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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서 남편에게 매맞는 아내 김복남역으로 나온 배우 서영희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서 남편에게 매맞는 아내 김복남역으로 나온 배우 서영희
ⓒ 스폰지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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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란 곡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언니가 있다. 내가 어릴적부터 우리 집을 포함해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며 자란 언니와는 가깝다면 아주 가까운 관계다.

어릴 때도 이 집 저 집 그렇게 고생만 하더니, 결혼한 후에도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하며 산다. 두 달 전인가. 언니가 모시고 살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장례식장엘 다녀왔다. 언니 남편이 3남 2녀의 막내아들이라는데 시어머니가 막내랑 살고 싶어 한다고 해서 언니는 결혼과 동시에 지금껏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아왔다.

일산, 수유리 등지에 그럴듯한 아파트에서 산다는 언니 남편(형부)의 형들이랑 누나들. 겉으로 얼핏 보기에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의 그 집 식구들 틈에, 농사를 짓느라고 시꺼멓게 그을리고 기미가 덕지덕지 내려앉은 언니 얼굴을 보니 속이 많이 상했다.

강원도 깊은 산골 구석, 재래식 화장실이 마당 구석에 있고 방 하나에 부엌 겸 거실이 전부인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올망졸망 살던 언니. 언젠가 한 여름에 그 집 재래식 화장실에 한번 들어갔다가 파리가 하도 얼굴에 달라붙어서 기겁을 하고 뛰쳐나온 적도 있다.

그때까지 난, 언니가 고아로 외롭게 자라서 시집살이도 좋아하나보다 하면서 그저 힘들게 시어머님 모시는 것만 걱정하고 있었지 언니의 삶 속에 굉장한 큰 비밀이 숨어 있는 걸 몰랐다.

고아로 외롭게 자라 온갖 고생 다한 언니... "벌 받을까봐 무서워"

4년 전으로 기억 된다. 언니가 전화를 했다.

"을순아, 나 지금 서울 가면 네가 나 하루만 재워줄래? 나 너한테 가고 싶어. "
"당근 되지, 언니. 고속버스 첫 차 타고 빨리 와. 내가 터미널로 데리러 갈게."

그 날 아침, 언니를 동서울터미널에서 데려다가 집에 짐을 풀고는 찜질방, 세꼬시집이며 LP판 있는 술집까지 풀코스로 돌았다. 찜질방에 나란히 둘이 누워 지압을 받는데 언니는 감격 또 감격이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대접 받아도 되는 거니? 벌 받을까봐 무서워."
"뭔 소리? 벌은 커녕 언니 몸에 이런 대접을 해줘야 언니가 복 받는 거야. 언니 몸을 매일 구박하면 나중에 벌 받아. 몸 아파지면 그게 벌 받는 거지 뭐."

찜질방을 나와 세꼬시 파는 집에 들어가 오독오독한 세꼬시를 된장에 찍어 소주와 같이 진탕 먹고는 입가심을 하러 단골 술집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LP 판이 많은 그곳에서 노래도 듣고 맥주도 마셨다.

"언니, 좋아하는 노래가 뭐야? 신청곡도 틀어주니깐 말해."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란 노래가 있을까?"

그 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구슬픈 그 노래를 들으며 어찌나 언니가 많이 울던지 나도 덩달아 울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언니가 하도 서글피 울기에 나도 옆에서 눈시울이 빨갛게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노랫말이 좀 웃겼다. 참을 수가 없도록 아파도 여자라 참아야 한다고? 이건 뭐야? '남들도 다 그렇게 참으니까 말 한마디 하지 말고 참고 살라'고? 에이~ 지금 다시 들어보니 그 노래 '남자가 원하는 여자의 일생'이었구나. 우리 엄마도 속상했을 때마다 이 노래를 듣고 위로받았겠다 싶다.

가게를 나오며 언니가 뒤를 돌아보면서 걱정스런 얼굴로 한 마디 한다.

"저기 맥주 마시는 여자들, 저녁 안 하고 이 시간에 저러구 있어도 안 쫓겨난다니? "
"저렇게 앉아서 술도 마시며 놀 줄도 알아야 안 쫓겨나는 거야."
"맞아, 나두 깡이 좀 있어야 하는데…"
"지금부터 깡 좀 길러. 새우깡만 기르지 말고."
"뭐, 새우깡을 길러? 아이고 너 웃긴다. 을순아, 니가 노는 세계는 영 다른 세상 같다. 여기도 우리나라 맞지?"

때 빼고 광 내고 웃고 마시고. 긴장이 풀어져 노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침 늦도록 둘이 잘 잤다. 아침으로 불고기 국물에 밥 한 그릇 다 말아서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언니가 언제 깡이 생겼는지 하루 더 놀다가고 싶단다. 이따 저녁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기로 하고는 동대문 시장도 구경하고 한약방에 가서 침도 맞고 남산도 걷고… 하여간 그동안 못했던 것 한꺼번에 만회라도 해볼 심산으로 알뜰하게 자알~ 놀았다.

