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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Ellet, VA 도착 5마일 전 지점(CR 785와 CR 723의 교차점) - Radford, VA
18 mile ≒ 28.9 km

상을 주자. 일주일에 한 번씩 말이다. 일주일간 곰곰이 생각한 후 내린 결심이다. 미네랄(Mineral)에서 소파 취침. 샬로츠빌(Charlottesville)에서 이틀간 브레비(Brevy) 아저씨네 집. 블루 리지 파크웨이(blue ridge parkway), 뷰캐년(buchanan)에서의 야영.

거센 빗속에서 캠핑했던 어제. 땀내 나는 자전거 복에 사로잡힌 끈적끈적한 몸이 안쓰럽다. 새로운 지도를 꺼내 드는 역사적인 순간에 걸맞은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다. 모텔에서 실컷 샤워하고 침대에서 뒹굴기. 휴식시간을 길게 가지려고 라이딩 거리도 최대한 줄였다. 18마일 떨어진 래드포드(Radford).

어제 그토록 가고프던 크리스챤스버그(Christiansburg)까지 10마일. 제법 완급이 심한 길이다. 어찌해볼 도리 없는 경사길에 가로막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간다. 자전거 여행에서 가장 힘든 순간을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자전거 타는 게 힘드냐고? 아니. 힘들지 않아. 끌고 가는 게 힘들지."

라이딩 초반부의 넘치는 체력에도 1시간 40분 정도 걸려 중심가에 도착했다. 전날의 판단은 아주 적절했다. 그대로 라이딩을 계속했다면 비에 흠뻑 젖고도 남았을 타이밍이다.

도로 한쪽에 자전거를 세우고 목을 축인다. 미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꿀렁꿀렁 넘어간다. 역시 물은 차가워야 맛이 난다. 그리 상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다시 페달을 밟는다. 앞으로 8마일.

"인간은 욕심으로 살지... 죽을 때는 어때? 가진 게 없잖아"

길을 가다 보면 가끔 오토바이 여행자들을 만나게 된다. 떼를 지어 몰려가는 라이더들의 행렬은 왠만한 차량은 오금이 저릴 정도의 위세를 떨친다.
▲ 이지 라이더(Easy Rider) 길을 가다 보면 가끔 오토바이 여행자들을 만나게 된다. 떼를 지어 몰려가는 라이더들의 행렬은 왠만한 차량은 오금이 저릴 정도의 위세를 떨친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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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드포드(Radford)는 1만5000여 명이 사는 아담한 도시다. 이따금 자전거 라이더들이 손을 흔든다. 미국을 횡단하는 장거리 여행자들은 아니다. 단출한 복장에 무게를 최대한 줄인 로드 바이크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운동 마니아들이다.

인근 자전거 샵을 통해 꽤 괜찮은 숙소를 알아냈다. 미국 영화에 흔히 출현하는 단층식 모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모스(조쉬 브롤린 분)가 묵었던 모텔이 연상됐다.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진한 인도식 발음이 묻어난다. 인도 아메다바드(Ahmedabad) 출생이다.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최대의 도시인 아메다바드는 사바르마티 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M. K. 간디는 1915년부터 1920년 동안 이곳에 독립운동본부를 두었다. 간디가 독립운동 지사를 양성하기 위해 구자라트 대학을 창설했을 정도로 인도 민족운동 중심지의 하나였다. 배낭여행 당시 뭄바이(Mumbai)에서 우다이푸르(Udaipur)로 가면서 들렀던 곳이라 귀에 친숙했다.

인도 출신 부부가 운영하는 모텔. 중국인 이민자들이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면 인도인들은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 모텔에서의 휴식 인도 출신 부부가 운영하는 모텔. 중국인 이민자들이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면 인도인들은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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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여행했다는 말을 꺼낸 탓일까? 빨래를 해야겠다는 나를 근처 세탁소까지 태워다 준다. 세탁이 끝나니 다시 데리러 오는 두터운 친절함까지. 쿠린내로 가득하던 옷이 간만에 향기로 넘쳐난다.

