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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김아무개 상병이 동료들을 향해 조준사격해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한 강화군 길상면 해병대 2사단 해안초소에서 부대원들을 태운 소형버스가 부대를 떠나고 있다.
 지난 4일 김아무개 상병이 동료들을 향해 조준사격해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한 강화군 길상면 해병대 2사단 해안초소에서 부대원들을 태운 소형버스가 부대를 떠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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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를 어둡고 고통스럽게 지배하고 있다. 하루도 이와 관련된 기사가 보도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피해자들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아이부터 중년을 넘은 어른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직업도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은 씻을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가해자들은 떳떳한 경우가 많다. 이유는 힘과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죄 지은 자가 더 떳떳한 참 더러운 세상이다.

성추행 범죄자들을 향한 분노가 나를 지배하는 이유는 법과 우리 사회 대부분 구성원들이 그것을 죄라고 단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4일 발생한 해병대 총기사건 이후 나는 1987년 군생활을 하면서 소나무에 매달려 100대를 맞고 '죽음'을 선택하려던 경험, 첫 근무에 철모와 개머리판으로 수 없었이 맞았던 따위를 고백했다.(☞ 관련기사 : 나무에 매달려 50대 구타... 끔찍했습니다)

구타는 군대에서 어느 정도 통용된 것이라 맞는 순간에는 참지 못할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조금 지나면 마음의 상처로는 잘 남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쓰라린, 영원히 내 마음에 묻어두려고 했던 상처가 있으니 바로 '성추행'이다. 오랫동안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나를 어둡게 지배하고 있다. 

고향 옆 동네 출신 말년 병장, 밤이 되자...

1987년 5월 3일 군 입대를 하고 6월 초 자대 배치를 받았다. 전쟁이 발발하면 국가지도자들이 전쟁을 지휘하는 벙커를 지키는 부대였다. 산을 뚫고 벙커를 만들었는데, 부대는 벙커 안을 지키는 본부중대와 산을 지키는 경비중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벙커 안을 지키는 본부중대에 배치되었다가 며칠 후 산을 지키는 경비중대에 배치되었다.

본부중대에서 경비중대로 재배치 받는 자리에서 선임병들이 "너 이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을 깨닫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는 제대를 2주일 정도 남겨 둔 말년 병장이 있었다. 군대에서는 같은 '군(郡)'과 '시(市)'가 아니라도 옆 군과 시도 같은 고향이다. 그 말년 병장 고향이 그랬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말년 병장 고향 근처라면 날개를 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가움은 '찰나'였다. 밤이 되자 박 병장은 자기 옆에 누우라고 하더니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자대 배치 받은 지 하루된 새파란 신병과 제대 2주 남은 말년 병장 차이는, 돈으로 따지면 빌 게이츠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학벌로 따지면 박사 학위 10개를 가진 사람과 'ㄱ'자도 읽지 못하는 사람 차이라고나 할까. 더 쉽게 말하면 말년 병장은 '하나님과 동기동창'이고, 신참은 '사람도 아니다'.

군대 내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군대 내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 에이앤디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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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수치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니 수치심을 느끼면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몸 만짐'은 그가 제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소대원들도 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박 병장님,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험'이 있는지만 물었다. 1987년 6월 다른 부대는 몰라도 내가 속한 '경비부대'는 그랬다.

그때는 사회에서도 '성추행'이라는 단어조차 없었으니 군대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요즘 언론보도를 보면서 그것이 나만의 수치스러운 상처가 아니고, 수많은 군인들이 그렇게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 기사가 보도될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박○○' 병장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런 경험은 심연에 자리잡은 트라우마를 지우려고 노력하는 나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께 절대 의존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극복했고 회복되었다.

18년 전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6년, 장모님께서 간경화로 처남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병문안을 갔다. 병문안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18년 전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다. 성추행, 성희롱, 성폭행 범법자들이 가해자들 앞에 오히려 더 떳떳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그는 나를 성추행했다는 사실조차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가해자란 그런 법이다.

대부분 남자들은 18년 만에 전우를 만났다면 "술 한잔하자"며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지 못했고, '반갑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18년 전 과거로 나를 다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성범죄를 당한 이들이 평생 상처로 남는 이유를 나 역시 18년 만에 확인했다.

더 충격은 그가 종교인으로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같은 종교인으로서 차마 그가 믿었던 종교가 무엇인는 밝히지 못하겠다. 그는 자기 종교집회에 나오는 신도들이 많다고 자랑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신도 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당신은 나에게 행한 그 죄를 신 앞에 무릎 꿇고 눈물로 회개했습니까?'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로 말미암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 아내와 함께 자기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기 자랑을 털어놓는 그. 더 이상을 말을 이을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아마 지금도 자기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모른 척하면서 그는 종교인으로서 거룩하게 살아갈 것이다.

물론 그를 정죄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신 앞에 섰을 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자기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면 그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종교인 아니,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피해자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병영구타의 추억' 응모 글입니다.



태그:#구타, #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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