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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양 날의 검입니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습니다. 이 서슬이 퍼런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는 항상 '거짓말'이 존재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기만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국가의 거짓말'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혼란의 시대에 국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말>

'나쁜 피'를 뽑아주는 친절한 백인의사?
 '나쁜 피'를 뽑아주는 친절한 백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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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미국 정부는 흑인의 매독을 무료로 치료해줬다

여러분, 많이 아프시죠? 여러분은 현재 '나쁜 피(bad blood)'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겁니다. '나쁜 피'는 약한 에너지 같은 건데요. 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정부가 무료로 병을 고쳐주고 음식도 드릴 테니까요.

못 믿으시겠다고요? 얼마 전에 집에 배달된 편지를 보시고도 못 믿겠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미국 정부의 로고가 새겨진 희고 깨끗한 봉투에 담긴 그 편지 말입니다. 모두들 읽어보셨겠지만 다시 한 번 읽어드립니다.

"정부 의사들이 주관하는 치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특별치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명심하십시오, 단, 반드시 간호사와 상담해야 합니다."

저희 의사들이 드리는 약을 꼬박꼬박 먹고 채혈도 하고 저희가 안내하는 치료 절차를 꼬박꼬박 따르면 여러분을 괴롭히는 '나쁜 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국가파견 의사라면 실력이 검증된 의사들 아니겠습니까? 저희들만 믿으시고 치료혜택을 꼭 잡으세요!

[진실] 미국 정부, 멀쩡한 흑인도 매독에 감염시켜 생체실험

1997년 5월 16일 터스키기실험 피해자에게 사과 기자회견을 하는 클린턴 대통령(오른쪽)
 1997년 5월 16일 터스키기실험 피해자에게 사과 기자회견을 하는 클린턴 대통령(오른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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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16일,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 아주 특별한 손님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특별한' 그들의 면면은 초라했다. 4명의 손님은 이미 휠체어에 탄 백발의 노인이었다.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이 87세였으며, (출생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100세에서 109세 사이였다. 그리고 클린턴은 이 초라한 노인들 앞에서 담화문을 읽었다.

"오늘날 미국은 잘 알지도 못하고 동의하지도 않은 채 연구에 이용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그 가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원도 없고 대안도 없는 가난한 흑인들인 그들은 미국 공중보건국(The United States Public Health Service)에 의해서 의료적 돌봄을 제공받았을 때 희망을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배반당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행한 일은 수치스러운 것이었으며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른바 대통령의 공식사과였다. 클린턴의 특별한 손님들은 대통령의 사과 담화문 속에 등장하는 당사자였다. 인생의 늘그막에서 대통령의 사과를 끌어낸 사람들, 그들에게 어떠한 사연이 숨어있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통령은 그들에게 백 번 사과할 만했다. 미국 정부가 1932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40년간 가난한 흑인 600명을 대상으로 비윤리적인 매독 생체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매독을 치료하지 않고 오랜 기간 방치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건강 문제를 알아내기 위해 치료하고 있다고 환자들을 속이며 가짜 약을 주고 병의 경과만을 관찰하는 실험, 백악관의 백발노인들은 이 '미국판 마루타'의 생존자였다.

매독 생체실험은 미국에서 매독의 발생률이 높은 앨라배마 주 매콘카운티(Macon County)의 터스키기(Tuskegee) 지역 흑인 남성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곳의 지명을 따서 흔히 '터스키기 매독연구(Tuskegee Syphilis Study)'라고 불린다.

