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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불량음료 마신 17살 '부자소녀'
 국경을 넘어 불량음료 마신 17살 '부자소녀'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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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티안에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국경놀이를 했다. 국경놀이란 비자만료일을 앞두고 '한국-라오스 양국의 무비자협정에 따른 15일 간의 체류허가'를 한 번 더 얻기 위해 이웃나라 태국 땅에 살짝 넘어가서 점심 먹고 돌아오는 걸 말한다. 그 과정에서 여권에는 출입국도장과 함께 새 비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아침부터 아이들은 신이 났다. 강을 사이에 둔 두 나라를 왔다 갔다 하는 일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여권에 도장이 늘어나는 것이 좋은 모양이었다. 대학생인 하영이도 중학교 꼬마들만큼 들떠 있더니, 내게 와서는 상훈이의 옷차림을 가리키면서 고자질인지 '자랑질'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으로 말한다.

"삼촌, 상훈이 좀 보세요."

저만치에서 아이들이랑 놀고 있는 상훈이는 맨발에 조리를 신고 반바지를 입었다. 그것도 체육복이다. 하영이의 말뜻은 아무리 국경놀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가다녀오는 날인데 그의 복장이 무슨 저녁나절에 잠시 옆 동네 마실 나가는 꼴이라는 것이다.

비자연장을 위한 국경넘기
 비자연장을 위한 국경넘기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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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그 사이 출국신고서를 쓰느라고 바쁘다. 그래도 두 번째로 넘는 국경이라고 서로서로 보면서 눈치껏 잘들 작성하고 있다. 출국신고서를 막 다 쓴 막내 수경에게 짐짓 질문을 던진다.

"수경아, 우리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비자연장 하는 거잖아요. 에~이, 삼촌도. 그것도 모를까봐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단순히 비자연장, 그거 아니거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국경놀이!"

'놀이'라는 말에 수경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면서 여권에 도장을 잔뜩 받아도 되느냐고 되레 묻는다. 그러더니 다른 친구들에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국경놀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드디어 대한민국에서 온 15명의 여행자들은 라오스 국경관리사무소에 출국 신고를 마치고 두 나라를 잇고 있는 '우정의 다리'를 건너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라오스 경찰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것은 금지되어 있단다. 지난여름에 나는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직접 이 다리를 건넜었다. 경찰에게 내가 그 당사자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소용없다.

라오스와 태국... 남한과 북한...
 라오스와 태국... 남한과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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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 넘어가는 국경놀이도 해봤으면
 북한으로 넘어가는 국경놀이도 해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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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급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사무실로 안내된 나는 나 자신을 교사로 소개하고 우리 학생들이 국경을 걸어서 넘는 경험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면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의 철책선이 놓여있는 대한민국 아이들에게 자신의 두 발로 또박또박 걸어서 넘는 국경선이 어떤 의미가 될지 생각해달라고 간곡히 얘기했다.

그 사무실에서 자신이 최상급자라고 소개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넣었다. 그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라오 말로 한참을 통화한 후에야 말을 이었다.

"미안합니다. 당신 학생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해진 규칙에 다른 선례를 남기는 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아쉽지만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셔틀버스를 탔다. 섭섭한 내 마음과는 달리 아이들은 이층으로 되어 있는 셔틀버스를 타는 것도 좋은 모양이다. 그때 버스는 우정의 다리 중간지점에서 별안간 중앙선을 넘어 반대쪽 차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 사정을 모르는 여행자라면 매우 놀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사실 셔틀버스의 중앙선 침범은 매우 합법적인 것이다.

라오스에서 태국으로 넘어가는 셔틀버스... 중앙선을 훌쩍 넘거간다
 라오스에서 태국으로 넘어가는 셔틀버스... 중앙선을 훌쩍 넘거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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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와 달리 태국의 자동차 운전석은 일본이나 영국처럼 오른쪽 좌석에 있고, 진행 차선도 중앙선의 왼쪽 차선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즐거워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 앞에서 우리들은 자극을 받기 마련이다.
   
