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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5일(금)
mineral, VA - Charlottesville, VA
51 mile ≒ 82km

미키(Mickey)는 비번이다. 늦잠이 용서되는 날, 손님을 배웅하러 일찍 집을 나선다. 아들 로건은 웃통까지 벗고 따라 나왔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봤느냐는 질문이 무색하게 미키는 온 미국 전체를 흝고 다녔다. 특히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노스 캐롤라이나 등 인접한 주들은 자잘한 길까지 손금 들여다보듯 훤하다고.

"도시는 놀러가기 좋아도 살기는 안 좋아."

미키는 "대도시에 살 무렵 질 나쁜 친구들에게 몹쓸 영향을 받았다"며 "시골이 아들 로건의 미래에도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28세인데 인생의 목표가 없다. 사실 해야 할 일도 이유도 모른단다. 그래도 "이 녀석만은 아빠와 달리 제대로 키워보겠다"며 로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도 상의 한 지점에 자전거와 나를 내려놓고 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탄 트럭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도 핸들을 잡는다.

한창 잠을 잘 시간에 나를 출발지로 배웅해줬다.
▲ 미키(mickey)와 로건(logan) 부자 한창 잠을 잘 시간에 나를 출발지로 배웅해줬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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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구 5만 명이 사는 큰 도시 샬로츠빌(Charlottesville)로 간다. 타이어 펑크가 안 나길 간절히 빌어본다. 어제는 연달아 바람이 빠지는 바람에 마음 고생이 심했다.

한적한 시골길이라도 백미러는 항상 유심히 봐야 한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다음 주 월요일인 Memorial day까지는 3일간의 황금 연휴라 교통량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라이더의 적이 자동차만은 아니다. 좌우로 늘어서 있는 가정집들을 바라보며 지나는데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한지 목줄 없이 놓아 기르는 주인의 자유방임주의. 근처 10cm까지 와서 짖어대는 통에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핸들을 바로 잡고 속도를 냈다.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따라오더니 되돌아간다. 미국 우편 집배원들이 수십 년간 사용해 효능을 입증했다는 개 스프레이가 있었다면 얼마나 안심이었을까.

저 멀리 목장이 보인다. 양들이 풀을 뜯는 한가로움 사이를 뚫고, 두 그림자가 쏜살같이 내지른다. 송아지만한 개들이 멀리서부터 냄새를 맡은 것이다. 목장 울타리가 가로 막자 으르렁 대는데, 머리털이 곤두선 채로 황급히 지나갔다.

생채기 난 마음을 부여잡고 휴식을 취하는데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남녀 2인조 라이더. 여행 시작 후 만나는 첫 번째 장거리 여행자다.

에비(Abbi)와 에반(Evan)은 1년 전 취미로 자전거를 타면서 맺어진 인연. 관심사가 같은 덕에 미국 횡단까지 하게 됐단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웨스턴 익스프레스(western express) 코스를 타고 동진하다 콜로라도(colorado)주 푸에블로에서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trans america trail)로 갈아타고 여기까지 왔단다. 이제 3일 후면 목적지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 도착한다는 말에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집이 푸에블로에서 멀지 않다는데 여행을 마친 그들 집에서 신세를 지길 살짝 기대해 본다.

"여기까지 오면서 개들은 어떻게 해결했어요?"

"개 스프레이는 필요 없다"는 에비의 말. 물통에 구멍을 뚫어서 뿌리면 그야말로 질겁을 하고 달아난단다. 목욕을 싫어하던 영화 속 개들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호루라기 소리 또한 개들이 싫어하는 파장"이라며 에비는 지니던 용품을 보여준다. 들을수록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들.

서쪽에서 출발한 이들은 앞으로 3일 후면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 도착한다.
▲ 에비(Abbi)와 에반(Evan) 커플 서쪽에서 출발한 이들은 앞으로 3일 후면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 도착한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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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만남 후 방향은 엇갈린다. 서진을 계속하면서 오후 3시경 샬로츠빌에 도착. 24km 떨어진 화이트홀(White hall)까지 밟아볼까 했지만, 다리는 피로로 천근만근이다. 이럴 때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해야 한다. 횡단 여행은 극기 훈련이 아니다. 장거리 마라톤이다. 멀리 내다보지 않으면 골골 대며 요양할지도 모른다.

3년 1개월간의 공중보건의 시절. 명상에서 자주 떠올리던 화두가 있었다. 일체의 괴로움은 집착에서 나온다. 물질에 대한 집착, 욕망에 대한 갈구.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움켜쥘수록 손은 더 아파온다. 설령 80일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어떠리. 미국 방방곳곳에 흔적을 남기면서 집착 또한 바닥에 놓아보려 한다. 정신적인 무소유.

2012년 5월 26일(토)

Charlottesville, VA

눈을 뜨니 아늑한 방 안이다. 보통 때라면 좁다란 텐트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야 할 처지다. 우연이란 흔치 않지만 이번 여행길은 뭔가 오묘하다. 더글러스 아저씨가 말했듯이 누군가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샬로츠빌은 명색이 도시라 캠핑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지나던 경찰관이 단속이 없는 공원을 알려줘서 가던 중이었다.

"맥거피(Mcguffey) 공원이 어디죠?"
"저기야. 텐트 치기에는 좀 그렇겠는데."
"그러면 뒷마당 좀 빌려주면 안 될까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 브레비 캐논(brevy cannon)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누구와 만나든지 '오호'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경청하는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줬다. 나와의 첫 만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먼저 가서 텐트를 칠래, 아니면 같이 파티에 갈래?"

