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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0년생, 대한민국 남자에게 부여된 권리이자 의무였던 군 복무를 하려고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두 번 연거푸 떨어졌다. 그때가 1970년. 남은 속 터져 죽겠는데 '빠따'(몽둥이)를 맞지 않게 되었으니 좋겠다고 부러워하며 방법을 알려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징집 대상에서 빠지기 위해 족보를 꺼내놓고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가며 권력과 끈을 잡거나 가짜 진단서를 발급받기도 하고, 피하는 젊은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돈이 많거나 건강한 사람들 얘기이고 나처럼 몸이 부실한 사람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신장 177cm에 체중 57kg으로 갈치를 연상케 하는 왜소한 몸매였고, 다섯 살 때 했던 급성맹장수술 후유증으로 쌀 40kg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약했다. 키도 크고 짱구여서 두툼한 옷을 걸치면 '항우장사'처럼 보였지만, 속은 골병이 들어 있었다.

뇌물 써가면서 해병대 자원입대 하다

신체검사 결과는 제2보충역 편입. 관할 예비군 담당자는 해마다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겁(?) 주면서 봉투를 하나 만들어 상납하면 군 복무는 물론 예비군 훈련도 면제받게 해주겠다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뇌물이 보편화 되던 시절이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오기로 서방질한다'는 옛말이 있다. 내가 그 짝이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 끝에 공군도 해군도 아닌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예비군 담당자의 봉투 요구가 자존심은 물론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신경을 건드렸던 것. 오죽하면 하던 가게를 남에게 맡기고 군에 지원했겠는가.

전주 병무청에 갔더니 파견 나와 있던 훤칠한 키의 해병대 모병관이 서류를 내주며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가슴에 빨간 명찰을 단 모병관이 학교 다닐 때 봤던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나오는 꿈의 사나이 장동휘처럼 보였다.

군산-전주를 오가는 버스 안에서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보다 멋있었던 장동휘 닮은 모병관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금이야 모든 행정이 인터넷으로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자원입대에 필요한 서류 한 장도 버스를 두 시간 가까이 타고 가서 가져와야 했다. 

그러나 해병대 입대는 희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면접을 보고 발표 날 가보니 낙방했기 때문. 육군에서 탈락한 몸을 해병대에서 받아줄 리 없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더 큰 오기가 발동했다. 기필코 '쌔무가죽' 워커에 팔각모를 쓰고 빨간 명찰을 달겠다고 다짐했다.

70년대 이전 해병대는 가기도 어렵거니와 빠지기도 어려웠다. '해병대에 입대하면 거의 월남에 간다'는 소문이 퍼져 지원병 모집은 항상 정원에 미달되었다. 그럼에도 약한 체구는 받아주지 않았다. 또한, 육군에 입대했다가 해병대로 차출되기도 했는데 뇌물 아니면 빠져나올 약이 없었다. 

자격 미달인 사람이 귀신도 벌벌 떤다는 빨간 명찰을 달기 위해서는 뇌물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해서 다음 모집(당시엔 수시로 모집했으며 205기로 기억함) 때는 3500원을 들여 순금(99.9%) 한 돈짜리 '실반지'(Ring)를 예쁘게 포장해서 모병관에게 건네주었다. 

해병이 '청룡부대' 이름으로 처음 월남에 파병(1965년)될 때 사람들은 다들 사지로 죽으러 갔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용감하게 싸우고 돈도 벌어오는 모습이 '대한 뉴스'와 TV를 통해 홍보되면서 월남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노동자와 농사꾼은 물론 대학생 중에도 해병대 지원자가 늘어나던 때였다. 그러니 뇌물이 생겨날 수밖에.

순금 반지를 건넨 이유가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실반지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첫째는 500원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당시 해병대 입대 '공정가격'(?)이 4천 원이었다. 모병관은 내 눈치를 알아채고 웃으면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며칠 후 합격하여 꿈에 그리던 해병에 입대하게 되었다.

1971년 초여름으로 기억하는데 운영하던 가게는 함께 살던 막내 누님과 종업원에게 맡기고 전북 전주시 덕진에 있던 35사단으로 집결해서 야간열차에 올랐다. 모두 꿈만 같았다. 캄캄한 유리창으로는 자원입대를 극구 반대하던 어머니 얼굴이 그려지면서 두려움과 흥분이 교차했다.

