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침마다 며느리에게 문안 전화하는 어머니
 아침마다 며느리에게 문안 전화하는 어머니
ⓒ 김동수

관련사진보기


아침마다 며느리에게 문안 전화하는 어머니

'따르릉'

오전 8시 10분~15분만 되면 우리 집 전화벨은 어김없이 울립니다. 10년 이상 울린 이 전화벨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오가는 내용은 별다르지 않습니다.

"엄마, 할머니예요. 전화받으세요."
"어머니, 전화 바꿨습니다."
"잠 잘났나. 방 따뜻하게 하고 자야 한다."

"예, 잘 잤습니다. 어머니도 잘 주무셨나요?"
"밥은 묵었느냐."
"예. 어머니도 드셨어요?"

"건강해라."
"예."

'뚜뚜두…'

차이가 있다면 집에 갈 때 이번 주는 무엇을 가져갈까와 여름에는 "더워서 어떻게 잤나"이고, 겨울은 "추워서 어떻게 하노"입니다. 이 반복되는 전화 문안이 10년 넘게 계속됐으니 아내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한두 번이면 감사할 따름인데, 조금은 '집착'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화 문안을 아침마다 하는 가정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고부간 갈등도 없고, 며느리에게 험한 소리 한 번 하지 않습니다. 한 번씩 며느리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엄마라고 해 봐라"고 하면 아내는 "엄마"라고 합니다. 엄마라는 말에 어머니는 "고맙다"고 하십니다.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유는, 어머니 삶의 질곡에 있습니다. 지난 세월이 우리 어머니에게만 유독 가혹한 헌신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서른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둔 두 번 상처(喪妻)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두 번 상처한 남자와 결혼한 어머니 삶

2008년 9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함박웃음 짓는 어머니 모습. 가장 아름답습니다
 2008년 9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함박웃음 짓는 어머니 모습. 가장 아름답습니다
ⓒ 김동수

관련사진보기


능력과 재력을 겸비했다면 남편의 두 번 상처와 아이 넷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절망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배고픔과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 없는 남편, 어미 없는 아이들의 절망과 배고픔을 눈앞에서 직접 본 어머니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친정에서 그토록 반대했지만 네 명의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려 결국 그 남자와 평생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 남자는 나중에 저를 낳아준 아버지가 되십니다.

어머니 삶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무 살 때 결혼을 하셨는데 11년을 독수공방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말씀을 하시면 가슴이 아립니다. 결국 11년 만에 그 남자는 어머니를 쫓아냈고, 다시 결혼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새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어머니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딸 하나를 두고는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또 혼자가 된 채 가정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내가 베 장사를 해서 돈을 좀 벌었다. 어떤 때는 부산까지 안 갔나."
"고생 많으셨겠네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베 장사만 아니라 '새우젓' 장사도 했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멀리 갈 때 외할머니에게 네 누나를 맡겼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는 차도 별로 없었는데 어떻게 다녔어요?"
"새우젓통을 이고 '선진'(어머니 친정 동네 이름)에서 사천, 진주까지 다녔다 아이가."
"저는 어머니 100분의 1도 따라가지 못하지요."


1997년 8월 26일 결혼식때 찍은 사진입니다. 아버지는 여덟달 후 생명을 놓으셨습니다.
 1997년 8월 26일 결혼식때 찍은 사진입니다. 아버지는 여덟달 후 생명을 놓으셨습니다.
ⓒ 김동수

관련사진보기

억척 어머니였던 셈이지요. 이런 삶을 사시는 가운데 아버지를 소개받았고, 뿌리치지 못하고 결혼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가정 경영능력 부족한 남편 대신해

아버지는 순수하였고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능력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를 저희들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가정을 이끌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과 발과 어깨와 머리, 등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할아버지 재산이 넉넉했지만 막내인 아버지가 물려받는 재산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더 억척 아내, 억척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어머니 삶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한 번씩 들려주시는 말씀은 새삼 저를 놀라게 합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 5시가 평균이고, 농사철이 되면 새벽3시, 4시에도 일어났다. 손가락이 아파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일했다. 비슨등(집 옆에 있는 작은 산등성)을 얼마나 넘었는지 모른다. 내가 밭에 거름을 주기 위해 똥 장군을 지고 산을 넘어갔다."
"아버지가 똥장군 지고 넘어가는 것을 봤어요. 다리가 워낙 약하신 분이라 휘청휘청 하셨지요."
"네 아버지도 그랬지만 나도 똥장군 많이 졌다. 모내기 철에는 가장 일찍 들에 나갔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일하기 위해서다."

"어머니 그 수고를 저희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똥장군을 지고 오르셨던 '비슨등'이라는 작은 산등성이
 똥장군을 지고 오르셨던 '비슨등'이라는 작은 산등성이
ⓒ 김동수

관련사진보기


서른 넷에 낳은 첫 아들, 사랑 그 이상

앞에 잠깐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도 두 번 결혼을 하신 후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11년 독수공방을 말씀하실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옛날 분들이 다 그렇지만 '아들' 하나만 낳으면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실 밖에요.

아버지가 결혼 후 첫 아이는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제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나이 서른 넷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저였습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가 세상 어디 있겠습니까? 저를 향한 어머니 사랑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동수야! 내가 너를 낳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얼마나 좋으셨는데요?"
"네가 가는 길목에 돌 하나가 있으면 돌을 치웠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봐."

"그런 말씀 자주 하셨어요."
"그것만 아니다. 내는 못 먹어도 너는 쌀밥만 줬다. 어떤 때는 네 아버지도 드시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너는 쌀밥을 먹였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다. 네가 나에게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아들을 향한 사람, 오롯이 며느리에게

사실 이것은 사랑을 넘어선 것입니다. 조금은 무서울 정도의 집착이었지요. 결혼 후 며느리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도 도를 넘어설 때가 있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기에 며느리를 사랑하고, 매일 전화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전화받는 것도 부담되는 것 아세요?"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
"사랑하시는 것 아는데…"

아침마다 시어머니 문안 전화 받는 아내. 조금은 부담입니다.
 아침마다 시어머니 문안 전화 받는 아내. 조금은 부담입니다.
ⓒ 김동수

관련사진보기


손자와 손녀들에게도 비슷합니다. 골다공증으로 허리가 다 굽었지만 토요일만 되면 집에 와서 놀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둘째 아이까지 중학교에 들어가 시간이 잘 나지 않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놀토때는 거의 빠지지 않고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동생네 아이들까지 여섯을 보는 어머니는 하늘 아래에서 가장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제 이런 사랑을 받을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연세가 여든하나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긴 막대기로 감나무에서 감을 따셨는데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루 하루 쇠약해가는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일을 할 수 없지만 건강에는 별문제가 없어 다행입니다.

나에게 준 그 사랑, 만 분의 1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2008년 9월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 때까지만해도 긴 막대기로 감을 따셨는지 이제는 힘듭니다.
 2008년 9월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 때까지만해도 긴 막대기로 감을 따셨는지 이제는 힘듭니다.
ⓒ 김동수

관련사진보기


저는 효자일까요? 이렇게 키운 아들 효자 없는 것 잘 아시죠. 바로 제가 그렇습니다. 어머니께 효도는 커녕 불효만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위해 자신을 다 바친 어머니. 오래오래 사셔서 나에게 준 그 사랑 만 분의 1이라도 효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내년에도 그 후에도 아침마다 전화벨이 울렸으면 좋겠습니다.


태그:#어머니, #전화, #며느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