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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석유파동 이후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고 노동시장이 유연화면서 선진국 노동운동은 수세 국면에 접어들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뒤 신자유주의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면서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주체가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고 있다.

선진국 노동운동이 후퇴하던 시기에 한국의 노동운동은 뒤늦게, 압축적이면서도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1987년부터 1997년까지 10년은 공세 국면이었다.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1995년 11월 민주노총 건설, 1996년 12월부터 1997년 1월 사이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투쟁이 그것이다.

1997년 11월 외환위기를 겪은 뒤 신자유주의와 노동시장 유연화가 본격화되면서, 한국의 노동운동도 수세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2007년까지는 교원노조와 공무원노조 합법화, 산별노조 건설과 산별교섭 추진 등의 성과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부터는 정부와 자본의 노조 파괴 공세가 노골화되면서, 산별노조 건설과 산별교섭 추진이 정체하거나 후퇴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와 노동시장 유연화가 퇴조를 보이는 상태에서, 한 달 뒤 대통령 선거에서 어떤 정부가 들어서는가는, 향후 노동운동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산별노조와 산별교섭의 필연성

다른 나라는 노동운동이 분권화 추세를 보이는데, 한국은 왜 뒤늦게 기업별 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집중화를 추진하는가? 산별노조 건설 초기단계에 많이 듣던 질문이다.

이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 중심의 노동시장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은 10%밖에 안 되고, 나머지 90%가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이다. 기업별 노조체계에서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은 단결권조차 누릴 수 없다. 지난 50년 동안 노조 조직률은 20%의 벽을 넘어선 적이 없고 항상 10%대였다. 이는 뿌리 깊은 반공주의, 성장 제일주의도 원인이지만, 대기업 정규직이 10%밖에 안 되는 노동시장 구조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도 노동기본권을 누리고 조직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의 벽을 넘어 산업별 노사관계를 진전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뿐만 아니다. 노조 집행부가 아무리 사회정치적으로 전향적이고 개혁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기업별 교섭 의제는 기업 수준에서 해결 가능한 임금과 노동조건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노조가 있는 대기업 정규직만 단체교섭 성과를 향유할 수 있고, 임금 등 노동조건 불평등은 심화되기 마련이다. 노동운동이 아무리 계급적 단결과 사회적 연대를 중시한다 해도, 기업별 노조와 교섭 체계에서는 조합원의 이익만 중시하는 실리적 조합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물론 기업별 노사관계가 갖는 한계는 외환위기 이전에도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산별노조와 교섭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자본의 구조조정이 일상화되면서 기업별 체제로는 대응하기 힘들다, 초기업 수준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의 구조조정이 역설적으로 산별노조와 산별교섭을 촉진시킨 것이다.

산별노조의 성과와 한계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14만 4천명(10.3%)이던 초기업 노조 조합원이 2003년에는 48만 4천 명(31.2%), 2011년에는 96만 4천 명(56.0%)로 전체 조합원의 절반을 넘어섰다. 민주노총만 보면 초기업 노조 조합원이 46만 5천 명(82.7%)에 이른다. 신자유주의와 노동시장 유연화, 노동운동 분권화라는 악조건 속에서 절반 이상이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한 것은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노동운동 일각에서는 "무늬만 산별"이라고 비판 하지만, "무늬라도 산별"이 된 것은 대단한 성과로 평가해야 한다.

산별노조로 전환하자 연대가 제도화되고, 유기적 연결이 강화되고,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대한 능동적 대처가 가능해졌다. 과거 기업별 체제에서는 탄압이 자행되면 주변의 작은 조직들끼리 품앗이 연대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산별노조에서는 파업기금이나 희생자구제기금을 통한 체계적인 지원이 가능해졌다. 대기업이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대기업 조직들의 기금 적립 기여도가 크다는 점에서, 산별노조를 통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연대의 제도화가 진전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금융노조는 산별노조로 전환한 2000년에 곧바로 산별교섭을 시작했지만, 2001년에 전환한 금속노조는 2003년에 산별교섭을 시작했고, 1998년에 전환한 보건의료노조는 6년이 지난 2004년에야 산별교섭을 시작했다. 금융노조는 산별교섭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금속노조는 산별교섭이 불안정하고, 보건의료노조는 사용자단체가 해산되고 산별교섭 틀이 훼손되는 등 후퇴한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어쨌든 사용자단체가 구성되고 산별교섭이 진전되고, 교섭의제가 기업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정책 사안으로 확장된 것은 중요한 성과로 짚어져야 한다. 금속, 금융, 보건의료 세 조직 모두 사용자단체 구성을 강제해냈고, 주5일제 도입을 앞당기거나 추가적 보호장치를 마련했으며, 산업별 최저임금, 비정규직 보호, 산업공공성 강화도 부족하나마 단체교섭 의제로 다루었다. 금융노조와 보건의료노조는 임금협상을 하고 있지만, 금속노조는 아직 임금협상을 못 하고 있는데 이는 한계로 지적되어야 한다.

