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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흠,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 <어린왕자> 중에서

섬진강과 벌통산을 휘리릭 한자락 끼고 도는 순창의 예향천리길은 바람 같은 수천수만 가지의 마음을 머물게 하는 길이다.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노란빛으로 빛나던 가을 들판이 비워지고 긴 겨울을 준비하는 농사꾼 아지메들의 분주한 몸놀림만이 속이 꽉 찬 배춧속처럼 들어차 있는 길이다.

ⓒ 황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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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천리길은 순창군에서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길을 기획하면서 생겨난 길이라 아직 생소하다. 하지만 섬진강과 벌통산이 어우러진 이 길은 보여주는 길이 아닌 이 길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담겨 있어 정감이 가는 길일뿐이다.

어릴 적 소꿉친구와 도란도란 걸으며 솨악솨악 거리는 바람 소리처럼 그냥 걸어가는 길이다. 먼지 뒤집어쓰고 콩 타작하다가 반가운 친구가 나를 보러왔다는 문자를 보는 느낌, 몸빼바지 입은 채로 헐레벌떡 뛰어나가 친구 손 꼭 잡고 구경시켜 주고픈 길이다. 오십 줄에 들어서는 친구의 마음을 읽어주고 웃어 주며 토닥거리며 가는 길가에 실한 무 쑤욱 뽑아 쓱쓱 바지에 닦아 서로 베어 물며 키드득 웃어주고픈 길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길들이 태어나고 사라지고 다시 이름을 바꾸지만 순창 사는 사람들에겐 그 어떤 명품 길보다 더 소중한 길이다. 강천산의 맨발로 걸어가는 길이 사람 맛 나는 장터같다면 섬진강을 끼고 도는 이 마실길은 첫 마음 첫사랑 같은 아스라함이 있다.

순창 적성 구남 어은정에서 마실길은 시작된다. 어은정이란 조선왕조 중기 문신이며 학자였던 양사형(揚士衡)이 자신의 호인 어은(漁隱)을 따서 붙인 정자이다. 흘러가는 섬진강을 수놓는 백일홍이 필 때의 풍경은 보는 사람마저 황홀하게 한다고 한다.

어은정을 돌아서면 보이는 내월 취입보는 농사꾼들의 속내를 알아주려는 듯 항상 그 자리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내월 취입보를 지나 숲 속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찾았다. 어은정에서부터 함께 따라온 백구가 안 보이기에 어디 갔나 찾았더니 이미 숲 속 계단 위에서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옛사랑의 추억을 휘감아보듯 나와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앞서 걸어가기 시작하는데 예향천리길 문화유산 해설사 같다.

숲 속 길은 나무로 만들어진 데코길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던 길이어선지 수많은 나무와 덩굴들, 솔잎이 낙엽이 되어 길을 덮고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숲길에서 바라보는 섬진강은 친근한 엄마 얼굴 같다가도 들깨향기 온몸에 배인 보고픈 사람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 강에는 물이 흘러간 자국 그대로 바위가 맨살을 드러내고 옹기종기 어우러져 있는 풀들이 단풍나무보다도 더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여름 섬진강댐 방류로 전봇대의 허리만큼이나 차올랐던 물로 농사꾼의 매실나무들은 죽어 있고 흙길은 자갈돌길로 변해 있었다. 길마다 야생 갓 들이 갈대와 어우러져 있는데 왜 이리 먹먹한지…. 농민들 속 터지는 소리 하늘이 알아주려나 애꿎은 하늘만 욕하다 돌아섰을 아짐들의 마음이 전해진다.

길이 끝날 무렵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어진 사람들이 되려 화 당하는 것을 보고 자연 속에 묻혀 아우 돈(墩)과 함께 세상을 잊고 살았다는 양배가 지은 구암정이 쉼터역할을 하려는 듯 앉아 있다. 바위에도 물이 흘러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쉬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하수와 벤치가 놓여 있어 학문을 닦아 그 지식이 높았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던 양배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양배는 아우와 함께 이곳에서 평생 고기를 낚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지금도 적성강 상류 만수탄에는 형제가 고기를 낚던 바위가 남아 있어 배암·돈암이라 부르거나 합쳐서 형제암이라 부르고 있다.