"남편이 술만 마시면 때려... 화나면 도끼로 겁도 줘"

저녁으로 오장동 회냉면까지 한 그릇 먹은 다음 새우깡 좀 키워 봐야겠다며 언니가 낄낄대며 남편에게 전화를 거는데  몇 마디를 나누더니 갑자기 부들부들 몸을 떨며 전화기를 내려 놓는다. 식은땀을 흘리고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지금 당장 집에 가야 한단다. 파랗게 질린 입술을 열며 하는 말. 남편이 술만 마시면 때린단다. 너무 화가 날 때면 식탁에 도끼를 찍어 세워놓고는 겁을 준단다. 그간 셀 수도 없이 허리가 아프다며 입원했던 것이 다 남편한테 두들겨 맞아서 그런 것이라니. 세상에… 주위에 매 맞는 여자는 잘도 도와줬으면서 코앞에 있는 언니는 내가 몰랐구나.

"알았어, 내가 데려다줄게 걱정하지 마."

그 때가 여덟시던가. 깜깜한 밤에 시골길을 찾아가자니 도랑에 빠질까 무섭기도 하고 다 그 집이 그 집 같아 집 찾기도 힘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벌벌 떨며 우는 언니를 옆에 앉히고 운전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도착하고 보니 열한시가 좀 넘은 것  같다. 조용하다. 불도 다 꺼져 있다. 언니랑 차에서 내리면서 내가 소리쳤다.

"형부, 언니 겁주던 도끼 좀 보러왔습니다. 얼마나 무섭기에 언니가 이리도 쩔쩔매는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빨리 가지고 나와 보세요. 나도 좀 봅시다."
"언니가 하도 울어서 이 밤 중에 둘이서만 왔지만, 다음에 또 도끼 어쩌구 하면 경찰차 타고 올 터이니 그리 아세요. 경찰차 타보는 게 소원이면 한번 또 그래 봐요, 어디."

언니는 울면서 어머님 나오실까봐 걱정된다고 나보고 조용히 하라고 한다. 이참에 어머님이고 남편이고 둘 다 알아야 할 것 같아 내키는대로 소리쳤다. 막내아들의 성격이 하도 괴팍해 시어머님도 쩔쩔 맨단다. 시어머님이야 잘못 키운 자기의 업이겠지만 우리 언니는 뭔 죄인가. 한밤중 시골집 마당은 오페라 음악당 같아서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웃이 듣거나 말거나. 차라리 언니 남편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온 이웃에 소문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크게 떠들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원래 비겁해서 큰소리 치는 이에게는 꼼짝도 못하는 법.

시골엔 개가 많다. 동네 개들이 저마다 시끄럽게 이리 저리 짖어댄다. 언니가 이제 됐다며 빨리 가란다. 오늘은 도끼를 꺼낼 것 같지는 않고. 동네사람들이 깨서 나오기 전에 도망가야겠다 싶어서 얼른 차문을 열고는 시동을 걸었다. 이쯤 했으면 정신 차렸을 거다.

이런 난리가 있은 후. 언니 남편은 술을 아예 끊었단다. 음주 폭력은 술을 끊으면 폭력이 같이 없어진단다. 하지만 그 사건이 있은 후 언니 남편은 나를 피한다. 서울에 올라올 때도 늘 언니 혼자 온다. 지금은 순한 양 같다지만 지금도 난 그 사람 얼굴을 그리 보고 싶지 않다.

그 해 늦가을, 언니가 내게 김장을 담가서 김치냉장고에 가득 넣고도 남을 만큼 보내왔다.

"고마워, 을순아. 남편이 술을 완전히 끊은 것 같아. 매 안 맞고 사니 좋기는 한데 왠지 불안해. 나 같이 박복한 인간이 매 안 맞고 이리 편하게 살아도 되는 건지 불안해. 언젠가 또 때리겠지?"
"또 때리면 당장 나 불러. 아니 그 근처 경찰을 먼저 불러. 경찰이랑 말하는 동안 내가 당장 달려갈게. 그렇게 맞고 사는 거 아냐. 언니 몸 이제 그만 학대해."
"부모도 나를 버렸는데 남편이 때리는 게 어쩜 당연한 거 아냐?"
"웃기지마. 언니 부모도 뭔 특별한 피치 못할 사연이야 있었겠지만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았으니까 이제부터라도 남편의 사랑을 더 받아야 하는 거야. 그래야 인생이 공평하지. 또 때리면 헤어져. 내가 먹고 살 집 생각해볼게. 갈 곳 없다고 맞고 사는 거 절대 아냐."

덕분에 그 해 겨울은 시퍼런 이파리가 잔뜩 달린, 코가 찡하는 시골김치를 원 없이 먹어봤다.

장례식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오니 장시간의 운전 탓인지 허리가 너무 아프다. 신사동에 있는 단골 찜질방에 들러 지압을 받았다. 갑자기 언니 생각이 났다. 지압을 받고나서 눈물을 글썽이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누워서 핸드폰을 찾아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아프지 말고 장례식 잘 끝내. 이제 시어머니도 없는데 언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제발. 또 빌빌대고 살면 그 다음엔 난 몰라 정말. '나중에, 이거 끝내고, 저것만 해놓고'하면서 자꾸 뒤로 미루지 마. 인생은 기다려 주지 않아."

참~ 이상도 하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데 저렇게 착하게 사는 사람을 저리도 짓밟을 수가 있을까. 그런 복은 이승(this world)용이 아니라 저승(the next)용인가 보다.


태그:#아줌마, #매맞는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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