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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메르왕국의 전사에게 참파꽃을 헌화하다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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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지난밤 하늘 가득 뛰놀던 별들은 돌아가고, 대신 잠이 덜 깬 여행학교 아이들이 하나 둘 자전거를 끌고 호텔 앞마당으로 모여든다. 눈꺼풀이 반쯤 감겨있는 모양이 자전거를 끌고 오는지 자전거에 끌려오는지 모를 정도다. 호텔마다 한 방에 모여 늦은 시간까지 떠들고 놀았음이 틀림없다. 타이어에 바람이 잘 채워져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게 한 후, 막 동이 터오는 황톳길로 자전거를 내달으며 길을 나선다.

목적지는 '왓푸 참파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와는 동시대의 고대 유적지로 왕성했던 크메르 왕국의 거대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들의 여행 루트가 캄보디아와의 국경, 즉 태국-캄보디아-라오스의 삼각지대에 가까웠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길은 평지에다 좁지도 넓지도 않았다. 그만큼 자전거타기에 좋다. 왼쪽으로는 메콩 강이, 오른쪽으로는 논밭과 산들이 이어지는데 탁 트인 느낌을 줘서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그나마 드문드문 보이던 마을의 집들도 사라지자, 시야는 온전히 붉은 흙길과 강, 그리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만으로 채워졌다. 오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는 터라 아이들은 서로의 속도를 경쟁하며 맘껏 질주했다.

나도 남자 아이들의 질주에 동참해 본다. 별명이 '질주본능'인 승현이에 이은 2등. 좋다. 아이들은 자유롭고, 나는 행복하다. 하지만 곧 열대의 태양이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른 새벽에 출발한 것인데, 아침 7시부터 대지는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지쳐서 헉헉거릴 즈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은 맏이와 막내 역할에 아주 충실하다
▲ 다정한 자매 1 둘은 맏이와 막내 역할에 아주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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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 건 닮아도 성격은 완전 다르다
▲ 다정한 자매 2 생긴 건 닮아도 성격은 완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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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로 쌀국수 '포'나 팬케이크 등을 먹고 한 시간 정도를 쉰 다음에, 본격적인 유적지 탐험에 나선다. 매표소 직원이 뜻밖의 기분 좋은 소식을 말해준다. 만 15세 이하의 '어린이들(kids)'은 입장료가 무료란다. 만 15세면 우리 일행 15명 중에 중학교 3학년인 정호까지 모두 7명이나 해당된다.

관리직원이 놀라는 표정을 보니 우리 아이들 덩치가 이곳 아이들에 비해 많이 큰 모양이다. 아내는 입장료를 아끼게 되었으니 그 돈으로 숙소로 돌아가 수박파티를 열어야겠다고 하더니,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린이'가 된 녀석들을 놀린다.

"어린이 여러분! 길 잃어버리지 않게 손 꼭 잡고 따라와요~!" 

'왓푸'는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크게 세 개의 레벨로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레벨에는 '바라이baray'라고 불리는 큰 인공 호수가 있었고, 그곳 테라스에서 호수와 그 아래 마을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한 듯했다. 테라스를 넘어서면 힌두교의 수호신들을 조각한 입상들이 긴 행렬을 갖춘 채 도열해 있고, 그 사이로 난 길이 아스라이 언덕을 향해 이어지고 있어 무척 아름다웠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바닥에 넘어졌거나, 코가 떨어져나갔거나, 얼굴 한 부분이 깎여나간 신들 조각상들이 고대 크메르의 시간과 우리들의 시간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 행렬 좌우로 또 하나씩의 인공호수가 있어, 나는 크메르의 시간을 벗겨내듯 길을 벗어났다. 그곳에서 물소의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 옛날 크메르의 건축가들이 만들어놓은 호수에는 물이 줄었지만 수많은 갈대와 물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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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 통엔 제법 굵은 물고기가 네댓 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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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물소 한 마리가 있었고, 그 물소를 몰고 나왔을 서너 명의 꼬마들이 있었다. 그들은 물소를 멀찍이 풀어놓고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다가가서 한 여자아이가 들고 선 대나무로 만든 통을 들여다보니 제법 굵은 물고기 네댓 마리가 들었다. 아이들은 낯선 이방인의 등장이 재미있어 까르르 웃다가도, 첨벙첨벙 물 가운데로 달아난다.

다시 크메르의 시간으로 복귀하자, 이제 두 번째 레벨이다. 조각상들의 행렬 끝에 두 채의 사원이 있다. 별채라는 설명이 붙었다. 문화재 재건 작업 중이라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지만, 앙코르와트와 동일한 건축 양식이 분명하다. 세월에 의해 많은 부분이 지워졌어도 벽면마다 희미하게 힌두교 신들의 이야기와 무희 '압살라'의 춤 동작이 남아있다.

