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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드리 홍보 광고지.
 아코드리 홍보 광고지.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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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돈이 모든 걸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돈이 있어야 의식주가 해결되고, 돈이 있어야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돈이 있어야 병원에도 갈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사람 행세를 할 수가 있는 이상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눈이 벌게져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아우성치고, 일부는 하늘에서 돈벼락이라도 맞았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돈, 돈, 돈, 돈.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는 우리를 돈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다. 정말 우리는 계속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까.

해답이 보이지 않는 사회. 해답은 정말 없는 것일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해답도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보일 수 있다. 돈이 없어도 생존이 가능하고 사람 행세가 가능한 사회를 건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돈의 노예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꿈이라고? 그렇지 않다.

돈이 아닌 서비스를 주고받는다

2002년 퀘벡에서 '아코드리(L'Accorderie)'라는, 일종의 상부상조 협회가 처음 생겨났다. 이 협회의 목적은 지역 주민의 가난과 소외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퀘벡의 셍-호크라는 마을에 선박 밧줄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유대와 연결을 의미하는 밧줄인 'La Corderie'를 협회의 이름으로 붙였다가 곧 'L'Accorderie'로 바꿨다. 서로 상부상조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간단하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끼리 자기가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 수리가 필요할 경우 컴퓨터 상에게 돈을 내고 수리를 부탁하는 대신 컴퓨터를 수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 받는다. 대신 그 대가로 나도 다른 사람에게 같은 시간 동안 내가 베풀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서비스 홍보를 하고 있는 여인.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서비스 홍보를 하고 있는 여인.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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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비스가 돈으로 환산되고 심지어는 선물까지 돈으로 오가는 현 사회에서 이 시스템은 상당히 혁신적이다. 모든 서비스는 돈으로 계산되는 게 아니라 시간으로 계산된다. 그리고 모든 서비스는 같은 가치를 가진다. 육체노동이 정신노동보다 하등한 취급을 받는 일도 없다. 또한 내게 서비스를 제공받은 사람이 반드시 내게 서비스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같은 회원끼리 서로 자유롭게 원하는 서비스를 주고받는다.

서비스가 이뤄지면 정해진 수표 양식을 작성한다. 구매자(서비스를 받은 자)가 어떤 서비스를 누구에게 어느 시간만큼 받았는지의 내용을 기재한 다음 협회에 보내면 서비스 시간 통계가 이뤄진다.

결국 서비스와 시간이 자산이 되는 이 상부상조 시스템은 퀘벡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2006년에는 3개의 새로운 아코드리가 생겨났다. 총 2000여 명 이상의 가입자가 700개의 서비스를 제공했고 2011년에는 이 시스템이 프랑스에까지 수출됐다.

캐나다에서 시작, 최근 파리에서도 시도

지난해 말, 파리 19구청에서 열린 아코드리 홍보회. 각자 책상 하나 차려놓고 자신의 서비스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해 말, 파리 19구청에서 열린 아코드리 홍보회. 각자 책상 하나 차려놓고 자신의 서비스를 설명하고 있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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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는 지난해 9월에 파리 19구에서 처음으로 이 시스템을 도입됐다. 이후 언론의 활발한 홍보를 통해 도입된 지 1년도 안 되는 현시점에서 총 320여 명의 회원이 400여 개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4월 말 기준으로 회원들이 교환한 서비스 종류는 307개에 해당하는데 이것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479시간에 해당된다.

회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종류는 다양하다. 가장 많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장보는 것 도와주기, 서류나 문서, 우편물 작성과 수정, 행정 절차 도와주기, 약속 장소에 같이 동반해주기, 숙제 도와주기, 이력서 작성 도와주기, 인터넷, 메일 기초 강습 등이다.