다리를 건너자 곧바로 태국 땅이었다. 이번에는 입국을 위한 신고서를 작정한다. 그 후에 아이들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24시 편의점 '세븐 일레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오스 여행 내내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편의점이 태국 국경을 넘자마자 바로 나타났으니, 그 효과는 극적인 측면이 있었다. 편의점 실내에는 에어컨 바람이 '빵빵'하게 나오고, 상품을 올려둔 선반에는 먼지 하나 없으며, 냉장고마다 아이스크림이랑 음료수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열광했다. 이런 풍경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는 어느 도시에서나 지극히 일상적이라고 해야 할 이런 풍경들로 인해 아이들은 열광하고 있었고, 그것은 '오늘로서 라오스 여행 16일'이 우리들에게 주는 선물인 셈이다. 이렇듯 일상적인 것을 특별하게, 흔한 것을 소중하게, 당연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 또한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다시 라오스로 돌아오는 길, 수경이가 내게 다가와서는 넌지시 물어본다.

"삼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어떤… 사람이라니?"
"옆 나라에 가서 점심 먹고 돌아오는 부자들!!"

국경 넘어 점심 먹으러 간 14살 '부자소녀'
 국경 넘어 점심 먹으러 간 14살 '부자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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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썬크림 바르는 14살 '부자소녀 2'
 국경을 넘어 썬크림 바르는 14살 '부자소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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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놀이가 아이들에게 상상력의 한 쪽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그날 아이들의 일기장이다.

여권이 더러워져서 기분이 좋다. 2면이 꽉 찼다. 여권에 도장을 받는 게 이렇게 보람찬 일이라니. 그냥 버스 타고 다리 왔다 갔다 한 것뿐인데. 초등학교 때 포도알 스티커 받는 느낌이랑 비슷하다. - 김하영(스무 살) 

* 오늘의 교훈: 국경놀이도 적당히ㅋ 
라오스로 돌아오는 길에 태국에서 쌀국수를 먹었는데 낍(라오스통화)을 사용하다가 바트(태국통화)를 다시 사용하니 뭔가 어설펐다. 다시 라오스로 돌아오니 '국경놀이'가 참 재밌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 하면 여권이 도장으로 꽉 채워지니까 이상해서 잡혀갈 지도 모를 것이다.ㅠㅠ - 신수경(열네 살)

오늘, 입국 출국 심사만 4번을 했다. 나 이런 남자다. 국경을 넘나드는.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육로로 다른 나라를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 라오스와 태국은 메콩 강을 사이에 두고선 반은 라오스, 반은 태국이다. 두 나라, 교통법규도 달라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도중에 차선도 바꿔서 타야한다. 정말 짜릿하지 않은가! Bridge 위에서도 가다가 갑자기 꽂혀 있는 국기가 바뀐다. - 고상훈(스무 살)

국경을 넘어본다는 것이 정말정말 신기했다. 얼떨결에 부자만 할 수 있다는 점심 먹으러 다른 나라에 가기도 해보았다. 그리고 여권에 도장도 정말 많이 받게 되었다. - 양나운(열다섯 살)

소형트럭을 개조한 '썽테우'를 타고... 대사관에 도착
 소형트럭을 개조한 '썽테우'를 타고... 대사관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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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뚝을 타고 비엔티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라오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대사관 놀이'인 셈이다. 그런데 미리 약속을 해둔 '영사'가 자리에 없다. 행정관 한 분이 나오셔서 사전에 들은 바가 없어 '영사'와 전화 확인을 한 후에야 우리를 회의실로 안내한다. 아이들은 처음 들어와 보는 대사관이라 신기하기만 하다.

행정관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라오 여성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자신의 가정 이야기도 잠시 해준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질문을 하나씩 듣고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대답을 해준다. 질문은 라오스의 역사에 대한 것에서부터 대사관의 역할과 맛있는 라오스 음식에 대한 것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 재밌는 것은 애주가 아빠를 둔 열여섯 살 도솔이를 위한 윤미의 질문이다.

