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생했다. 어미와 놀아도 주고 복받을겨."

제주도 내 집에서 3박 4일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간 엄마가 버스 안에서 문자를 보내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복 받을 일을 한 걸까? 오죽하면 엄마가 이런 말을 할까' 3박 4일 엄마와 함께 놀러 다닌 것 정도로 '복받을겨'라는 말을 듣는 나는, 못된 딸이었다.

나이 서른넷에 하게 된 엄마와의 첫 여행이, 내가 사는 제주도 집을 향한 여행이라니. 하나뿐인 딸자식은 철딱서니 없게도 어느 날 고연봉의 직장을 차버리고 제주도로 훌쩍 가버렸다. 거기서 살아보겠다고 하더니 명절이나 돼야 얼굴을 비친 지가 어느새 일 년이다. 

얼마 전부터는 집을 빌려 공사를 하더니 생판 모르는 아가씨들과 함께 산다고 하는 이상한 딸내미를 '사찰'하기 위해 서울 사는 엄마가 제주에 떴다.

엄마가 우리 집 보겠다는데... 왜 하필 지금 대문이 무너지냐

요즘 가을을 맞이한 협재해수욕장에서 보이는 비양도의 모습
 요즘 가을을 맞이한 협재해수욕장에서 보이는 비양도의 모습
ⓒ 조남희

관련사진보기


"이번 추석 연휴에 올라왔다가 엄마랑 같이 내려가자. "
'…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응.'

이렇게 사는 것이 나에게 어울리고 좋은 일이라고 설득해오고, 엄마·아빠가 이젠 어쩔 수 없이 인정, 아니 포기를 하는 것 같았어도, 정작 내가 사는 모습, 내가 사는 집을 엄마가 와서 본다고 하니 긴장이 되었다.

제주도하고도 중산간 농촌마을 깊숙이, 그러고도 펜션같이 좋은 주택도 아닌 작고 오래된 농가주택을 공사해서 세 여자가 부대끼며 사는 우리집(쉐어하우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실지 알 수 없었다.

말도 별로 없고 으레 딸에게 있는 애교란 것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내 성격 탓, 서울에선 직장 생활하느라 바쁘다고 엄마를 아침에나 한 번씩 보는 하숙집 아줌마로 만들고 살아온 탓에, 엄마와 대체 3박 4일을 뭐하면서 지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추석 연휴를 맞아 마침 여자1호는 육지에 있는 시댁으로, 얼마 전 들어와 사는 여자2호도 서울로 가고 없었다. 연휴가 끝나고 드디어 엄마와 함께 제주도로 가려는데, 가까이 지내는 이웃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희야, 지나다 보니 너네 집 대문이 무너졌더라."

원래 대문이 없던 우리 집에 여자1호의 신랑이 와서 집에 남아 있는 자재들로 임시로 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며칠새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그 문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억장도 무너지고 있었다. 하필이면 엄마가 우리 집을 보겠다는데. 왜 하필 지금 무너지고 난리인지.  
    
무너진 대문을 사이에 두고 놀러오신 이웃집 삼춘들과 엄마는 깨를 흥정했다.
 무너진 대문을 사이에 두고 놀러오신 이웃집 삼춘들과 엄마는 깨를 흥정했다.
ⓒ 조남희

관련사진보기


"엄마 잠깐만 차에서 기다려!"

무너진 문을 급히 수습하고 집으로 엄마를 안내했다. 엄마에게 여자2호의 방을 내드렸다.

"엄마, 우리집 어때?"
"귀뚜라미 소리가 다 들리고 시골은 시골이구나. 공사하느라 고생했겠다.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걸 할 생각을 다 했니…(한숨)"

잠자리가 불편하시지는 않은지, 무슨 마음으로 누워 계신지 생각하며 노심초사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건 나 뿐은 아닌 것 같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한숨 소리와 뒤척이는 소리에 이어 한참 만에 도롱도롱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불을 끄자 어느새 반딧불이가 방까지 들어왔는지 조그만 불빛이 방 안을 조용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냉장고를 털어 온갖 반찬을 내놓고, 김치찌개를 끓여 아침상을 봐 드리는데, 그러고 보니 이게 내가 엄마한테 제대로 차려드리는 첫 식사인 것 같았다. 여자2호도 돌아와서 함께 있다. 

"엄마 내가 한 찌개 맛있지?"
"엄마가 한 김치가 맛있어서 그런거여."

여자2호가 옆에서 킥킥 웃고 있다.

처음으로 자세히 들은 엄마와 아빠의 연애사

제주도 우리집 부엌에서 아침잠도 깨지 못한 채 엄마를 위해 밥상을 차렸다.
 제주도 우리집 부엌에서 아침잠도 깨지 못한 채 엄마를 위해 밥상을 차렸다.
ⓒ 조남희

관련사진보기


엄마에게 관광지를 찍고 도는 여행이 아닌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여행을 하게 해주리라! 결심하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코스를 짜 놓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엄마가 제주도에 안 가본 데가 별로 없었다. 이런 이유로 '엄마를 위한 맞춤 코스'는 모두 허탈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작년 혼자 살았던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로 가서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으니 여기가 제일 좋다며 일어날 생각을 안 하셨다. 처음으로 엄마와 아빠의 연애사를 자세히 들어보게 됐다. 