여행 초반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며 배운 게 있다면 '기회는 무조건 잡고 보라'는 것. 물으나마나 답은 하나. 불이 훤한 채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는 전원 주택. 자전거 레이서인 친구의 생일 파티다. 미국 횡단에 도전하는 친구를 데려 왔다는 말에 여기저기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벽에 붙은 맥주 꼭지에서 황금 빛깔 액체가 흘러나오는, 달콤한 음식이 그득한 천국.

만국공통어인 음담패설에 웃고, 음악에 신명이 난 주인공의 막춤에 긴장이 풀린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과 자전거 경주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생일 주인공 이안 아이어스(Ian Ayers)와 자전거 샵 매니저가 한 자리에 모여 있어 자전거 정비에 귀한 정보까지 얻는다.

집으로 돌아온 브레비. 야영이 무슨 말이냐며 침실 하나를 빌려준다. 그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일어난 아침. 이틀 동안 4번이나 타이어 펑크가 났다는 얘기를 들은 브레비가 단골 자전거 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타이어에는 이상이 없네요."

튜브 밸브와 림 홀 사이에 유격이 생기면 고정력이 약해 펑크의 원인이 된다는 매니저의 설명. 타이어 공기압이 약해도 문제다.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눌리면서 림에 튜브가 끼게 되면 스네이크 바이트(snake bite)라고 해 뱀이 이빨로 깨물 듯이 인접한 두 군데가 찢긴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타이어 자체를 교환하기로 한다.

샬로츠빌 자전거 샵에서 기존의 타이어를 장거리 여행에 적합한 타이어로 교체했다.
▲ 자전거는 업그레이드 중 샬로츠빌 자전거 샵에서 기존의 타이어를 장거리 여행에 적합한 타이어로 교체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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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자기 일처럼 나서 시시콜콜한 사항을 직접 챙긴 브레비는 친구를 통해 예비 튜브를 공짜로 마련해줬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정은 친구들과 호숫가에서 수영하기, 다운타운에서 저녁 식사, 자전거 동호회 파티 등이었다. 가난한 자전거 여행자는 뜻하지 않은 호사를 누렸다. 클럽 파티에서 춤추며 가짜 소 위에서 로데오도 한다.

실용적이고 진보적인 민주당(democrat) 당원'으로 자기를 소개한 브레비는 시의원(City Council)에 도전 중이다. 이전 선거에서 아깝게 떨어졌다는 그가 넓은 마음 씀씀이를 무기로 멋지게 선출되길 바란다.

2012년 5월 27일(일)

charlottesville, VA - love, VA
48.5 mile ≒ 78 km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며칠 더 있으라는 브레비의 말이 있었지만 이제는 가야 한다. 주말과 월요일 메모리얼 데이를 합친 3일간의 휴일을 더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단잠에 빠져있을 그에게 인사도 못 하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오늘은 베수비우스로 가야 한다. 102km의 거리라 마음이 급하다. 자전거 지도는 익숙해졌다. 차량이 많은 페더럴 루트(federal route)와 스테이트 로드(state road)는 최대한 배제하고 경치 좋고 안전한 카운티 로드(County road)만 채택한 자상한 코스.

드넓은 버지니아의 평원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줬다.
▲ 블루 리지 파크웨이(blue ridge parkway)로 가는 길 드넓은 버지니아의 평원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줬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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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출발과 달리 가파른 길이 지나치게 많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게 정상 아닌가. 보이지 않는 정상을 향해 끝없이 올라간다. 한 여름 날씨에다 가파른 경사에 탈수가 심해 물은 금새 바닥을 드러냈다. 4륜 구동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던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리치몬드에서 건축업을 하는 래리 도일(Larry Doyle)씨는 근처 아프톤(Afton) 친구들에게 며칠 동안 놀러온 상황. 음료수 캔, 물에다가 단백질이 필요해질 거라며 돼지갈비까지 따로 싸준다.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아 눈물이 날 지경이다.

구원의 손길로 정신을 차리고 블루 리지 파크웨이(Blue ridge parkway)로 들어선다. 한국으로 따지면 'OO산 국립공원' 능선을 타고 가는 도로인 셈. 여기서 28마일은 산길만 타야 한다. 고도가 만만치 않다. 3000피트(914.4m)를 넘나든다. 1단 기어로 30분 이상 페달을 밟다 보니 허벅지에 쌓이는 피로의 무게가 상당하다. 자존심을 버리고 밀고 가보지만 30~40kg에 달하는 자전거와 짐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시원한 청량음료에다 돼지갈비까지. 무한한 친절이 탈진해 가는 자전거 여행자를 살렸다.
▲ 래리 도일(Larry Doyle) 아저씨 시원한 청량음료에다 돼지갈비까지. 무한한 친절이 탈진해 가는 자전거 여행자를 살렸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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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베수비우스(vesuvius)까지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온다. 파크웨이 중간쯤 있는 러브(Love)라는 캠핑장에 머물기로 했다. 지난 밤 샬로츠빌 거리에서 하트 7 카드를 주웠더니 이런 행운이 따라오나 보다. 그래도 번듯한 캠핑장에서 맞는 첫 번째 야영이다.


태그:#자전거 라이더, #미국 횡단, #버지니아, #블루 리지 파크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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