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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원 창시자 이현필 선생
 동광원 창시자 이현필 선생
ⓒ 기독교동광원수도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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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분노를 누르며 침묵하고
격함이 없이 말하며
고즈넉이 울며
탄식 없이 괴로워하며
눈물의 그늘 밑에 피는 미소이며
사랑은 요구함 없이 주기만 하며
항거함이 없이 고난을 받으며
망설이지 않고 사죄하며
오직 스스로의 나약을 슬퍼합니다
- 이현필

'마을공동체'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마을공동체 열풍은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뒤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급격한 도시화와 인위적인 개발 속에 사라져버린 '사람'의 가치와 '신뢰의 관계망'을 되찾아 나가겠다는 게 서울시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의 기본적 문제의식이었다.

지난해 5월, 서울시는 토대 마련·경제·복지·문화의 4개 시책 35개 사업으로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에 725억 원을 투자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마을공동체 4개 시책(①마을공동체 육성을 위한 토대 만들기 ②함께 돌보는 복지 공동체 ③함께 만들고 소비하는 경제공동체 ④신 나고 재미있는 문화공동체)에 걸맞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공동체'라는 단어에 의미 부여를 얼마나 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업지원비를 중점으로 진행되는 의존적 마을공동체 사업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도움 거부하며 자급자족하는 사람들

남원 동광원 본원 전경
 남원 동광원 본원 전경
ⓒ 기독교동광원수도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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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업비나 외부의 도움을 거부하며 자급자족하는 삶의 양식을 토대로 마을공동체를 일궈가는 곳이 있다. 바로 '동광원'이라고 불리는 영성 수도공동체다.

1943년 이현필 선생이 전북 남원 주민들 중 뜻이 있는 이들에게 성경 강해를 시작한 게 '동광원 공동체'의 시작이 됐다. 이들은 지리산 자락 서리 내와 갈보리에 모여 움막을 짓고 농사와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삶을 영위했다. 이후 공동체 구성원이 차츰 늘었고, 1947년 소년소녀 14명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수도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갖췄다.

1950년에는 광주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유지 70인이 모여 당시 고아원을 설립하고, 당시 광주 YMCA 총무였던 정인세 선생이 원장직을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공동체는 '동광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전쟁 후 600여 명의 '고아'들을 돌보며 수도자의 삶을 살아갔다.

1965년 2월 중순 즈음에는 사회복지법인인 '귀일원'을 설립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조로 장애인 가족들을 돌봤다. 이후 화순 도암과 벽제 계명산 아래 분원을 설립하고, 각 지역별 영성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자발적 가난을 행하다

벽제 동광원 박공순 원장
 벽제 동광원 박공순 원장
ⓒ 기독교동광원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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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는 특별히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깨끗해야 한다'는 정절을 지키는 순결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수칙을 지키며 일생을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남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기독교 동광원 수도회지 중에서 발췌)

청빈·순결·순명·깨끗한 사랑과 교제·자급자족의 노동과 봉사. 이것이 '동광원'의 생활 수칙이다.

청렴하게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청빈'의 삶, 신체적으로 또는 심적으로 깨끗하게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생활, 순수하게 소명을 따르는 온건한 '순명'의 삶 그리고 깨끗한 사랑의 교제와 부지런히 일하고 봉사하는 자급자족적 생활을 일상 구석구석에서 구현하는 게 '수도자의 삶'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지난 7월 말, 박공순 벽제 동광원 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 박공순 원장님은 어떻게 동광원에 오시게 됐나요.
"한국전쟁 다음 해인 1951년, 내 나이 19살 때 이현필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내가) 전쟁과부가 된 걸 어떻게 아셨는지, 어느 날 (이현필 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셨지. 그러곤 '큰 나무 밑에서 함께 지내볼 생각 없느냐'고 물으셨어요. 그때 기분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만났을 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 뒤로 선생님을 따라다니다가 20살 때부터 동광원 본원(남원)에 살기 시작했어요."

- 이현필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현필 선생님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님은 원래 노비셨어요. 그러다 성경에 삶의 답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공부하기 시작하셨지. 이현필 선생님은 이세종 선생님 움막에서 성경을 배우다가 '삶'과 '성경'(신앙)이 다른 것에 번뇌해 홀로 산에서 3년 정도 공부하면서 지내기도 했어요. 이현필 선생님은 수도적 영성가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투철한 분이었어요. 이현필 선생님의 뜻을 기려 동광원에서는 지금도 8월 15일이 되면 함께 수양회를 하며 민족 해방을 기리고 있어요."

