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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이미 바다 속으로 떨어져 있었다. 어둑해진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검은 파도에 우울함도 실려 왔다. 마음을 달랠 겸 들이켠 소주는 씁쓸함만 더했다.

마흔을 넘어선 어느 날 그렇게 삶의 우울함이 밀려왔다. 물론 그날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이룬 것은 없고, 삶은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면 우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했다.

늘 자기계발에 애썼지만 기대에 미달해서 우울했던 삶

그렇다고 삶을 허투루 산 것도 아니었다. 아니 허투루 그냥 되는 대로 살았다면 그런 우울함도 없었을 것이다. 성취가 있는, 그래서 자랑스럽고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 나름 많은 노력이 있었다. 자기계발서도 많이 읽었다. 하루에 두 시간만이라도 자신의 꿈을 위해 투자하라는 조언에 감동했고, 인생의 사명과 목표를 정하고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지침을 명심했다. 실제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록해보며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관리도 해보았다.

하지만 삶은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았다. 매일 매일 주어지는 일을 쳇바퀴처럼 해내기도 여유롭지 않았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삶과 현실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 마음의 긴장은 높아졌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정신 바짝 차리고 더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했다. 의지박약이 문제인지 능력의 문제인지 모르지만, 결심한 목표로 가지 못하는 나를 그냥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휴일도 마음 편하게 푹 쉬지 못했다. 토요일 네 시간만이라도 자기계발에 투자하라는 책도 있었듯이, 휴일이라도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피곤한 몸에 늦잠 자고 일어나면 그냥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켜곤 했다. 잠시 볼까 했는데, 어느덧 오락프로에 사로잡히다 보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었다. 그렇게 휴일 저녁을 맞으면 오늘 하루를 헛되이 낭비했다는 자책과 후회가 저녁노을처럼 마음을 채우곤 했다.

편하게 삶을 즐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무언가 자랑스레 내세울만한 것을 이뤄내지도 못한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늘 자기를 계발해야 한다는 긴장이 있었지만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우울과 '계속 이러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실은 내 상태가 이렇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나를 살펴보는 작업을 하면서 내 안에 있는 깊은 불안과 우울 그리고 긴장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한 개인의 고유한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유래가 있는 사회적인 현상임을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근대 민주혁명이후 자기계발서가 인기 분야로

알랭 드 보통은 이제는 자기계발서로 불리는 책들의 효시로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꼽는다. 보스턴의 양초 제조공의 열일곱 자식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 무일푼의 젊은이가 오로지 자신의 지혜로 큰 재산을 모으고 존경을 얻게 되는 과정을 쓴 책이다. 19세기 초부터 서양의 서점들엔 이러한 자수성가한 영웅들의 자서전이나 '출세하기', '부자가 되기', '성공의 법칙'과 같은 처세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출판 경향이 계속되어 이제는 베스트셀러를 낳는 대표적인 출판분야가 되었다.

한 대형서점의 자기계발 도서 진열대
 한 대형서점의 자기계발 도서 진열대
ⓒ 윤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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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근대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비롯하였다. 근대 민주주의를 열어젖힌 사상은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다는 평등한 인권의식이었다. 이러한 평등주의는 당연히 근대 이전을 지배했던 신분 위계제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많은 피와 땀의 결과로 신분 세습에 기인한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고 공식적으로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우리가 맞이한 건 능력주의 사회였다. 그래서 자기계발분야 대표적 베스트셀러인 앤서니 로빈스의 <네 안의 잠든 거인을 깨워라>(1991)처럼 "진심으로 결심하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신분제의 해방에서 비롯한 능력주의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구속을 가져왔다. 현재의 나의 지위와 모습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 된 것이다. 지금 현재 나의 곤궁한 처지는 내 능력의 산물이라는 불안을 안겨주었다. 결국 근대의 민주혁명은 누구나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이상과 함께 그 만큼의 불안을 가져다주었다. 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그 만큼 자기계발에 매진하게 되었고, 또 그 결과만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성취가 없으면 존중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이런 역사적 변화는 인간이 성장하면서 겪는 사회화의 불안을 더욱 심화시켰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은 사랑받지 또는 존중받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에서 온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기였을 때는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존재하는 것만으로 애정을 받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애정은 성취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좋은 성적이나 명성을 얻는 일을 통해 내가 사랑받고 존중받을 만한 사람인지 증명을 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자아상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더 이상 공식적으로 신분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 이 모든 것은 나의 성취에 달려있고,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세상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외면 받는다는 불안은 극대화되었다. 그의 책 제목 <불안>처럼 남들이 인정하는 지위를 성취하지 못하면 불안한, 그래서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도 자기 증명에 힘써야 하는 한국 사회

