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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종이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우유 급식 신청서! 신청서와 함께 얼마 정도의 돈을 내면 부산우유에서 매일 우유를 학교로 배달해서 학교에서 먹게 한다는 것이다.

나도 신나서 집으로 가져가서 부모님께 보여주었다. 부모님은 우유 마시면 배탈난다고 하면서 신청서에 도장을 찍어 주지 않으셨다. 난 괜찮다는 호기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어렴풋이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매 끼니를 걱정하고 사는 우리 집이 무슨 수로 사치스럽게 학교에서 우유급식이나 하고 있겠는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던 우리들도 3학년이 되고 우유급식이 시작되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틈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2교시 마치고 당번 2명이 가서 소쿠리에 우유를 받아온다. 물론 당번은 돌아가면서 하기에 나도 먹지도 않을 우유를 타서 온 적도 있었다. 아침 밥을 먹고 왔지만 뛰어 놀다 보면 배가 고파지기 마련이다.

우유 급식을 하는 아이들은 삼각 우유를 들고 빨대로 힘차게 내려친다. 그러면 빨대가 플라스틱 포장지를 뚫고 들어가고 이내 우유냄새가 진동을 한다. 한 반에 55명 정도 되는 아이들 중에서 35명 정도가 급식을 했던 걸로 기억난다. 작은 삼각 우유가 아이들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미술시간에 준비물 안 가져 와서 한 시간 내내 뒤에 나가서 벌 받는 것도 힘든데 우유는 거기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같은 우유를 들고 서 있는 아이들은 어느새 친해졌고 일종의 계급 의식이 생겼다. 생일 파티 같은 것도 우유를 든 아이들끼리 행해졌고 우유를 들지 못한 나의 손과 더불어 같이 우유를 들지 못한 다른 아이들의 손도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웬지 모를 따돌림 같은 것이 느껴졌고 그것들이 쌓이다 보니 열등감으로 변해갔다.

그렇다고 같이 우유를 들지 못한 아이들과 가까이 하기도 싫었다. 내 모습도 초라했지만 그 아이들도 추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유를 들지 못한 동질감이 서로를 피하는 이상한 상황으로 이끌어 갔다. 선생님들도 우리들을 점점 더 무시하기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내지 못한 '국방성금 50원'으로 사람을 평가했고 가져오지 못하는 준비물 찰흙 때문에 아이들을 두들겨 팼다.

선생님한테 식사라도 초대했거나 50원 국방성금을 500원이라도 내는 아이는 반에서 영웅이 되었고 우리는 그저 박수쳐 주는 도구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들로서도 국방성금을 많이 걷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우유나 국방성금 같은 것들이 너무도 가혹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선생님들은 그런 약자들을 배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나갔지만 오세훈씨의 무상급식 반대론과 망국론을 되돌아 본다. 복지 포퓰리즘으로 가면 나라가 망하고 다음 세대에 그 빚을 넘긴다고 한다. 그러니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을 구분해서 차등급식을 하자고 한다. 하기야 수십억씩 있는 집이니 5만5000원 정도야 정말로 껌 값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그런 차등지급으로 아이들이 받는 상처, 그리고 일선에 서 있는 선생들이 자상함과 배려로 그 모든 것이 가려줄 수 있는 상황인지. 요즈음 선생들이라고 내가 다닐 때랑 차이가 있으리라 보지 않는다. 교사가 배려와 자상함이 필수 덕목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뽑은 교사들에게 몇 십년이 지났다고 변할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있는 사람들에게는 껌값인 5만5000원이 누군가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0년이 넘은 옛날 일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나한테는 큰 일이었고 상처였기 때문이다. 오세훈 씨는 자신이 마치 망국적 포퓰리즘에 단기필마로 맞서는 보수의 아이콘이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의 아들들이다.
▲ 민수와 현수 필자의 아들들이다.
ⓒ 김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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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한 번 정도로 그치는 일이 아니고 매일 되풀이 되는 일상 속에 열등감과 무력감이 쌓일 학생들이다. 그런 학생들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고 오래 남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난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김아무개 선생을. 똥기계도 못 될 놈이라며 국방성금 안 가져 왔다고 그렇게 두들겨 패던 그 사람을. 대체 내가 무슨 큰 잘 못을 했는지 몰랐고 그냥 무섭고 서러워서 책상에 엎드려서 울기만 했던 기억을.

선생이 날 그렇게 대하니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고 뻔히 내가 그 동네에 사는 데도 십 여년이 지나서 반창회를 하는데 나한테는 연락도 없었으니... 물론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 나는 보란듯이 떠나면서 나름의 복수를 하기는 했다.

지금도 와이프에게 가끔씩 이야기 한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아담한 키 170cm이지만 그 때 우유만 마셨어도 180cm는 되었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두 아들 놈한테는 매 끼니마다 강제적으로 우유를 마시게 한다. 이제는 아이들이 먼저 우유를 찾아서 마음이 흐뭇하다. 나도 정말 해보고 싶었다. 차가운 삼각 우유를 손 위에 올려 놓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빨대로 내리쳐서 시원하게 뚫고서 장난치듯 우유를 마시고 싶었다.

나에게는 30년 전 이야기이지만 이 시간도 현실로 맞서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절대로 그런 상처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선택을 한 서울 시민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다시는 잘못된 투표를 하지 말아서 괜찮은 시장을 뽑기를 바란다.


태그:#민수와 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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