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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끝난 줄 알았던 가을이 절의 담장 밖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논산시 쌍계사 입구에서 만난 붉은 가을 이미 끝난 줄 알았던 가을이 절의 담장 밖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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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후. 애초 동행과 나는 관촉사를 가자고 나선 길이었다. 잔뜩 흐리고 비까지 뿌리기 시작하면서 무언가 심하게 꼬여가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일까, 관촉사로 가는 이정표 몇 개를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우리는 그대로 차를 돌려 나오면서 얼마 전 지인에게 들었던 '쌍계사'라는 절의 이정표를 만났다. 인연인가? '꿩 대신 닭'을 잡는 심정으로 안내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방향을 틀었다.

추수가 끝나가는 들녘 사이로 점점 더 깊어지는 굽이들을 얼마나 지났을까. 풍경은 점차 세속과의 거리를 멀찍이 벌려 놓고 있었다. 노랗거나 누렇게 물들어가는 떡갈나무 숲에도 저물어가는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길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 다른 기대감이 없던 우리는 조금씩 차창 밖 풍경에 압도당해 가고 있었다. 골이 깊으면 절이 크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닥불을 켜 놓은 것처럼 예쁜 단풍에 감탄을 쏟아놓는 사이 어디선가 불쑥 고개를 내미는 그것은 절을 지키는 강아지였다.
▲ 쌍계사를 지키는 강아지 모닥불을 켜 놓은 것처럼 예쁜 단풍에 감탄을 쏟아놓는 사이 어디선가 불쑥 고개를 내미는 그것은 절을 지키는 강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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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위에 쌓인 돌탑 또한 보통의 솜씨가 아니었다.
▲ 쌍계사 담장 위에 돌탑들 돌담 위에 쌓인 돌탑 또한 보통의 솜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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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닿을 무렵에 커다란 저수지가 나타났다. 뿌리를 물속에 내린 버드나무들이 지친 눈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사진작가들이 찍은 많은 사진들로 이미 친숙해져버린 '주산지'의 풍경과 제법 닮았다. 그리고 마지막 굽이를 돌자 마침내 쌍계사다. 수령을 헤아려볼 만한 엄청난 크기의 떡갈나무들이 군락을 지어 절을 호위하듯 둘러서 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을 만난 기분. 날은 흐렸지만 맘속에 들여놓았던 근심이 맑게 개었다.

이미 끝난 줄 알았던 가을이 절의 담장 밖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을 켜 놓은 것처럼 예쁜 단풍에 감탄을 쏟아놓는 사이 어디선가 '불쑥' 고개를 내미는 그것은 절을 지키는 강아지였다. 짖지도 않고 넌지시 내려다보더니 눈을 맞추기도 하며 우리의 동세를 살핀다. 곁에는 심심풀이로 주워왔을 신발 몇 짝이 나뒹굴고 있다. 볼수록 귀여워 다가가려 했지만 쉽게 곁을 내주진 않는 자존심까지 지녔다. 그 의뭉스러움이 풍월을 읊는 절개가 틀림없다.

값없이 마시고 갈 수 있게 배려한 마음씀씀이에 자비심이 읽혔다.
▲ 쌍계사(논산시)에서 나누어준 따뜻한 마음 값없이 마시고 갈 수 있게 배려한 마음씀씀이에 자비심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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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품은 산세와 오랜 수령의 나무들과 광활한 하늘이 이 절의 진짜 주인이 아닐까 싶었다.
▲ 쌍계사 경내 풍경 절을 품은 산세와 오랜 수령의 나무들과 광활한 하늘이 이 절의 진짜 주인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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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마침내 드넓은 부처님의 품속이다. 시원스럽게 뻗은 절 마당에서 갑자기 다섯 살 정도의 어린 아이로 돌아간 기분에 사로잡혔다. 영화에서 쓰이는 촬영기법인 'High Angle'(높은 곳에서 아래로 향하는 앵글)로 이 넓은 뜰을 훑어보았으면 하는 욕심이 들어찬다.

"이리 와. 커피 마시자!"
"응? 웬 커피?"

벌어진 입을 다물고 커진 눈을 다듬고 동행이 있는 천막으로 다가간다. 천막 위에 '차 한 잔 드시고 정 나누고 가세요!'라고 쓰인 큰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비가 내려 떨어져 있던 체온을 데워줄 커피가 유난히 더 반갑다. 값없이 마시고 갈 수 있게 배려한 마음씀씀이에 자비심이 읽혔다. 흐린 날씨 탓에 얼었던 몸이 스르르 풀리고 마음은 이미 따뜻한 아랫목에 가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마음은 몸보다 빨리 가방 속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지금 서둘러 담아두지 않으면 눈앞에서 금방 사라져 버릴 풍경처럼 나는 또 조급해졌다. 절에 쓰이는 건물 몇과 돌로 쌓아올린 정갈한 담장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인공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절을 품은 산세와 오랜 수령의 나무들과 광활한 하늘이 이 절의 진짜 주인이 아닐까 싶었다.

꽉 들어찬 것 같으면서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오묘한 공간의 미학이 어설픈 방문객을 품고, 또 품어 주고 있었다. 더없을 명당이다. 앉아서 보고, 일어서서 보고, 담장 곁으로 다가섰다가 물러서서 다시 보고, 나무 곁으로 다가섰다가 물러서서 다시 올려다본다. 제한된 카메라 앵글이 이렇게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흔치 않은데….