"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

이제 섬진강과 장구목의 시원한 강바람을 가슴으로 들이마시면서 걷는 길이다. 수달이 나올 정도로 생태적 가치가 높은 강변에는 기암절벽의 빼어난 풍광은 없다. 직선의 미학이 아닌 느림의 미학, 곡선의 미학이 사로잡는다. 농사꾼들이 일하고 돌아오는 노을길에 삽 씻고 얼굴 씻고 허허 오늘 하루도 잘 지냈구나 하고 다리 두들겨 주는 강이다. 그래서 더욱 좋은 강이다. 아름다운 세월이 흘러가는 곳이다.
 
구미다리를 건너니 강경마을로 가는 입구에 마실길 주차장 표지판이 나온다. 작고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는데 윗부분에 놓여 있는 게 하 수상하다 느꼈는데 여름에 물이 차올라 그랬나 보다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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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느려지게 흐를 것 같은 이 강물에는 도둑맞았다 되찾아서 더 유명해진 요강바위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바위를 타고 넘는 강물이 바위를 깎아내 부드러운 곡선을 빚어놓았다. 물살마다 여러 모양을 만들었는데 특히 그 구멍이 마치 할머니들의 요강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몇 년 전 구림중학교 아이들과 함께한 자전거 기행 때 아이들이 뛰어내렸던 큰 바위도 그대로 있다. 쌍둥이 낳겠다고 몇 번씩 뛰어놀던 아이들이 군대 가고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요강바위랑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물가에 잡초가 노랗게 물들었다. 수채화 같다.

늦가을산의 느낌을 엄마 마음 같다고 표현한 분이 있다. 갈댓잎들은 지면 지는 대로 예쁘고 벗으면 벗는 대로 예쁘다. 지나다가 아주 예쁜 도서관이 눈에 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사막 속의 우물 같다. 작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니 섬진강을 바라보며 찻잔과 커피포트, 과자가 놓여 있다.

바라보는 원두막엔 실가리가 걸려 있고 장독대 위로 감나무에 홍시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데 곶감도 있다.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책을 읽으며 쉬어갈 수 있는 쉼터를 만들어 주고픈 구림중학교 국어선생님이신 김인정 선생님의 마음씀씀이를 보는 듯하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유강희 시집 <살구나무 할아버지> <책을 베고 잠들다>, 이기현, <밥벌이의 지겨움>, 김현·공지영의 <즐거운 나의집>이 옆으로 뉘여 놓아졌다.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책사랑이 보인다.

이외에도 <홍어>-김주영,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감나무도 시를 쓸 것 같은 작은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책 하나 베고 잠들면 피로가 싹 가실 것 같다.

살구나무 할아버지
우리 동네 제일 큰 도랑가엔
낡은 움막 하나 짓고 사는 살구나무 할아버지 한 분 계신다
(중략)
살구나무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로 유명한 시인
특히 마늘 속껍질 같은 봄하늘에 톡 톡 터뜨리는 연분홍 꽃잎은
누구나 좋아하는 가장 많이 알려진 시지만
내겐 그보다 더 좋아하는 시가 있다

할아버지 도랑물에 발 담그시고
조는 듯 마는 듯 눈 가느소름 뜬 채 어딘가에 자라고 있을
또 한 그루의 어린 살구나무를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풀섶에 푹 떨어뜨린
그 새콤달콤한 살구한 알
서른이 넘은 뒤에도 그 받으려 간 날 많았다  - '유강희의 살구나무 할아버지' 중에서

선생님께 전화해서 이곳이 가장 예쁠 때를 여쭸더니 앞산나무가 따뜻한 햇살에 반짝 거릴 때와 봄 새순 돋을 때 어마어마하게 아름답다고 하신다. 그뿐 아니라 하늘에서 눈송이들이 날릴 때, 강아지들이 뛰어놀 때 등 모든 풍경이 시가 되고 수필이 되는 곳이란다. 옆에서 보기엔 선생님이 가장 아름답다. 선생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학생이 할머니랑 살다가 할머니가 아프셔서 혼자 남게 되자 이곳으로 데려오셔서 함께 지내시며 공부시키시고 계신다.

