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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으로부터 조국이 빛을 되찾았으니 이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 광복(光復)이었던가! 올해로 조국 광복 67주년을 맞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쪽 사람들은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부르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나라[國]'와 '국호(國號)'를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나온 발상이기도 하지만, 3․1운동 직후부터 광복 때까지 상하이 등지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거나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리라.우리나라의 국호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지 2년째가 되던 때 명나라로부터 '조선(朝鮮)'이라는 국호 사용을 승인받게 되었다.

(전략) 지금부터는 고려(高麗)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조선(朝鮮)의 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2년 2월 15일

조선은 1897년 10월 11일까지 우리나라의 국호로 사용되다가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는 날인 그 해 10월 12일 '대한(大韓)'으로 바뀐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상이 이르기를,
"경 등과 의논하여 결정하려는 것이 있다.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지금에 모든 예(禮)가 다 새로워졌으니 원구단(圜丘壇)에 첫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마땅히 국호를 정하여 써야 한다.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옛날에 봉(封)해진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는데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라는 오래되었으나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 응당 전칙(典則)에 부합해야 합니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조선왕조실록>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 1년) 10월 11일(양력)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배참(陪參)하였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의정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12장문의 곤면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閔氏)를 황후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 1년) 10월 12일(양력)

고종은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별전(別奠)을 행하고 이어 태극전(太極殿)에 나아가 백관들의 진하를 받았으며,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반조문에 이르기를,
"(전략)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양력 10월 12일)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 1년) 10월 13일(양력)

그 후 국호 '대한'에 '제국'이라는 말이 덧붙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이란 국호 아닌 국호가 있었는데, 이는 '일본제국',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에 대응하는 형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일본제국'이란 명칭에서 '대'는 접두사이고, '제국'은 접미사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대'는 접두사가 아니고, '대한'이란 고유명사의 일부분이고, '제국'은 접미사이다.

흔히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을 읽을 때 '대'를 접두사로 생각하고 '대:한국인 안중근'으로 읽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대한 나라 사람 안중근'이란 의미로 '대한:국인 안중근'으로 읽어야 바른 것이다.

안중근 의병장은 자신을 일컬어 당시 우리나라 국호였던 '대한 나라 사람'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구절에서 우리나라 국호를 '대한'으로 호칭한 것으로 보아 '애국가' 노랫말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9년 4월 12일 사이에 창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호 제정 과정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3․1운동 직후 한성(서울)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등지에 임시정부를 표방하는 단체가 생기자 상하이의 애국지사들은 그 해 4월 10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인 거주지였던 진선푸루[金神父路]에 애국지사 29명이 모였다.

신익희·김철·현순·손정도 등은 3·1운동과 관련해서 망명한 인물들이었고, 이회영·이시영 형제, 김동삼·이광·이동녕 등은 경술국치 후 만주로 망명하여 경학사와 부민단을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했던 인물들이었다. 최근우·이광수 등은 도쿄의 2·8독립선언과 관련된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었고, 신채호·조소앙·여운형·선우혁 등은 신한청년당 관련자들이었다. 그 외에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남형우, 대종교 관련 인사 조완구 등도 출석했다. 이 자리에서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설립이 결정되고 국호도 함께 논의됐다.

애국지사들은 '조선', '고려', '대한민국' 등 여러 이름들이 후보로 오른 가운데 '대한민국'에 대하여 논의했다. '대한'이란 말은 조선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여운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한'에 '민국'을 붙인 '대한민국'이 표결에 부쳐 다수결로 정식 국호로 채택됐고, 이어 임시정부 헌법을 반포했으며, 영토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판도로 정했다.

1919년 4월 13일,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세계만방에 공식 선언하였고, 그 후 조국 광복이 될 때까지 이 국호는 변함이 없었다.

광복 후 국호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 것은 1948년 제헌의회가 구성된 후였다. 1948년 7월 1일 제헌국회 제21차 회의에서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을 심의하게 되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부터 심의에 들어갔다. 표결로 국호는 상하이 임시정부 때의 이름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 헌법 전문을 살펴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제헌 헌법 전문에서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밝혀 오늘날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임을 명시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1일 정부에서 발행한 관보(官報)에서조차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니 이승만 정부는 처음에 1919년을 대한민국 국호의 원년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5․16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헌법 개헌을 하면서 헌법 전문에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로, 이른바 유신개헌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4·19의거 및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 전두환 정부의 개헌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한 제5민주공화국의 출발에 즈음하여"로 하여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했다.

1987년 6월 항쟁에 의해 개정된 현행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바로잡았으니, 올해로 대한민국이란 국호 제정 93주년이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푸른꿈고등학교장입니다



태그:#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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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말 의병을 30여 년 연구를 해 오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 의병 찾아가는 길1.2,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1~4(중명출판사) 한국의병사(상.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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