"매일 전쟁 고아들이 왔었어... 하루가 금방 갔지"

다석 유영모 선생은 종종 동광원에 내려와 강의했다. 왼쪽부터 엄두섭 목사, 유영모 선생, 정인세 원장.
▲ 동광원 수양회 사진 다석 유영모 선생은 종종 동광원에 내려와 강의했다. 왼쪽부터 엄두섭 목사, 유영모 선생, 정인세 원장.
ⓒ 기독교동광원수도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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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을 겪으며, 공동체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한국전쟁 이후 전쟁 고아들이 매일 고아원으로 왔어요. 그중에는 나병이나 폐결핵에 걸린 아이들도 많았어요. 그때는 애들 씻기고, 돌보고, 먹이고 나면 하루가 그냥 가버렸어."

- 한국전쟁을 실제 겪었다면 북한에 대한 '반공의식'이 지금 전후세대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이현필 선생님은 북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나요.
"이현필 선생님은 생각이 넓은 분이셨어요. 북한을 적으로 보지만은 않았어요.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다'라고 하신 것처럼 북한 동포들을 다 사랑하셨을 것이라 믿고 있어요."

- 벽제 동광원은 어떻게 생성됐나요.
"1957년에는 능곡에 공동 생활터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계명산 자락 '벽제'로 이동했지. 그 당시에는 니땅 내땅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자리 잡고 살면 내 땅이었던 게지. 그래서 여기저기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계명산 꼭대기 액무봉쪽에 평지가 있어서 거기 3000평 정도를 개간했어요. 얼마간 농사를 참 잘 지었지. 그런데 어느 날 당시 고양군(고양시) 직원이 와서 불법 개간이라는 거야. 그리고는 미군부대가 들어오더라고…. 마을 옆 농지는 그때 초대원장님이 돈이 좀 있어서 땅을 매입한 것이었지요. 이후 조금씩 수도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갔어요."

잘나가던 성냥 공장 문 닫은 이유

경기도 고양 벽제 동광원 본원 전경
 경기도 고양 벽제 동광원 본원 전경
ⓒ 기독교동광원수도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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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여 년을 동광원과 함께하셨는데, 공동체 생활 중 개인적 위기나 공동체적 위기가 있었던 적이 있나요.
"공동체 생활에 회의가 들었으면 즌작(진작)에 나갔을 거야. 우리 벽제에도 중간에 결혼해서 나가기도 하고 그랬어. 나는 '예수는 십자가를 지셨는데 내가 힘들게 뭐가 있나'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리고 이게 공동체의 위기인지는 모르겠는데, 공동체가 좀 커지자 자립을 위해 성냥 공장을 시작한 적이 있었어요. 꽤 잘됐어요. 그런데 이현필 선생님이 어느 날 그만두자고 하셨어요. 목표가 경제적 부강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벽제 동광원 수도원 내부
 벽제 동광원 수도원 내부
ⓒ 김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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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 동광원 주변 텃밭
 벽제 동광원 주변 텃밭
ⓒ 김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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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를 한 50년 지으셨는데, 이쯤 되면 '달인'이 되셨을 것 같아요.
"사람이 살려면, 주변에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강도 있고, 논도 있고 그래야지. 자연 없이 우째사노. 땅만 바라보고 사는데 땅 안 파고 노동 안 하면 못사는 거예요. 여기 1000평 정도 원래 농사를 다 손수 지었어요. 머릿속에 농사, 농사, 농사 생각뿐이었지. 밤이고 뭐고 자나 깨나 농사 생각하며, 수많은 농법을 써봤지.

퇴비를 쓴 적이 없는데, 고양군에서 하도 농작물을 잘 생산해 내니까 농사 잘 짓는다고 '퇴비상'을 주더라고. 예전에는 자연만으로도 (농작물이) 잘 자랐는데 요즘에는 벌레 때문에 나오는 게 별로 없어요. 요즘 우리 밭은 주말 농장으로 다 빌려주고, 농사를 좀 가르쳐주고 그러고 있어요."

- 벽제 공동체는 어떻게 수도생활을 하나요.
"각자 규율이 달라요. 매일 기도시간(낮 시간) 정해서 1시간 정도 기도하시는 분도 있어요. 나는 오전 5시 새벽기도를 하고 있어요. 고기를 멀리하고, 노동하며 살려고 하는데, 요즘은 허리가 아파서 일도 못해. 그래도 자연을 보며 즐겁게 살고 있어요."


태그:#공동체, #동광원,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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