"아기들이 태어나면 다들 주먹을 쥐잖아. 뭐든지 손에 움켜줘 보겠다는 거지. 살아가면서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욕심 내면서 산단 말이야. 죽을 때는 주먹이 어때? 힘없이 펴고 하늘로 떠나. 죽으면서 우리가 가져가는 게 뭐야. 아무것도 없어."

철학자의 나라, 인도 출신답게 가볍게 던지는 말에도 뼈가 있다. 세탁소에 들른 김에 마트에서 양손 가득 음식을 산 나를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다. 육욕을 버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잔뜩 기대하며 맛을 본 음식들은 배가 불러오면서 처음의 향미를 잃게 되고 즉석조리 음식들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욕심의 끝은 허망하다.

5월 31일 목

Radford, VA - Rural Retreat, VA
58 mile ≒  93.3 km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국토를 횡단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당장은 의욕만 넘치는 이상에 불과했지만 1976년 6월 이 프로젝트는 현실이 됐다. 지도와 가이드북이 제작됐다. 남은 건 페달을 밟을 자전거 라이더들. 일명 바이크 센테니얼(bike centennial)이라는 프로젝트는 입소문과 선전 덕에 40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게 된다.

대부분 자전거 여행 경험이 전무한 20대 젊은이들이 모였다. 바이크 센테니얼에서 훈련받은 조교와 함께 10, 12명씩 짝을 지어 출발했다. 헬멧 쓴 사람은 찾아보기도 힘들었고, 대부분 헐값에 산 구닥다리 자전거를 끌고 나타났다.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인생에 큰 경험을 얻어 보려 도전한 젊은 청춘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 길 위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와 자기 자신에 대해 심오한 깨달음도 얻었다.

1976년 그해 여름.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에 참여했던 대다수 참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전해진다.

"다른 사람은 평생 모를 미국을 90일 만에 알게 됐어."

미국 젊은이들이 남긴 발자국 따라 달리는 길

당시 미국을 횡단하던 자전거 여행자들.
▲ 1976년 바이크 센테니얼(bikecentennial) 당시 미국을 횡단하던 자전거 여행자들.
ⓒ Adventurecycl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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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36년이 지났다. 바이크 센테니얼(bikecentennial)로 시작한 어드벤처 사이클링 어소시에이션(adventure cycling association)은 몬태나 주 미술라(Missoula)에 자리를 잡았고 코스 또한 늘어났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내려오는 2638마일의 아틀란틱 코스트(Atlantic coast), 태평양 연안을 주행하는 1855마일의 퍼시픽 코스트(Pacific coast), 1976년에 시작된 클래식 4242마일 트랜스아메리카(Transamerica), 미국 북부를 횡단하는 4262마일의 노던 티어(Northern tier), 남부를 횡단하는 3082마일의 사우슨 타이어(Southern tier) 등을 포함해 21개의 코스를 현재 수많은 라이더들이 주행하고 있다.

트레일이 지나는 경로에는 1976년을 기념하여 '76' 숫자가 적힌 자전거 전용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미술라에 있는 ACA 본부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라이더들이 방명록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미국 젊은이들의 발자국이 진하게 남아있는 그 길을 나는 오늘도 달린다.

Rural Retreat : 식료품을 사러 들른 가게에서 아버지와 두 딸이 쇼핑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특이한 복장을 보고 내게 관심을 보였는데, 급기야 사인까지 요청하였다.
▲ 미녀들과 함께 Rural Retreat : 식료품을 사러 들른 가게에서 아버지와 두 딸이 쇼핑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특이한 복장을 보고 내게 관심을 보였는데, 급기야 사인까지 요청하였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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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금

Rural retreat, VA - Troutdale, VA
22 mile ≒ 35.4 km

서풍이 강력하다. 잔뜩 흐린 하늘에서 가랑비가 쉴 새 없이 내린다. 트러트데일(Troutdale)에서 코나록(Konnarock) 사이의 최고점에 이르기 전까지 오르막길이 반복된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괜한 욕심으로 무리했다가는 며칠 앓아 누울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남들보다 작은 증상에도 예민한 편인데 그 덕에 크게 상하기 전에 몸을 재빨리 사리는 장점이 있다.