사원을 지나자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 옆에 크고 오래된 참파 나무가 서있다. 마지막 세 번째 레벨로 오르는 계단이다. 그래서인지, 흐드러지게 핀 그 모습이 여행자에게 성과 속의 경계를 알려주는 것도 같고, 지상에서의 근심을 내려놓고 하늘로 오르는 하얀 불꽃들의 결집 같기도 하다. 여행학교 아이들은 만만치 않은 계단을 오르며 덥다고, 꼭 끝까지 올라야 하냐고, 투덜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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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푸 사원의 전경과 참파삭 일대의 마을과 논밭이 한눈에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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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크메르사원에서 소원을 비는 꽃 장식이 다정하기만 하다
▲ 사이좋은 커플(?) 옛 크메르사원에서 소원을 비는 꽃 장식이 다정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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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모두 끝까지 오를 거란 걸 잘 알기에 아내와 나는 '뚝' 떨어진 참파 꽃 한 송이를 주워들고 앞서 계단을 오른다. 그 긴 계단 끝에 테라스가 있고, 마침내 본 사원이 나타났다. 우선 아이들은 테라스에 올라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우리들이 올라온 계단길이 다 보이고, 왓푸 사원의 전경과 참파삭 일대의 마을과 논밭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경치도 아름다웠고, 땀을 흠뻑 흘리고 올라와 돌 위에 드러누워 헉헉거리다가도 그 경치 앞에 서자 언제 힘들었냐는 듯 좋아하는 아이들도 아름다웠다. 나는 손에 들었던 참파 꽃 한 송이를 사원 벽에 조각된 무희 압살라의 머리 위 틈새에 끼워 넣었다. 이 마을에 참파 꽃이 많은 이유가 그들 무희들과 어울리기 위한 것인 양, 그 역시 아름다웠다.

사원 안팎을 모두 돌아보고 내려왔다. 그런데 아이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질주본능' 승현이다. 모이기로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유적지 입구에 자전거도 없는 걸로 보아 어딘가에서 또 '질주본능'을 즐기고 있는 모양인데, 이건 규칙 위반이다. 잠시 후에 나타난 그는 1달러의 벌금을 내야했다.

싸우느라 바빴다는 상훈&하영.. 질주본는에 빠져버린 승현..
▲ 15명 멤버 중 셋이 없다... 싸우느라 바빴다는 상훈&하영.. 질주본는에 빠져버린 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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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크메르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의 경계.. 햇살처럼 눈부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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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고, 혼자 움직이면서도 아무에게도 얘기해두지 않은 것의 대가다. 이 녀석은 자전거만 타면 무작정 내달린다. 힘도 좋고 기술도 좋아서 금방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누군가 별명으로 '질주본능'이라 지어줬겠지만, 난 이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지난 번 루앙프라방에서의 자전거 사고 이후에는 다 함께 자전거를 타는 것이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승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소리를 늘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런데 사고는 돌아오는 길에서 났다. 그것도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이모라고 부르는 나의 '아내'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아마 태양이 점점 정오에 가까워지면서 우리들이 점점 지쳐갈 때였을 것이다.

그 장면을 바로 뒤에서 목격한 도솔이의 말에 의하면 마주오던 오토바이가 '어어' 하는 사이에 다가와서 부딪혔다고 했다. 자전거는 휘어지고 엉망이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아내는 멀쩡했다. 많이 놀랐고, 고마웠다. 아내는 자전거를 수리하는 곳에 가서 휘어진 부분만 대충 고쳐서 왔다고 했다. 이상하게 자전거만 타면 사고가 난다. 이러다 집단 자전거 징크스가 생길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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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위에서 열다섯 나운이는 무엇을 기원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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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윤미와 수경이에 이어 나와 아내와 하영이도 마사지를 받았다. 마사지를 받고 차를 한 잔씩을 내 주는데 몸과 마음이 편안해 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무수히 많은 별들을 보며 기원했다. 우리 모두 건강할 수 있기를. 

<아이들의 일기>


처음에 대열이 잘 지켜지다가 흐트러지기 시작하자 나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면 폭주한다며 지어준 별명이 질주본능이라는데 솔직히 내 생각엔 내가 자전거를 잘 타고 빠른 게 아니고 나머지가 못 타고 느린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자전거 타는 데 집중 안 하고 잡담하고 노니까 그런 거 같다. 아까 줄이 흐트러진 것도 장난친다고 그런 것이다.  - 송승현(열다섯 살)

유적지를 다 보고나서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향미 이모께서 오토바이에 부딪히셨다. 정말 깜짝 놀랐다. 보니까 향미 이모께서는 살짝만 다치셨다.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자전거는 휘어져 있었다. 그걸 숙소까지 끌고 오느라 정말 힘들었다.  -박정호(열여섯 살)

참파삭은 어제도 느꼈지만 조용한 곳이라서 사람들도 별로 없고 차도 많이 없고 심지어는 날씨도 너무 좋고 하늘도 너무너무 예뻤다. 그래서 자전거 타기가 수월하였다. 자전거를 타서 한 참을 가다가 목적지인 사원에 도착하여서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곳을 보려면 엄청나게 가파르고 긴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나는 처음에는 계단을 보고 '헉~!' 했는데 위로 올라가면 시원한 음료수를 판다고 하 길래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갔다. 올라가서 물 사먹고 쉬고 있는데 삼촌이 미션을 주셨다. 그 미션은 사원 벽에 그려져 있는 '춤추는 여신'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경하면서 찾고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내 눈에는 춤추는 여신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옆에 있는 정호 오빠한테 춤을 추라고 한 후 사진 찍어서 보여주자고 유진이 언니한테 이야기하니까 좋은 생각이라면서 춤추는 정호 오빠를 찍어서 삼촌께 우리는 '춤추는 남신'을 찾았다고 하니까 삼촌이 웃으시면서 진짜로 춤추는 여신 벽화를 보여주셨는데 정말 진이 다 빠졌다. 왜냐하면 바로 들어가는 문 위쪽에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양나운(열다섯 살)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여행학교, #배낭여행, #참파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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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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