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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 경복궁 경회루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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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폐 속을 파고든다. 춥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낙엽을 굴리던 온화한 갈바람이 어느새 쌀쌀함으로 무장했다. 겨울로 가는 동장군이 입동 문턱을 넘었으니 이제 머잖아 소설(小雪)이다. 싸한 바람이 조복 깃을 파고든다.

회맹단에서 내려온 일행을 위한 연회가 경회루에서 펼쳐졌다. 하오의 태양이 못(池)에 내려앉았다. 살얼음에 반사한 햇빛이 눈부시다.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풍악이 울렸다. 수양이 임금 가까이 다가갔다. 부르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지근거리다. 여느 때 같으면 운검의 제지를 받거나 탄핵을 받을 불경이다. 하지만 수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숙부가 경하받아야지요."

언중유골이다.

편액 태종 12년 경회루 준공 당시 편액은 세자 양녕대군이 썼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편액은 대원군이 중건할 때 신관호가 다시 썼다.
▲ 경회루 편액 태종 12년 경회루 준공 당시 편액은 세자 양녕대군이 썼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편액은 대원군이 중건할 때 신관호가 다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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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의 글씨를 바라보면 기(氣)를 받아 힘이 솟습니다."
"그 힘의 기를 받습니다."

불편한 진실이 송곳처럼 튀어나왔다.

화제로 소실되기 전 숭례문에 걸려있던 편액. 호방하고 자유분방함이 물씬 풍긴다. 양녕대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 숭례문 화제로 소실되기 전 숭례문에 걸려있던 편액. 호방하고 자유분방함이 물씬 풍긴다. 양녕대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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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연타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머쓱해진 수양이 화제를 바꿨다.

"편액을 누가 쓰셨는지 아십니까?"
"그야 숙부님의 백부님이시죠."

정확히 알고 있다. 수양의 백부라면? 세종의 형님 양녕대군이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자리에서 내려오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를 쓰고 오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욕심이 크면 오르려는 데 목적을 두고 욕망이 크면 자리에 연연하겠지요."

혼잣말처럼 읊조리던 임금이 고개를 들었다. 목멱산 너머 관악산이 어슴푸레 시야에 잡혔다. 아우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내준 양녕대군이 한동안 은거했던 곳이다.

"연주암에서 경복궁을 내려다보던 심정이 어떠하셨습니까?"

가까이 있다면 묻고 싶었지만 이 자리에 없다. 효령대군은 바로 눈앞에 있지만 정치와 담을 쌓은 양녕은 멀리 있다. 폐위인지 양위인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자리를 내준 것뿐인데 죄인이 되어 팔도를 떠다니고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유람 중이다. 아마 묘향산쯤에 있을 것 같다. 자신에게도 그러할 날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연주암. 세자에서 폐서인. 급전직하 죄인이 되어 이천에 있던 양녕이 유배가 풀렸을 때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 관악산 연주암. 세자에서 폐서인. 급전직하 죄인이 되어 이천에 있던 양녕이 유배가 풀렸을 때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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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는 무슨 뜻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수양이 침묵을 깼다.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慶會)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조선 개국 이래 명실상부한 최초의 왕세손으로 태어나 세손 교육과 세자 교육을 받은 임금답다. 세종도 경복궁 밖 순화방에서 정안대군의 아들로 태어나 평이한 교육을 받았고 문종 역시 세종이 충녕대군으로 있을 때 대군의 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현 임금은 경복궁에서 세자의 아들로 태어나 세종 재위 시에는 강서원 교육을 받았고 문종 재위 시 시강원 교육을 받았다. 남들이 <대학>을 공부할 때 제왕학 교과서라 일컬어지는 <대학연의>를 공부했다.

세손 교육기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강서원 세손 교육기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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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을 잊지 마시고 바른 사람을 얻어 성군이 되십시오."
"숙부가 도와주시오."

어린 임금의 눈동자에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쌀쌀한 날씨 때문일까? 어좌에 앉아 있는 임금의 용안이 밝지 않다. 물러 나온 수양이 신숙주와 한명회를 불렀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다. 그대들도 본 일이 있는가?"

조카의 모습을 10여 년 이상 지켜봐왔지만 이렇게 쓸쓸한 모습은 처음이다. 외로움도 아니고 쓸쓸함도 아니었다. 뭔가 모를 적적함이 면복으로 감싼 임금의 내면에서 풍겼다.

"날씨가 차가워서이겠지요."

신숙주가 한명회를 바라보았다.

"옆구리가 시려서입니다."

한명회가 째진 실눈으로 눈웃음 지었다. 그의 순발력은 가히 국보급이다.

"옆구리?"

수양이 되물었다. 목숨을 걸었던 혁명동지가 아니라면 입에 올릴 수 없는 불손한 언사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수양이 한명회를 바라보았다. 꾀주머니를 풀어놓으라는 것이다.

"답은 하나입니다."
"뭔가?"
"혼례를 올려드리면 됩니다."

한명회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흘렸다.

"가례?"
"네, 그렇습니다. 장가가 답입니다."
"그동안 몇 차례 청을 드렸는데도 꿈쩍을 안 하시네."
"왕도가 없습니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두 번, 두 번 해서 안 되면 세 번. 될 때까지 하면 됩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듯이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사람 없습니다. 계속 찍으면 넘어가게 돼 있습니다. 그게 살아 있는 생물의 본질입니다."

"지금은 국상 중이지 않는가?"
""계집 구경 한 번 못해본 종놈에게 '이제 때가 되었으니 장가가라'고 하면 '예, 감사합니다' 넙죽 절하고 싶지만 '장가는 무슨 장가입니까?'라고 손사래를 치며 꽁무니를 빼는 게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염치입니다. 하물며 전하가 오죽하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국상 중입니다. 면전 권유는 백번 퇴짜입니다."

"옛부터 임금은 무치(無恥)라 하지 않았는가?"
"전하는 아직 그 경지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윤허를 받을 수 있겠는가?"

수양이 마른침을 삼켰다.

"나리! 귀를 잠간 빌려주시겠습니까?"

한명회가 수양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태그:#수양대군, #경회루, #관악산, #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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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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