지도를 보니 인구 494명의 마을 '트러트데일'(Troutdale)에 호스텔(hostel)과 별 마크가 그려져 있다. 별 마크는 레스토랑·식료품점·주유소·우체국·숙소 등 기본적인 서비스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표시. 쉬어가고픈 여행자 입장으로선 반가운 정보다.

목표 지점까지는 8마일. 몸 풀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 힘겹다. 의식은 몽롱하고 육체는 해롱거린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하던가. 없는 힘까지 내어 고함을 질러본다. 허장성세로라도 몸이 깨어나기를 기대해보지만 도무지 힘이 나지 않는다.

고개를 넘자 스미스 카운티(smyth county)와 이별하며 그레이손 카운티(grayson county)로 접어든다. 동시에 신나는 내리막길이다. 아래에서 신천지가 나를 기다린다.

뭐야? 없다. 영업 중이라던 레스토랑은 'closed' 안내판만 붙은 채 숨을 죽이고 있다. 오가는 이 하나 없는 황량한 마을. 쉴 곳이 없다. 호스텔은 과연 존재할 것인가.

실망으로 더욱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본다. 나무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띈다. 
   
'Troutdale baptist church hostel, hikers & bikers welcome. straight up hill.'(트러트데일 침례교회 호스텔. 도보 여행자와 자전거 여행자 환영. 바로 언덕 위)

언덕을 오르니 나무 오두막이 여러 채 보인다. 열려 있는 문 안으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사람이다. 말로만 듣던 애팔래치안 트레일(appalachian trail) 하이커 2명이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메이플 시럽 만드는 이공계 학사, 재미있네

적막하고 괴괴했던 마을에서 호스텔을 찾고 어찌나 기뻤던지. 애팔래치안 트레일을 걷는 하이커와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달리는 자전거 여행자들의 진정한 보금자리였다.
▲ 트러트데일(Troutdale)의 호스텔 적막하고 괴괴했던 마을에서 호스텔을 찾고 어찌나 기뻤던지. 애팔래치안 트레일을 걷는 하이커와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달리는 자전거 여행자들의 진정한 보금자리였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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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하이킹 코스인 '애팔래치안 트레일'. 이곳은 미 동부 최북단에 위치한 메인주의 카타딘 마운틴에서 조지아주 스프링거 마운틴을 잇는 총 2175마일 구간이다. 산길이다 보니 하루에 15마일 이동이 보통인데 지형과 체력이 잘 받쳐주면 20마일을 갈 때도 있다. 1시간에 2마일 이동하는 셈. 총 4~5개월이 걸리는 강행군이다.

원래 애팔래치(appalachee)는 플로리다 북서쪽 평야지대에 살던 인디언 부족 이름이었다. 16세기 스페인 탐험가들이 산맥 남쪽 끄트머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던 것이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 지금의 애팔래치아 산맥 전체를 가리키게 됐다.

25살의 케빈 맥도웰(Kevin Mcdowell)과 26살의 러셀 올제초우스키(russel orzechowski). 오하이오주 콜럼버스가 고향인 케빈은 공부에 뜻이 없다. 책상 머리에 앉아있기 보다 바깥을 돌아다니는 게 훨씬 편하다. 직업은 페디캡(pedicab) 드라이버. 인도에서는 '릭샤'라고 하는데 인력거 앞에 자전거가 달렸다고 연상하면 된다. 4명까지 태울 수 있는 자전거 택시를 몰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다 자연을 한껏 느끼고 싶어 애팔래치아 산맥에 발을 들였다.

