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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민약론(民約論)>을 다 정독하여도
집권당에 아부하지 말라는 말은 없는데
민주당이 제일인 세상에서는
민주당에 붙고
혁신당이 제일인 세상이 되면
혁신당에 붙으면 되지 않는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제2공화국 이후의 정치의 철학이 아니라고 하는가
여보게나 나이 사십을 어디로 먹었나
8.15를 6.25를 4.19를
뒈지지 않고 살아왔으면 알겠지
대한민국에서는 공산당만이 아니면
사람 따위는 기천 명쯤 죽여보아도 까딱도 없거든

데카르트의 <방법통설(方法通說)>을 다 읽어보았지
아부에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일세
만사에 여유가 있어야 하지만
위대한 '개헌' 헌법에 발을 맞추어 가자면
여유가 있어야지
불안을 불안으로 딴죽을 걸어서 퀘지게(뒈지게?-기자) 할 수 있지
불안이란 놈 지게작대기보다도
더 간단하거든

베이컨의 <신논리학(新論理學)>을 읽어보게나
원자탄이나 유도탄은 너무 많아서
효과가 없으니까
인제는 다시 비수를 쓰는 법을 배우란 말일세
그렇게 되면 미.소보다는
일본, 서서(瑞西; 스위스-기자), 인도가 더 뻐젓하고
그보다도 한국, 월남, 대만은 No.1 country in the world
그런 나라에서 집권당이라면
얼마나 의젓한가
비수를 써
인제는 지조랑 영원히 버리고 마음 놓고
비수를 써
거짓말이 아냐
비수란 놈 창조보다도 더 산뜻하거든
만시지탄은 있지만
(1960. 7. 3)

선생님, 선생님께서 이 시를 쓰신 즈음의 일기를 살짝 엿보았습니다. 1960년 7월 4일과 7월 5일 자 일기들입니다. 4일 자 일기에는 이 시 첫머리에도 등장하는 루소의 <민약론> 제3편 제4장 '민주정치'가 인용되어 있더군요. 딱딱한 정치 논설이지만 찬찬히 되새겨 볼 만한 화두거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민주정치 혹은 인민정치의 정부만큼, 내란이나 국내의 선동에 움직여지기 쉬운 정부는 없다는 것도 함께 말해 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정체(政體)만큼, 정치의 변경에 대해서 강하고 또 부단히 응하기 쉬운 정체는 없으며 또한 이 정체만큼, 정체 유지에 열심과 용기가 필요한 정체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정체 밑에서는 각 공민(公民)은 강한 실력과 확고한 정신으로 무장하고, 저 유덕(有德)한 파테에노 백작이 폴란드 의회에서 한 말, "우리들은 평온한 노예보다도 위험한 자유를 택한다"를 매일, 그의 배 밑으로부터 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 만약에 신(神)들의 국민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적으로 다스려질 것이다. 그다지 완전한 정부는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김수영 전집 2≫(산문) 496쪽)

진정한 의미의 민주(인민)정치는 허약합니다. 나쁜 의미의 포퓰리즘에 휘둘리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한계가 오히려 약이 되기도 합니다. "평온한 노예"가 아니라 "위험한 자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민주주의를 공부해야 합니다. 불완전한 정부는, 그렇게 실력을 가진 공민들의 힘을 통해 점점 더 완전해집니다. 선생님께서 루소의 <민약론>을 통해 말씀하고 싶어하신 게 바로 이것들이 아닐런지요.

데카르트(1590~1650)의 <방법통설>이나 베이컨(1561~1626)의 <신논리학>을 끌어오신 까닭도 마찬가지입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그 유명한 명제가 탄생한 책이 바로 이 <방법통설>이 아닙니까. <신논리학>은 "아는 것이 힘"임을 강조한 베이컨이 종족(인간중심주의)과 동굴(우물 안 개구리 식의 태도)과 시장(말의 문제)과 극장(헛된 명예의 유혹)의 우상을 경계하면서 귀납 추리의 바탕이 되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지요. 이들 모두 진정한 앎을 향한 꾸준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혁명이 미완으로 끝나는 게 두려우셨겠지요. '만시지탄'의 부담감을 무릅쓰면서도, '비수'를 통해 혁명이 완전해지기를 힘주어 말씀하신 까닭도 여기에 있었으리라 봅니다. 이 시가 결과적으로 혁명을 선동하는 작품이 된 이유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 시가 신문에 실리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선생님의 일기 몇 토막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7월 4일
(전략) 어제 창동에 나가는 길에 다방 '세프팡'에 들렀다가 쓰게 된 시 <만시지탄은 있지만>을, 수명(김수영 시인의 여동생)이 청서해 준 것으로 오늘 '동방'에 들러서 경향신문 기자를 만나가지고 주긴 주었지만 내어주려는지 의아. 안 내준다면 한국일보에 줄 작정이다.

7월 5일
'7월 재판' 초일이라 구경 겸 나가서, 경향신문에 들러가지고 어제 준 시를 찾아서 세계일보에갖다 줄 작정을 하였는데 들르자마자 고료를 준다. 이겼다! 내가 이긴 게 아니라 저쪽이 이겼다. 간밤에 성급하게 자포자기한 것이 미안하다. (≪김수영 전집 2≫(산문) 495, 496쪽)

"간밤에 성급하게 자포자기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이긴 게 아니라 저쪽이 이겼다"라는 구절이 단서가 되고 있는 듯한데, 그 구체적인 의미가 선뜻 떠오르지 않습니다. "저쪽이 이겼다"는 것은 곧 선생님께서 졌다는 뜻일 테지요. 졌다는 것! 그것은, '만시지탄' 속에서 "비수를 써"(3연 10행) 하고 거듭 강조하는 말이 실은 혁명의 실패에 대한 예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수'를 쓰는 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을 듯합니다. '비수'의 날카로운 날로 일도양단(一刀兩斷)하지 않으면, 혁명은 언제든지 반동으로 귀결되고 마는 게 역사의 교훈이었습니다. 그러니 '비수'야말로 "창조보다도 더 산뜻"(3연 14행)하게 새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지 않았겠습니까.

선생님, 그렇다면 그 '비수'가 뜻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비수'는 분명 반혁명론자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루소가 <민약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파테에노 백작의 말에서 그 '비수'의 의미를 찾아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평온한 노예보다도 위험한 자유를 택한다."

그 "위험한 자유"를 택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확고한 정신으로 무장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강한 정신으로 무장한 평범한 우리들이 바로 혁명을 완성하는 역사의 주체가 됩니다.

"평온한 노예"의 삶을 보장하는 테두리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것은 단 한 발자국뿐입니다. 생각의 조그마한 변화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할 때라야 우리는 위험하지만 완전한 자유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어하셨을, 깨어 있는 일상(인)의 혁명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테지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만시지탄은 있지만>, #김수영, #평온한 노예, #위험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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