한국사회로 시선을 돌리면 이런 변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되면서 압력이 더 클 수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성적이 안 좋으면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없어요."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에 나온 대치동 학원을 다니는 초등학생들의 말이다. 한국의 공부문화를 살피기 위해 온 하버드생들이 공부와 사회생활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나온 대답이다. 하버드생들은 초등학생인데도 밤 12시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초등학생들의 이야기에 놀라며,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의 시선 때문에 열심히 공부한다는 아이들의 얘기는 충격적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우리에겐 매우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의 한 장면. 하버드 대학생이 한국 초등학생들의 답변에 놀라는 장면. 초등학생들은 공부를 못하면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의 한 장면. 하버드 대학생이 한국 초등학생들의 답변에 놀라는 장면. 초등학생들은 공부를 못하면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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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건 치열한 자기증명의 시작에 불과하다. 대입이라는 험난한 고지를 향해 긴장하며 달려가야 한다. 대학에 들어간다고 끝이 아니다. 이제는 '스펙'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를 증명해야한다. 회사에 들어가면 실적 증명이 기다린다. 승진이 아니라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해야 한다. 단지 사랑받고 존중받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과제이자 절박한 명령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골프를 즐겼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슬럼프면 못하는 대로, 때로는 맥주도 마시고, 즐겁게 골프를 했다. 반면 우리는 죽고 살기로 한다. 그러니 생명이 오래가지 못한다."

프로골퍼 박지은이 은퇴 선언 후 2012년 8월20일 기자간담회에서, 40대를 훌쩍 넘기면서도 전성기를 맞는 미국 골퍼들을 보면서 느낀 바를 털어놓은 말이다. 사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지 않는가. 다들 '죽고 살기로' 시합하듯 살아야 하는 프로 선수들이다. 삶은 즐기는 장이 아니라 나를 증명하기 위해 경쟁하는 '필드'이다. 문제는 그렇게 힘들게 살아도 소수만이 인정받는 승자가 되고, 그 소수마저도 지위를 유지하지 못할까봐 계속적인 불안에 시달린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민주주의의 고갱이 '천부인권'

보통의 책에 보면 중세의 궁핍한 계급은 근대의 후손이 결코 누리지 못할 정신적 평온을 누렸다는 구절이 있다. 자신의 운명을 선뜻 받아들인 귀족사회의 하인들은 "드높은 생각, 강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고 한다. 평등한 능력주의 사회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출발점이 다르고,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과 장애물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형식적으로만 평등한 사회에서 온갖 짐을 떠안고 경쟁하다가 상처입고는, 이제는 또 '힐링'한다고  법석을 떠느니 차라리 중세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정말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낳으려고 피를 흘려가며 민주혁명을 쟁취한 것일까. 그렇진 않다.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은 잊고 살아왔다. 근대 민주주의 가장 중요한 깨달음, '천부인권'이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하늘이 부여한 존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내가 잘났건 못났건 남자이든 여자이든 피부색깔이 검든 희든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성취했든 못했든 지위가 어떻든 간에 나는 내 존재 자체로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 문득 이러한 사실을 내가 한번이라도 되새겨 본적은 있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늘 타인에게 존중받고 인정받기위해 그에 못 미친다고 자책과 질책만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내 스스로를 존재 자체로 존중하지 못한다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할 것이다. 나의 천부인권을 존중할 때 타인의 인권도 그 자체로 존중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생겼다.

이럴 때 자기계발은 의무가 아니라 자기실현의 소명이 된다. 자신의 특성에 맞는 자기를 실현하는 소명. 모든 꽃이 예쁘고 모든 풀과 나무가 그 자체로 존중받는 세상에서 누구나 장미꽃이 될 필요는 없다. 내 씨앗에 맞는 형상을 온전히 피워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본래면목'을 찾는 것이 자기계발이 된다.

자기계발에 매달리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자

우리는 끝없이 성과를 내야하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말한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성과를 낸 사람은 더 높은 성과를 위해 긴장하고, 성과를 못낸 사람은 낙오자가 될까 불안한 사회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기를 계발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외면받지 않으려고 하는 공부에서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듯이, 강박에서 나온 자기계발은 자기계발보다는 자기소진이라는 피로와 우울함을 가져다 줄 뿐이다.

그럴 땐 자기계발에 매달리기 보다는 자기를 돌아보자. 사회적 압력 아래에서 형성된 자기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증명해야 하는 나가 아닌 보편적 인권을 지닌 존재인 나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지며 삶의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나를 성장시키는 일이 즐거워질 수 있다.

이렇게 내면을 살피자 떨어지는 해가 그리는 노을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은행나무(2011)


태그:#자기계발, #불안, #우울, #알랭드보통, #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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