건축물에 대한 식견은 그리 많지 않지만 무식한 내가 보기에도 그 품새가 예사롭진 않았다.
▲ 쌍계사 대웅전 건축물에 대한 식견은 그리 많지 않지만 무식한 내가 보기에도 그 품새가 예사롭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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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으로 쓴 나무는 재단하지 않은 본연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넣었기에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 쌍계사 대웅전 기둥 기둥으로 쓴 나무는 재단하지 않은 본연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넣었기에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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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꽃살과 함께 18세기 불교건축을 대표하는 미술품이라는 평가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 쌍계사 꽃살 무늬 내소사 꽃살과 함께 18세기 불교건축을 대표하는 미술품이라는 평가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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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간 공간 탐닉이 끝나고 발길은 자연스럽게 건축물들로 향했다. 가장 많이 눈길이 머문 곳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대웅전(보물 제 408호)이다. 건축물에 대한 식견은 그리 많지 않지만 무식한 내가 보기에도 그 품새가 예사롭진 않았다. 지붕 아래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맞추어 댄 나무쪽인 '공포'는 그 입체감이 마치 여러 개의 속치마를 챙겨 입은 공주의 드레스를 연상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화려한 느낌만 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동안 할퀴고 갔을 바람의 흔적이 역력했다. 애써 단청을 자주 덧바르지 않아 색이 바랬지만 오히려 그 편이 더 운치 있고 고풍스럽다. 기둥으로 쓴 나무는 재단하지 않은 본연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넣었기에 마치 그 기둥들은 본래 그곳에 서 있던 나무이고, 벽이 그 나무들 둘레에 가서 붙은 것 같다. 그래서 정겹고 친화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대웅전이 지닌 가장 큰 보물은 다름 아닌 '나무 꽃살'이다. 오래 전 내소사에서 보았던 꽃살과 겨룬대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나무문에 새겨진 연꽃, 모란, 국화 등 여섯 가지 종류의 꽃잎 무늬 돋을새김에서는 섬세한 율동감이 느껴졌다. 한 잎 한 잎, 나무에 꽃잎을 새겨 넣었을 그 옛날 목수는 자신의 숨결은 물론 혼까지 담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꽃잎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극락에 도달하고 싶었을 목수의 몸부림이 느껴지는 듯 하고, 나무문에 꽃잎 한 잎 한 잎이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살아날 것 같았다.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굳이 감탄을 아낄 필요도 없었다. 내소사 꽃살과 함께 18세기 불교건축의 대표하는 미술품이라는 평가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꽉 들어찬 것 같으면서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오묘한 공간의 미학이 어설픈 방문객을 품고, 또 품어 주고 있었다.
▲ 쌍계사 연리목과 법고 전각 꽉 들어찬 것 같으면서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오묘한 공간의 미학이 어설픈 방문객을 품고, 또 품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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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마당을 사이로 대웅전과 법고가 있는 전각이 마주하고 있었다.
▲ 쌍계사 법고 큰 마당을 사이로 대웅전과 법고가 있는 전각이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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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마당을 사이로 대웅전과 법고가 있는 전각이 마주하고 있었다. 법고에 그려진 용의 형상은 생동감이 넘쳤다. 스님들이 법고를 울리는 소리를 상상하며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범종 대신 법고가 있는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인데, 그 궁금증은 그냥 남겨두기로 했다. 전각 주변으로 정갈하게 쌓아올린 돌담과 돌계단이 인상 깊었다. 돌담 위에 쌓인 돌탑 또한 보통의 솜씨가 아니었다.

법고 전각을 등지고 서서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왼쪽 산줄기 밑에 커다란 석불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널따란 마당을 가로질러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문득 몇 해 전 관촉사에서 보았던 거대한 미륵불의 모습이 떠올랐다. 관촉사의 석불은 입상이고 쌍계사의 석불은 좌상이다. 두 석불 모두 살집이 있고 두툼한 인상을 하고 있는데, 좌상이기 때문인지 이곳 쌍계사의 부처님 얼굴은 유독 더 펑퍼짐해 보인다. 자비로움이 충만하게 느껴지는 그 얼굴선이 복스러웠다. 그러나 눈, 코, 입은 또렷한 편이라서 그 안에 흐트러지지 않는 엄격함을 품고 있었다.

법고 전각을 등지고 서서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왼쪽 산줄기 밑에 커다란 석불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 쌍계사 석불 법고 전각을 등지고 서서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왼쪽 산줄기 밑에 커다란 석불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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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둘러보아도 단연코 아름다운 절이다.
▲ 기왓장 사이로 바라본 쌍계사 경내 풍경 어디를 둘러보아도 단연코 아름다운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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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은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고 남은 유적으로 추정(창건 연대는 고려시대 추정, 조선 영조 15년에 고쳐지었을 것으로 보고 있음)만 할 뿐이란다. 무언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면 대상은 좀 더 오묘하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법. 이것은 쌍계사라는 절이 가진 특유의 느낌을 더욱 배가 시켰다.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조금 더 오래 경내에 머물렀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절 마당 한 가운데에서 풍경들과 눈을 맞추고 한 바퀴를 빙 둘러보았다. 관촉사로 가려다 길을 잘못 들어 우연을 기회삼아 찾아간 쌍계사! 귀띔해 준 지인에게 돌아가면 반드시 공치사를 해주리라 다짐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나도 누군가에게 꼭 귀띔해 줄 장소가 한 곳 더 생긴 것이다.


태그:#논산시 쌍계사, #쌍계사 꽃살, #한국의 아름다운 절, #천년고찰 쌍계사, #쌍계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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