"매독 치료해드립니다"... 흑인들 속인 공중보건국

흑인들이 노예였던 시절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비인간적인 생체실험에 흑인들이 동원될 수 있었을까. 사실 당시 흑인들의 처지는 노예시절과 비교해 그리 크게 나아진 게 없었다. 192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거의 의사를 만날 수 없었다. 열악한 경제적·사회적 환경 때문이다. 당시 매콘카운티만 해도, 개업한 개인병원의 거의 90%가 백인의사로 주로 백인들이 사는 북부와 북동부 지역에 집중되었고, 흑인들이 주로 사는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서는 병원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매독과 같은 만성질환이 흑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1932년 당시 앨라배마 주는 미국 전체에서 저소득층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주였고, 특히 매콘카운티는 흑인이 전체 인구의 82.4%를 차지할 정도로 대표적인 흑인 거주지역이었다. 그들 대부분(약 88%)이 농촌지역에서 플랜트농장의 차지농이나 소작농으로, 또는 생계형 소농으로 경제생활을 영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콘카운티의 백인 플랜트 사업자들은 자신의 농장에 고용된 흑인들이 매독 때문에 제명을 다 못 채우고 일찍 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흑인의 건강은 생명이 아니라 돈이었으니, 얼마나 깜짝 놀랄 사실이었겠는가.

이때 "매독 환자들이 어떻게든 치료될 수 있다면 그 결과로 양질의 노동 능률을 통해 비용이상의 보답을 받을 것"이라고 공중보건국의 한 의사가 지적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의학연구가 시급했다. 그리고 공중보건국은 매독의 치료로부터 대부분 방치돼 있는 터스키기 지역을 주목했다. 희대의 임상시험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공중보건국 입장에서 본 터스키기의 흑인 매독환자들은 '자연적 표본군'이었다. 치료받지 않은 상태로 인해 매독질환의 '자연적' 경로를 보다 분명하게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5년 이상 매독을 앓고 있는 잠복기나 후기(3기) 상태의 25세 이상 흑인 남성을 연구대상으로 선정해 매독의 초기 병리현상과 그 전이과정, 특히 심장이나 혈관, 신경계에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을 알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매독 치료가 아닌 매독 연구를 위한 실험 대상자를 모집하는 것은 역시나 힘들었다. 후에 웰즐리(Wellesley) 대학의 수잔 리버바이(Susan Reverby) 교수(의학사)가 수집한 공중보건국 개인 서신에 나타난 것처럼, "무지하고 게으르다고 조롱했던 가난한 문맹 흑인 노동자들" 중에서도 말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무료치료'를 제공한다고 속임수를 쓰게 된다. 거짓말을 한 이후부터는 상황이 아주 쉽게 돌아갔다.

자신이 '나쁜 피' 때문에 아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말기 매독을 앓고 있는 거의 400여 명의 흑인 남성 소작인들과, 대조군 역할을 하게 될 201명의 건강한 흑인 남자들이 등록했다. 환자들은 그런 연구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운이 좋다고 여겼다.

"앞문에 정부 문장이 그려진, 간호사가 손수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을 출입하며 이웃들 앞을 지나갈 때 손 흔드는 것을 좋아하는 많은 남자들에게는 일종의 명예였지요."

이 연구를 위해 특별히 고용된 흑인 간호사 유니스 리버스(Eunice Rivers)는 이렇게 회상했다.

군대까지 동원된 치밀한 실험... 150여 명의 죽음

단순히 그들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속아넘어간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을 완벽히 속이기 위해 주도면밀한 작전을 짰던 정부의 행태를 곱씹어보면 말이다. 미 공중보건국은 실험대상자들에게, 편지 머리에는 "매콘카운티보건국(Macon County Health Department)"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고, 편지 말미에는 "터스키기연구소와 함께 일하는 앨라배마주보건국(Alabama State Board of Health)과 미 공중보건국"이라는 문구가 적힌 편지를 보냈다.

얼마 전 당신은 철저한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들은 당신이 나쁜 피에 대한 많은 치료를 받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이제 두 번째 검사를 받을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 검사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검사 후에 당신이 치료를 견뎌낼 조건이 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특별한 치료를 받게 될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특별한 치료'란 신경매독(neurosyphilis)에 대한 척수천자(속이 가는 침을 몸 속에 찔러넣어 척수를 뽑아내는 일)였다. 반복적인 척수천자는 지망막염, 요통, 발열 등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하지만 실험의 성공에 눈이 먼 공중보건국 의사들에게 이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실험대상자들은 '무료 치료를 위해' 터스키기연구소병원(Tuskegee Institute Hospital)으로 데려다줄 공중위생 간호사를 만나도록 지시받았다.