러셀은 뉴햄프셔주 뉴 포트(new port) 출생. 말이 항구지 실제는 내륙 깊숙이 위치한 마을이다.

"최근에 BS를 땄어."

BS는 Bachelor of Science(이공계 학사학위)의 약자다. 그러면 지금 하는 일은?

"농장에서 메이플 시럽을 만들지."

앗, 반전이다. 뭔가 재미있는 냄새가 폴폴 나는 친구다. 이 녀석이 4, 5살 무렵 할아버지 집에 들렀을 때 일이란다. 주방에 들어가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호기심에 펼쳐 든 그 책은 애팔래치안 트레일을 다루고 있었다. 어린 소년이 가슴 한 켠에 품었던 꿈이 이제야 현실로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혼자 여행하다 일주일 전부터 함께 길을 다닌다. 짧은 기간이지만 내 눈에는 10년 이상 된 친구처럼 보였다. 여행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마력을 지녔다.

왼쪽부터 본인, 케빈 맥도웰(Kevin Mcdowell), 러셀 올제초우스키(russel orzechowski). 케빈은 대놓고 웃겼고 러셀은 진지한 가운데 한번씩 빵빵 터졌다.
▲ 하이커(hiker)와 바이커(biker) 왼쪽부터 본인, 케빈 맥도웰(Kevin Mcdowell), 러셀 올제초우스키(russel orzechowski). 케빈은 대놓고 웃겼고 러셀은 진지한 가운데 한번씩 빵빵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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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지막한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잔뜩 늘어놓는데 잡화상이 따로 없다. 티백·스낵·통조림 등 식료품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에어매트·침낭·옷가지·코펠·버너·책·구급약 등도 눈에 띈다.

무게는 더 나가지만 몽땅 자전거에 싣는 라이더와 달리 하이커는 오로지 맨몸으로 짐을 날라야 한다. 길에서 마주친 일반인들이 내 짐을 보고 놀랬듯 나도 이들의 짐을 보고 놀란다. 저렇게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거친 산길을 5~6개월 동안 갈 수 있을지.

1년에 애팔래치안 트레일을 찾는 사람은 약 3백만 명 정도이며, 전체 구간에 도전하는 하이커는 2000여 명. 그 가운데 25%인 500명이 종주에 성공한다. 현재까지 이 코스를 완주한 사람은 1930년 이후 1만 명 정도며, 가장 빨랐던 기록은 지난 2005년 앤드류 톰슨의 47일이다. 포기하는 사람 대다수가 이 근방인 500마일 지점까지 와서 포기한다. 아마 험준한 산세와 기후가 본격적으로 인간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이 고비를 어떻게 넘길까. 러셀은 1주일 전 벌레에 물린 발목이 심하게 부어올라 요양이 필요하다. 하루 이틀이면 떠나는 호스텔이지만 그는 장기 투숙 중이다. 인근 병원에서 항생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면서 복귀하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케빈은 내일이면 그의 곁을 떠나 트레일을 다시 밟을 예정이다.

차 소리가 들리더니 호스텔을 운영하는 침례교회(baptist church) 담임 목사가 들어온다. 켄 리긴스(Ken riggins) 목사. 우리처럼 돈 없는 여행자들을 위해 무료로 호스텔을 제공하고 있다. 애팔래치안 산맥이 지나가는 곳은 지형상 전화가 불통인데, 본인 집에서 유선전화로 통화를 시켜주겠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했다.

부인인 메리 리긴스(Mary riggins) 아주머니가 정답게 반겨준다. 전화만으로 황송한데 굶주린 우리를 위한 근사한 저녁식사까지 마련해줬다. 군침 도는 음식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미국 남부스타일이라는 수제 쿠키와 케밥으로 속이 든든해진다.

영어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Serendipity. 무엇이든 우연히 잘 찾아내는 능력이나 횡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 횡재했다.


태그:#미국,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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