아코드리 가입 회원을 성별로 구분하면 여성이 69%, 남성이 31%이고 연령별로 구별하면 56세에서 65세가 24%로 가장 많다. 66세 이상도 11%나 차지한다. 이들의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혼자 사는 독신자들이 51%로 과반수를 차지하고 한부모 가정도 9%에 해당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들은 서비스 교환에 그치지 않고 아코드리를 통해 고독, 소외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들을 위해 아코드리는 영어회화나 데생, 마술 강좌 등의 그룹 강좌를 개최하거나 2주일에 한 번씩 저녁 시간에 같이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이들이 서로 알고 지내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오븐 수리받고, 한국음식 해주고

아코드리 연수가 끝난 후 점심시간. 기자가 서비스의 일종으로 김밥을 전식으로 준비해 갔다. 같은 회원인 세네갈 친구가 아프리카 닭요리를 준비했고, 아랍 친구가 후식으로 케이크 3개를 구워왔다. 모든 재료 비용은 아코드리에서 부담했고 우리는 각자 장 본 시간과 요리한 시간과 이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 시간을 합해서 전부 6시간을 벌었다. 다시 부자가 됐다.
 아코드리 연수가 끝난 후 점심시간. 기자가 서비스의 일종으로 김밥을 전식으로 준비해 갔다. 같은 회원인 세네갈 친구가 아프리카 닭요리를 준비했고, 아랍 친구가 후식으로 케이크 3개를 구워왔다. 모든 재료 비용은 아코드리에서 부담했고 우리는 각자 장 본 시간과 요리한 시간과 이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 시간을 합해서 전부 6시간을 벌었다. 다시 부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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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들에게 가장 많이 이용되는 서비스는 집안 수리, 문화 행사 같이 참여하기, 언어 교환, 동반과 아이·노인·애완용 동물 돌봐주기, 운송, 이삿짐 도와주기 등이다.

기자도 타이머가 고장 난 오븐을 무료로 수리받았는데 인건비가 워낙 비싼 프랑스에서 이런 종류의 수리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이다. 또한 미용실에 가서 머리 자르는 것도 꽤 비싼데 머리 자르는 서비스를 그동안 두 번 받았다. 돈이 없어도 이 모든 게 가능한 것이다.

대신 기자가 제공한 서비스는 한국어 강좌, 불어-한글 번역과 통역, 한식 요리 강좌이다. 한 주부가 커플 친구 두 쌍을 초대하는데 한국식으로 대접하고 싶다고 해서 잡채와 소고기버섯산적을 해주고 6시간을 번 바 있다.

사실 음식 준비하는 데에는 2시간밖에 안걸렸는데 같이 음식 먹고 저녁 시간을 보낸 시간까지 계산해서 받았다. 그 날 나는 6시간짜리 수표를 받고 엄청 갑부가 된 듯한 느낌으로 밤 12시 넘어서 집에 들어온 기억이 있다.

지난 주부터는 1주일에 한 번씩 한 주부에게 한글 강좌를 하고 있다. 이 분은 그냥 재미로 한글을 배우고 있는데 그 덕에 당분간은 1주일에 한 시간씩 벌게 생겼으니 다시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다른 지역도 동참 늘어... 세계로 확산될 수 있을까

서비스가 이루어진 후에 작성하는 수표.
 서비스가 이루어진 후에 작성하는 수표.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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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드리 누리집에 들어가면 온갖 종류의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는데 며칠 전에는 아주 특이한 서비스를 봤다. 한 남자가 자기 차로 주말에 암스테르담을 가는데 운전해 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대신 주말 현지에서의 숙박은 본인이 부담한단다. 파리에서 주말에 암스테르담이나 런던 등 이웃 나라에 여행 가는 것이 여유 있는 자에게는 흔히 있는 일인데, 이렇게 돈이 없어도 운전만 할 수 있으면 여행의 기회까지 얻을 수도 있다.

파리 19구에서 성공적으로 시작된 아코드리는 현재 파리 다른 구에도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조만간 다른 구에도 도입될 것으로 보여진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외에도 알프스 지방에 있는 중도시 샹베리에도 이미 아코드리가 성립됐다. 회원들은 지역에 관계없이 서비스를 교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파리에 있는 회원이 방을 제공하는 샹베리 회원 집에 며칠간 머무를 수 있고 반대로 샹베리 회원이 방을 제공하는 파리 회원 집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파리 구경을 할 수도 있다.

서비스를 교환한 회원들은 전반적으로 서비스의 질에 만족하고 있고 서비스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가족이나 지인에게도 추천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아코드리라는 상부상조 시스템이 발전할 수록 '돈이 최고!'라는 말이 우리의 언어에서 점점 사라질 것이다. 그러려면 아코드리의 뿌리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야 할 것이다.


태그:#아코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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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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