이것이 특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당신의 마지막 기회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간호사를 만나는 것에 착오가 없게 하십시오.

이처럼 흑인들은 이 매독 연구과정에서 철저히 '실험용 쥐' 신세였다. 그들은 연구의 의의나 내용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고 동의과정도 없었다. 만약 실험대상이 흑인이 아니라 백인들이었다면 이렇게 철저하게 모든 과정을 숨길 수 있었을까.

이는 흑인들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지 반 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적 의식은 남아 있었음을 방증한다. 미 공중보건국의 주요 의사결정권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1934년 공중위생국장(Surgeon General)을 지낸 토마스 파란(Thomas Parran) 박사가 사업을 앞두고 했다는 발언내용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남부에서 특히 흑인들은 본능적으로 백인을 신뢰한다. 너무 못살게 굴던가 혹은 의심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들은 의사들을 신뢰한다. 우리의 많은 남부 농촌 의사들의 친절에 감사하고 있다. 정부도 신뢰한다. 정부가 자신들의 친구이며 자신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의사라면 당연히 신뢰를 할 것이다. 그가 공정하고 사려 깊게 임하면 협력을 얻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흑인들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거짓말과 무시가 실험과정에서 난무했던 것이 이상할 게 없었다. 1932년 플랜트농장에서 피를 뽑는 혈청검사를 하면서 당시 플랜트농장 사업주의 승낙을 받았을 뿐, 흑인 참여자들의 동의를 받거나 그 취지를 설명하는 절차도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 터스키기 마을에서는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흑인들을 대상으로 매독 실험을 하는 일이 일어났다.
 미국 터스키기 마을에서는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흑인들을 대상으로 매독 실험을 하는 일이 일어났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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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를 받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가짜 약(placebo)'도 동원됐다. 당시 연구 참여자를 관리하였던 간호사 유니스 리버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항상 철분약, 아스피린, 비타민제를 들고 다녔다. 그것은 우리의 약 처방의 일부였다. 그들은 이 약을 먹고 매우 즐거워하였다."

결국 흑인들의 병세는 날로 악화돼갔다. 그리고 의사들은 그들을 지켜보며 단지 기록만 했다. '기적의 치료제'라고 일컬어진 페니실린이 1941~1943년 무렵에 개발되어 1946년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음에도 실험대상 흑인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페니실린을 한 번도 맞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 연구에 참여한 한 연구자에 따르면, 정부 의사들은 현지 임상의들을 만나, "그들을 치료하지 않도록 협조를 부탁"했다. 약물로 치료하면 그들이 나중에 죽었을 때 시체를 오염(실험결과를 대조할 수 없는 상태)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2차 세계대전 동안 연구자들은 지역 징병위원회와 접촉해서 실험대상자로 적격인 사람들을 징병하지 않도록 했다. 혹시나 군의 의료서비스로 그들이 매독 치료를 받을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설사 군대 입대했더라도 데이터 결과를 보존하기 위해 지역 징집위원회와 공모하여 군에 입대한 터스키기 실험 대상자는 군대의 표준매독 치료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밀했다. 그 치밀함의 결과, 매독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28명이 사망하고, 매독 후유증으로 100명이 사망했다. 이들의 부인 중 40명이 매독에 감염되었고 19명의 신생아가 매독으로 사망했다.

한 공무원의 폭로로 40년 만에 중단된 '살인 실험'

