도로 김장 업무(?)가 중요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 '침장고'의 '침장'에 어원을 둔 것으로 보이는 말이 김장이다. '침채(沈菜)'의 옛날식 표현인 '딤채'가 '짐채', '김채' 등을 거쳐 '김치'로 정착한 것과 비슷하다.

김장과 김치의 역사는 이토록 길고 깊다. 그 길고 깊은 역사만큼이나 김장과 김치에 얽힌 이야기도 많으리라. 더군다나 김치는 우리 자신이 한국인임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문화적 디엔에이(DNA)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김장과 김치 문화가 두루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김장 김치 한 포기를 주고받는 미풍(美風)이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돈독히 맺고 두터운 정을 쌓으니 그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양속(良俗)이다. 하지만 시절이 수상해서인지 그런 미풍양속이 갈수록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집에서는 장모님이 담그신 김장 김치를 가져다가 먹는다. 나와 아내가 모두 직장을 다니니 집에서 직접 김장을 담그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얻어다 먹는 김장 김치라도 올해는 이웃과 좀 나눠 먹어야겠다. 혹시 아는가. 그렇게 나눠 먹은 앞집 김치의 맛을 보고 '김치 서리'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될지.

덧붙이는 글 | - '김장' 응모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장 김치, #자취생, #침장고, #이규보, #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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