금속, 금융, 보건의료 모두 동종 산업에서 규모가 가장 큰 조직이지만, 해당 산업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 조직화에 별다른 성과를 못 내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 기업별 노조체계에 익숙한 사업장단위 조직화나 조직운영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별노조에 걸맞은 운영방식도 정착되지 않고, 재정과 인력의 효율적 운영도 미흡한 실정이다.

산별노조 전환은 노조가 알아서 하면 되는 문제지만, 산별교섭은 상대방이 있어 사용자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산별교섭이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는 산별교섭 이외에 산별협의와 공동사업을 통해 산업별 노사관계를 조금씩 형성해나가는 것도 필요한데, 이러한 노력도 아직 부재한 실정이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듯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노동운동 특히 산별노조에 대한 정부와 자본의 공세가 집중되었다. 정부는 전임자 임금지급을 제한하고 기업수준 교섭창구 단일화를 강제하는 등 노동법을 개악했고, 자본은 온갖 탈법적 수단을 동원해 산별노조의 핵심 사업장을 파괴했다. 이러한 흐름도 산별노조와 교섭의 진전을 가로막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 산별노조운동의 과제   

이제 "무늬라도 산별" 단계는 어느 정도 완료되었다. 앞으로는 "명실상부한 산별"로 발돋움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업별 노조 관성에서 벗어나 산별노조에 적합한 조직화 방식을 개발하고 정착시켜야 한다.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 조직화는 '사업장 단위에서 지역 단위로' 중심축을 옮기고, '조직 → 교섭 → 투쟁'의 단선적 방식을 벗어나 당장 조직화가 어려운 곳은 협회, 친목회 등 우호적인 풀을 폭넓게 만들어야 한다. 산별노조 지역지부는 교육, 상담, 복지 등 서비스 기능을 강화하고,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제도적 지원방안을 강구하는 등, 산업별 노사관계 형성과 조직화에 유리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산별노조에 적합한 조직운영 방식을 확립해야 한다. 민주노총 일각에서 주장하는 5개 거대산별로 재편은 비현실적이다. 우리처럼 노동자들 사이에 격차가 크고 초기업 노사관계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산업별 동질성에 기초해 초기업 노사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한다. 이를 단숨에 뛰어넘자는 주장은 오히려 산별노조 내 이질성만 심화시켜 임금교섭 하나 변변히 못 하는 산별노조로 귀결되기 쉽다.

금속노조에서 기업지부를 인정하지 말자는 주장도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으로 거대기업 기업지부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유기적 연계를 강화할 것인 가인데, 국적 불명의 '지역지부' 원칙을 들먹이며 역량을 낭비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이밖에 산별 수준에서 일상활동을 강화하고 조직활동가 양성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양 노총을 망라해서 동종 산업 노조들 간에 공동사업, 공동 대응, 공동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단체교섭은 노사관계의 핵심이지만 상대방이 응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이를 강제할 수단도 미흡하다. 따라서 산별교섭을 안착시키려면 좀 더 장기적인 시야와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처럼 노동자들 노동조건과 기업 지불능력 격차가 크고, 초기업 수준 노사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나라에서, 중앙교섭 성사에만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역량 낭비다.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동질성에 기초해 부문, 분과, 지역, 대각선 교섭 등 다양하고 유연한 교섭방식을 활성화 시켜나가야 한다.

이밖에도 산업별 교섭을 진전시키려면 산업, 지역 등 초기업 수준 노사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모색과 실천이 필요하다. 산업별 노사협의회나 노사정협의회에서 산업정책, 고용지원서비스, 직업훈련 등 정책협의를 활성화하고, 산업별 취업알선, 직업훈련, 복지사업 등을 통해 산업별 노사관계와 주체 형성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

산별교섭을 진전시키려면 두 가지 걸림돌은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하나는 기업 수준에서 교섭창구 단일화 강제조항을 삭제하고, 다른 하나는 단체교섭 효력확장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산별로 조직형태를 전환했더라도 기업별 노사관계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계급적 단결과 사회적 연대를 강조해도 실제 운영은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실리적 조합주의로 기울어지기 십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산별교섭을 진전시키는 것과 더불어 계급적 단결과 사회적 연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노동운동의 이념을 정립하고 교육선전을 비롯하여 매개의 일상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산별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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