"라오 비어를 한국에 가져갈 수 있어요?"

행정관은 답은 '두 병까지 가능'이다. 그리고 '라오스에서 우리들이 꼭 보고 갔으면 하는 것이 있어요?'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사람들'이라는 답을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곳 사람들의 마음을 보고 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재미있게 질문과 답을 이어가고 있는데, '영사'가 들어왔다. 30분쯤 늦었다. 6개월 전에 아내와 둘이 여행을 왔을 때 직접 대사관을 방문해 '영사'를 만나 여행학교에 대해 소개하고 대사관 견학에 대해 의논을 했었다. 그리고도 두 번씩이나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일정을 확인했었다. 그런데 1시간짜리 견학에 30분이나 늦어놓고도 아무런 사과도 설명도 없다. 안내책자까지야 바랄 것도 아니지만 프린트 한 장 준비한 것이 없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라오스에는 특별히 볼 것이 없단다. 치안도 조금씩 나빠지고 있고, 자신은 언제까지 이곳에서 근무할지 모르겠단다. 손님인데, 6개월 전부터 약속된 손님인데, 그것도 자기 나라 대사관을 견학하기 위해 온 학생들인데…, 속상했다. 치사해서 생각지 않으려 했지만, 그 더운 날 물 한 잔 내놓지 않는 것까지 섭섭해졌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치외 법권' 지대인 대사관 회의실까지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읍하라는 것인지….

라오스 한국대사관 앞에서... 못 말리는 'V들'
 라오스 한국대사관 앞에서... 못 말리는 'V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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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중에는 대사관이 하는 일이나 해외 한인들의 생활에 대해 궁금해 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 같아 마련한 견학이었다. 이런 계기로 인해 자신의 꿈과 희망의 폭을 가늠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영사'에게 잘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우리의 이야기가 그저 '대사관에나 한번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애원' 정도로만 보였나 보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해외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을 3~4번 정도 가봤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대한민국 국민이어서 좋다'는 따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역시 오늘도 대사관의 문턱은 높고, 날은 덥고, 목은 타른데, 마음은 무거운 돌 하나를 올려놓은 것처럼 답답한 날이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아이들이다. 기념사진을 찍고 방명록에 자신의 사연과 이름을 남기며 즐거워한다.

처음에 가서 놀란 건 이곳 대사관에는 라오스 경찰, 군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어. 대사관님 말에 따르면 이곳은 라오스 정부에서 허가를 한 한국부지라고 하셨어. 방명록을 남기는데 '○○부장관' '1급 안보경찰' 이런 사람들만 쓴 방명록에 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경험을 해서 무척 좋았어. - 신희경(열여덟 살)

마지막으로 병원에 들렀다. 국경놀이와 대사관놀이에 이은 병원놀이를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루앙프라방에서 '자전거 추락사고'로 '안젤리나 졸리'가 된 윤미가 그 '두툼한 입술'을 장식하고 있는 실밥을 뽑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타국의 병원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모두가 함께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내가 윤미와 함께 진료실에 다녀온 사이에, 아이들은 병원 로비에서 방비엥에서 사귀었던 라오 친구 '콘'을 만났다. 언니가 이 병원에서 아기를 낳았단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아기를 볼 거라고 산모의 병실로 우르르 몰려간다. 다시 못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놀랍고 신기한 모양이었다.

'병원놀이'를 위해 걸어가는 아이들
 '병원놀이'를 위해 걸어가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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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언니 입술 실밥 풀었는데 병원에서 콘을 만났다! 성호가 "왠지 비엔티안에서 방비엥 친구들을 만날 거 같아"라고 했는데 진짜 만나다니! (성호가 방비엥 애들을 무지 보고 싶어 했다.) 콘네 언니가 오늘 애기를 낳아서 병원에 왔다고 했다. 콘네 언니의 건강을 기원했다. - 서유진(열일곱 살)

아이들은 지금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또 헤어지는 그 시간들의 소중함에 대해 배우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여행학교, #국경 넘기, #비엔티안, #한국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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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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