"엄마가 여고 졸업하고 부산의 군부대에서 영문 타이피스트로 근무할 때, 네 아빠가 월남 갔다가 부산으로 발령 나서 부대에서 만났다. 연애하다가 에덴동산인가, 거기서 아빠가 엄마한테 뽀뽀하려고 해서 엄마가 기겁해 아빠만 두고 집에 와버렸어.

네, 아빠 성질 알잖니… 부하한테 그랬대. 어떻게 이 여자가 내게 이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이 여자랑 절교하겠다! 근데 그 부하가 그랬대. 형님 이런 여자 요즘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만났지. 몇 년 전에 그때 주고받던 연애편지들이 나오기에 다 태웠는데."

"왜, 그걸 태워? 기념으로 남겨둬야지!"
"지금 보면 눈뜨고 못 본다… 경~ 사랑하는 경(엄마의 이름 가운데자가 경이다.) 보고 싶소 막 이러면서."

아빠는 제대 후 영어 교사하다가 직장을 구한다고 혼자 서울로 갔다. 직장이 있어야 엄마에게 청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몰랐겠지만 사실 엄마는 그때 선을 보고 다녔단다. 아빠가 너무 가난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는 싫어하셨다고 한다.

삼박 사일 엄마와 제주도를 다니면서 가장 좋아하신 곳은 사려니숲길이다.
 삼박 사일 엄마와 제주도를 다니면서 가장 좋아하신 곳은 사려니숲길이다.
ⓒ 조남희

관련사진보기


"네 아빠는 정말 아랫도리만 차고 와서 엄마랑 결혼했다. 네, 친할머니가 탄 곗돈 15만 원, 엄마가 갖고 있던 돈 10만 원 보태서 서울 와서 그 돈으로 한남동 달동네 꼭대기에 방을 얻었어. 이사를 거기서만 네 번 다녔어.

아빠는 돈 아끼려고 회사에서 밥도 안 먹고 점심시간이면 집까지 걸어와서 밥을 먹고 갔어. 그 시간이 어찌나 정확한지 동네 가게들이 아빠가 올라오는 거 보고 열두 시인 줄 알고 그랬어. 그때가 75년도쯤이었던가, 그때는 삼백만 원이면 그 동네 집을 살 수 있었던 시절이야. 네, 아빠 월급이 7만 원이었다."

엄마 아빠는 안 먹고 안 입고 안 써서 주변에 지독하다, 치사하다 소리를 들어가며 7년만에 아파트를 장만했다.  그때 엄마 나이가 서른넷. 묘하게도 지금 내 나이가 그렇다.

같은 나이의 두 여자의 선택은, 이다지도 다르다.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위만 바라보며 쉼 없이 달려온 엄마·아빠는 당연히 자식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어느 날 숨이 차니 좀 쉬어야겠다며 브레이크를 밟아버리고 제주로 건너와 버린 딸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엄마와 함께 3박 4일을 보내고, 무너진 대문을 나와서 엄마 혼자 서울로 가던 날, 내가 물었다. 나는 '사찰'의 결과가 궁금해졌다.

"엄마, 집에 가서 아빠한테 뭐라고 보고할 거야?"
"생각보다 네가 잘 먹고 잘산다고,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그리고 네가 선택한 길이니 어떡하니,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 없으니 걱정은 되도 할 수 없는 거지 뭐."

엄마는 내 손을 한 번 잡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제주공항 검색대를 향해 갔다. 신분증도 잊고 와서 주민등록등본을 들고 신분 확인을 받기 위해 들어가는 길이었다. 혼자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엄마이기에 게이트 확인, 편명 확인, 짐 찾기 등등을 일일이 일러줘야했다. 비행기를 제대로 잘 탔는지, 전화를 받지 않아 불안해하며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내게 엄마는 집으로 가는 공항버스에서 문자를 보내왔다.

"3일 동안 너랑 같이 제주도에서 잘 보냈다. 너 나름대로 그곳에서 역할을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 엄마는 마음이 놓인다. 고생했다. 엄마랑 놀아주느라. 복 받을껴."

엄마와 나는 서로 걱정하고 있었는지도...

서울로 가시던 날, 우리집 앞에서 엄마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울로 가시던 날, 우리집 앞에서 엄마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 조남희

관련사진보기


제주로 오는 길 비행기 안에서, 엄마가 뜬금없이 했던 얘기가 있었다.

"이제 너도 알아야 할 때가 됐어. 엄마·아빠도 곧 칠순이다. 네 아빠가 월남전 갔다 오는 바람에 나라에서 엄마·아빠 납골당을 무료로 해준단다. 네, 새언니한테도 이번에 얘기했더니, 아주 좋아하더라. 속으로 그래 너 돈 굳었다, 했지. 크크. 그러니 그건 앞으로 걱정하지 말어." 

엄마와 나는 서로 걱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내 생각보다 제주에서의 시간에, 내 집에 잘 적응했고, 혼자서도 헤매지 않고 알아서 잘 돌아가셨으며, 오히려 내 걱정 한 가지를 덜어주고 가셨다. 엄마가 살아온 길과 내가 걷는 길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저 이대로도 좋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태그:#제주도, #저지리, #쉐어하우스
댓글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