이튿날 아침 경남 진해시에 있는 해병훈련소에 도착했다. 훈련소는 하사관 학교와 붙어 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인사계로 보이는 해병 부사관 한 명이 나오더니 "여러분의 입소를 환영한다"면서 "문 안으로 들어가면 첫 휴가 때까지 집에 갈 수 없다. 자원해서 왔지만, 밖으로 나오면 탈영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집 생각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기 바란다!"라고 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무게가 실려 있었다. 얘기가 끝나자 두 명이 앞으로 나갔고, 그들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가는 뒷모습을 보니 나도 겁이 났다. 제한된 공간에서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 그러나 힘들게 온 길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해병 훈련소에서의 이런저런 추억들

훈련소에 입소해서 손발톱을 깎고, 내복까지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벗은 옷은 고향 집으로 보낸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면서 진짜 '귀신 잡는 해병'이 된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귀신은 못 잡았다. 입소 15일 만에 귀가조처 되었기 때문. 그러나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은 몇 개 남겼다.

교관이 앞으로 나오더니 '빠따는 다섯 대 이하', '국민교육헌장 외우기', '군가 배우기' 등 훈련소 수칙과 우리가 할 일을 설명했다. 예상했던 일이어서 부담은 되지 않았다. 특히 가장 재미있게 부르던 군가 <도솔산의 노래>는 50대 초반까지도 완창을 했는데 지금은 앞부분을 까먹었다.

훈련소 생활을 시작해서 처음 놀란 것은 배가 고픈 군인들이 구정물 통에서 밥알을 건져 먹는다는 소문을 사실로 확인한 거였다. 라면이 일주일에 한 번씩 특식으로 나왔는데 훈련병들이 그릇을 씻는 수돗가에서 라면 찌꺼기를 손으로 집어먹는 모습을 목격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연병장 앞으로 바다가 펼쳐져 파도가 밀려올 때는 어렸을 때 뛰놀던 고향의 갯벌을 떠오르게 했다. 마침 제2연병장 확장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우리도 공사 현장에 동원되었는데 미끄러운 개흙이 묻은 돌을 나르다가 상대가 놓치는 바람에 오른발 복사뼈 부근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밤에 배가 고프면 PX로 달려가 빵을 사 먹었다. 그런데 거스름돈을 받지 못했다. 다른 훈련병들도 경험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해서 꾀를 낸 것이 "교관님이 빵 두 개만 사오래요!"라고 하니까 두말없이 내주었다. 그렇게 어렵게 산 빵은 냄새나는 화장실에 숨어서 먹었는데 그래도 꿀맛이었다.

초대 청룡부대장 이봉출 장군을 가까이서 뵈었던 기억도 새롭다. 어스름한 저녁, 연병장 공사를 마치고 쉬는데 검은 세단 한 대가 훈련소에 나타났다. 별 두 개가 반짝이는 모자를 쓰고 차에서 내리는데 장군의 표정이 호랑이 얼굴보다 무서우면서도 멋있게 보였다. 그해 가을인가, 연말인가 삼성 장군 진급 보도를 보고 마음으로 축하했던 기억도 새롭다.

몽둥이찜질 당하고 귀가조처 되다

우리 중대는 A 교관과 B 교관이 담담했다. 그중 B 교관은 훈시를 하거나 명령을 내릴 때마다 "나를 형님처럼 생각하고 대하라!"라는 말로 시작했다. 하루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형님!"이라고 불렀더니 얼굴색이 변하면서 구타를 했다. 예상했던 일이고 잘못의 대가니 억울하지 않았다.

진짜 사건은 이튿날 일어났다. 일과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B 교관이 자기 방으로 부르더니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야구 방망이질을 해댔다. 몇 대를 맞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야구 배트를 기술적으로 올려치는데 그의 눈에는 내 엉덩이가 야구공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정신을 잃고 의무실로 옮겨졌다.

의무실에서 이틀인가 있었는데 군의관에게 해병에 자원한 사연을 말했더니 군 복무를 면제받을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입대했느냐며 귀가조처 명령을 내렸다. 훈련복 차림으로 기차를 기다리던 당시 내 행색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초라하고 불쌍하게 그려진다.

육군에서 퇴짜 맞고, 뇌물을 바쳐가면서 '귀신 잡는 해병'이 되었다가 귀신같은 교관에게 몽둥이찜질만 당하고 귀가조처 되었다. 남에게 알리기 싫은 창피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진해 훈련소 시절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를 때가 있는데 악몽의 화신 같은 B 교관을 원망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뇌물도 구타도 그때는 다 그랬으니까.

덧붙이는 글 | '병영 구타의 추억' 응모 기사



태그:#해병대 입대, #뇌물, #귀가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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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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