순창이 좋고 섬진강이 좋아 이곳으로 내려오신 선생님이 우리 아이 담임이셔서 나도 너무 행복했다. 아름답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배운다. 동행하셨던 도서관 관장님 말씀하시길 "인생을 사는 동안 누구는 꿈만 꾸고 누구는 꿈을 실천하고 그 누구는 꿈도 안 꾼다"며 의미심장한 명언을 남기셨다.

ⓒ 황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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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지?
사막은 좀 쓸쓸하구나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야."
뱀이 대답했다

섬진강을 끼고 돌다 보면 벌통산 숲길로 들어간다. 부드러움과 유연함의 섬진강을 몸으로 느꼈다면 직선으로 가파를 것 같은 벌통산을 오르고 내려야 한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원시림 그대로인 숲에 산길만 냈을 뿐이다. 걸어가는 길목마다 채색되지 않은 단풍나무들이 홀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중간중간 아! 예향천리길이구나! 느낄 만큼 드문드문 벤치가 놓여 있는데,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외가 툇마루 같은 느낌이랄까? 가을 소풍 가서 보물찾기하는 아이처럼 열심히 눈길을 돌려본다. 표지판과 함께 있는 고즈넉한 벤치에 마음을 뺏겼다.

ⓒ 황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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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니 차츰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산중에도 옛날 조선시대에는 군수가 인사갈 정도로 큰 마을이 있어 세목재라고 불렸다고 하며 집터와 감나무들만 남아 있다.

거의 정상 무렵에 이르니 저 멀리 걸어온 길을 사진으로 남기기에 딱 좋은 바위가 있어 올라갔다. 아스라이 보이는 고갯길들을 보며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서 보니 저 고갯길에 나도 모르게 내 인생길을 대비시키고 있었다. 아직 젊고 할 일이 많다고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벌써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탄식과 더 힘내서 정상에 오를 때의 희열감을 느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오르니 표지판에 인계, 적성 갈림길이 나왔는데 마실길 색깔이 같은 것은 마실길 가는 표시고 다른 것은 샛길이란다. 강경마을이라는 표시가 나왔다. 16가구가 모여 사는 깊은 산중마을 집집마다 감과 모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좌측으로 쉼터가 놓여 있다. 잠시 지친 발걸음 쉬어가라는 듯, 학교 파하고 집으로 가면 맨 먼저 할아버지가 안아주는 듯 300년 된 정자나무가 반겨준다.

자연석으로 쌓은 탑에 두 손 모아 빌었을 아낙네의 심정이 되어 소원을 빌고 싶어졌다. 이 가을에 멋있는 사람들과 서로를 길들여서 멋진 친구들 만들어 풍성해지는 꿈을,,,

내려가다 보니 큼직한 코 두툼한 입술로 항마촉지인을 결한 채 결가부좌하고 있는 투박한
마애 여래 좌상이 있다. 한참을 들어간 숲 속 약 2.5m 정도 되는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입술은 가장자리를 쳐지게 표현하였으며 입술과 이마 선을 따라 붉은색의 칠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내 목처럼 짧아서 웃음이 새어나오게 되어 있다. 멋있고 우아한 부처님이 아닌 토속화된 부처님이 이런 모습이리라. 붉은색으로 채색된 흔적이 있는 입술이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아서 서둘러 자리를 뜬다.

단풍나무가 너무 예뻐서 엽서 한 장 만들어 보내고픈 입석마을 정자에 앉았다.

어린왕자에게 사막여우가 말했다.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 시간조차 없어지고 말았어. 다 만들어 놓은 물건을 가계에서 사면 되니까. 하지만 친구를 팔아 주는 장사꾼이란 없으므로 사람들은 친구가 없게 됐단다. 친구가 갖고 싶거든 날 길들여!"
"그러나 네가 나를 기르고 길들이면 우린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돼. 넌 나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난 너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될 테니까."

섬진강과 벌통산을 끼고 돌았던 예향천리길이 끝나갈 무렵 나 또한 누군가에게 서로 길들이자고 말할 여유가 생긴 걸까. 갑자기 보고파지는 사람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산들마다의 향기도, 웃음도 모두 다 내 안에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이다."

덧붙이는 글 | 순창문화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마실길, #예향 천리길, #순창군, #섬진강 ,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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