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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가 계시던 우거처의 아담한 모습, 그 분은 이곳에서 평생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셨다.
▲ 한경직 목사 한경직 목사가 계시던 우거처의 아담한 모습, 그 분은 이곳에서 평생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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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종교인들의 최근 좋지 않은 사건으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종교인 전체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합니다. 오늘은 종교 지도자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평생 봉사하다 가신 한 분의 우거처를 살펴볼까 합니다.

그 분은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가 빈 손으로 떠났습니다. 2000년 4월 19일 타계한 후 남겨진 재산이라고는 말년에 타고 다니던 휠채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입고 다니던 생필품이 전부였습니다. 바로 한경직 목사입니다.

지난 12일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평생 기도하며 살다가신 남한산성 우거처를 찾았습니다. 토요일이라 남한산성에는 많은 관광객이 모여 들었습니다. 남한산성로 780번지, 우익문(서문)쪽 언덕길로 오르자 단풍나무, 귀죽나무, 소나무, 활엽수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남한산성로 780번길, 5월인데도 오르는 길목은 이미 한여름 녹음으로 우거져 있다.
▲ 한경직 목사 남한산성로 780번길, 5월인데도 오르는 길목은 이미 한여름 녹음으로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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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인데도 이미 온 산 녹음은 한여름을 방불케 했습니다. 길 옆에는 이름 모를 잡초들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언덕길을 한참 따라 올라가자 왼쪽으로 작은 가옥이 나타나고 표지판에는 한경직 목사의 우거처라고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아담하고 작은 단층집이었습니다. 우거처란 말을 사전에 찾아보았더니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이곳을 개인 소유가 아닌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으로 생각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기도처가 있습니다.

평생 이곳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자와 나라를 위해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가운데 바위가 기도의 처소
▲ 한경직 목사 평생 이곳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자와 나라를 위해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가운데 바위가 기도의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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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기도처가 궁금했습니다. 그분의 기도 장소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거처 왼쪽 언덕 좁은 숲길을 칠십미터 쯤 오르자 평평한 곳이 나오고 작은 천연 바위가 한가운데 솟아 있습니다. 이곳이 그분이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 나라를 위해 기도했던 장소라고 생각하니 숙연해집니다.

이번에는 집 내부가 궁금해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로 작은 거실겸 주방이 나타났습니다. 주방 탁자 한쪽이 주방과 붙어 있을 만큼 작은 거실입니다. 그 앞 옆으로 의자 셋이 있었습니다. 바로 문 하나 사이로 응접실이 있고 손님이 오시면 발이 서로 부딪힐 정도의 작은 응접실이지만 이곳에서 손님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

작은 거실과 주방이 함께 붙어 있다.
▲ 한경직 목사 작은 거실과 주방이 함께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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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응접실의 모습, 이곳에서  손님을 접대하셨다.
▲ 한경직 목사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응접실의 모습, 이곳에서 손님을 접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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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 작은 방이 있고 소박하고 낡은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침대 길이가 양 벽에 닿을 정도의 작은 방입니다. 침실입니다. 방 한쪽 공간에는 옷장으로 사용하였을 허름한 나무궤짝이 놓여 있고 궤짝 한쪽 문에는 문향이 선명한 태극기가 붙어 있어 평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짐작하게 하였습니다.

이곳이 수만 명의 큰 교회 담임목사의 우거쳐였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평생 기도하면서 교육자로, 종교지도자로, 나라 사랑하는 애국자로 살다가 빈손으로 가신 곳입니다.  

단촐하고 검소하기 까지한 침실의 모습
▲ 한경직 목사 단촐하고 검소하기 까지한 침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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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옷장 겸 이불장에 태극기가 선명하다. 그 분의 나라 사랑을  보는 듯하다.
▲ 한경직 목사 낡은 옷장 겸 이불장에 태극기가 선명하다. 그 분의 나라 사랑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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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는 1920년 12월 29일 평안남도 간리에서 태어나 조만식에게 사사하면서 민족과 조국에 눈을 뜨게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모자원과 고아원을 세워 그들을 돕는 한편, 평생 조국의 번영과 미래를 위한 교회의 역할을 부단히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을 사신 분입니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2년 노벨 종교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틀턴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 건국공로장을 받았고 숭실대학장과 대광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을 역임한 우리의 진정한 교육자이고 종교 지도자입니다.

이런 분이 그리워지는 세상입니다.


태그:#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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