1972년 진 헬러가 쓴 '터스키기 실험' 폭로 기사
 1972년 진 헬러가 쓴 '터스키기 실험' 폭로 기사
ⓒ The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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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진행되던 '살인 실험'은 한 젊은 공무원의 폭로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 주인공은 피터 벅스턴(Peter Buxtun). 1966년 대학원을 막 졸업하고 미국 공중보건국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의 성병 조사자로 부임한 그는 몇 달 후 터스키기 연구를 알게 된다. 그는 여전히 그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공중보건국 관리들에 대해 의문을 갖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1957년 연구의 책임이 공중보건국에서 '질병통제및예방센터(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로 이전되자, 그때까지 그 연구와 연구결과의 수집을 감독하는 의사들이 새로 창설된 애틀랜타 주의 CDC로 옮겨갔다. CDC의 관리들은 벅스턴이 연구의 윤리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을 귀찮게 여겼다. 심지어 아이러 마이어스(Ira Meyers, 1951년부터 1986년까지 앨라배마 주 보건국장을 지냄)는 터스키기 실험 대상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환자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치료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벅스턴은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살인에 가까우며 말하자면 제도화된 형태의 살인"이라고 느꼈다. 그는 6년 동안 상사들에게 우려를 표시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연구의 혜택에 대한 "엄격한 설교"뿐이었다. 이윽고 1972년 7월, 벅스턴은 <AP(Associated Press)>의 기자였던 한 친구에게 터스키기 연구에 대한 내용을 제보하게 된다. 그 결과 또 다른 <AP>의 기자 진 헬러(Jean Heller)가 그 이야기를 기사화하게 되었고, 1972년 7월 26일 아침 그녀의 기사가 <뉴욕타임스>의 1면에 실렸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흑인 남자들이 "앨라배마 주의 터스키기에서, 연방정부의 기금으로 수행된 의학 연구에 실험대상(guinea pigs)"으로 사용됐다는 내용이었다. 진 헬러는 매독의 끔찍한 결과를 지적한 다음, 터스키기 실험에 참가한 276명의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1969년에 실시한 연구결과를 폭로했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7명의 피험자가 매독의 직접적인 결과로 죽었다는 것이다.

반향은 컸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포럼을 개최했으며, 연방정부는 명망 있는 흑인운동가 브러더스 버틀러(Broadus N. Butler) 딜라드대학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8명의 위원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실험의 전 과정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 조사 결과에 따라 공중보건국의 상급기관인 보건복지교육부(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는 이 연구를 공식적으로 중단시켰고, 1973년 3월 3일에 보건복지교육부 장관이던 캐스퍼 와인버거는 생존자들을 위한 치료를 지시했다.

사과한 사람도, 처벌받은 사람도 '없다'

너무나 '몰상식'적이었던 매독생체실험은 이렇게 실험이 시작된 지 근 40년 만에 종말을 고하게 됐다. 하지만 놀랍게도 누구도 이 실험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몰상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실험을 주관하고 실험의 지속을 위해 투쟁했던 백인 의사들 가운데 공식적으로 사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또 희생자에 대한 보상은 있었으나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당시 연구자들은 흑인 참여자들을 인간이 아니라 질병이 발현되는 단순한 숙주나 배경으로 간주하거나 의사의 치료활동의 단순한 대상으로서 환자를 보았다. 사회적으로 가장 열악한 삶을 사는 흑인들을 부지불식간에 '실험동물(laboraory animals)'로 여긴 것이다. 사과해야 마땅했고 법적 처벌도 받아야 했으나, 결론적으로 연구자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였을까. 하긴 오늘날에도 사람을 대상으로 의료 실험하는 일이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법적 처벌' 운운할 만큼 희귀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자들은 '현대의 터스키기 흑인들'이다. 제약회사들은 가난한 학생이나 노숙자들에게 약간의 금품을 제안하면, 쉽게 지원자를 모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현재 미국제약업계 임상 시험센터는 대학 캠퍼스 옆에 있다. 화이자의 새로운 임상시험센터는 편리하게도 예일대학 옆에 있고, 브리스톨-마이어즈스큅은 프린스턴 대학 옆에, 영국의 제약사 글락소도 영국 런던의 임페리얼대학 옆에 임상시험센터를 두고 있다고 한다.

터스키기 매독연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탄생한, 생명윤리의 주요 윤리원칙을 담은 '벨몬트(Belmont) 보고서'는 돈이나 다른 보상으로 인간 피험자를 위험한 실험에 유인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바 있다. 의료윤리와 현실과의 이 커다란 괴리. 과학자들이 가져야 할 도덕적 성실성을 시험하는 줄다리기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태그:#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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