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만약에 한국사> 표지.
 <만약에 한국사> 표지.
ⓒ 페이퍼로드

관련사진보기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분,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한반도의 현대사를 요동치게 만든 총탄들 가운데 그 충격과 울림이 가장 컸던 운명의 한 발이었다. 만약에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향했던 그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면, 과연 유신체제는 박정희가 자연사할 때까지 존속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박정희는 여전히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역사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만약에 한국사>는 이런 가정에 대한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사건의 전후와 경과를 면밀히 분석한다. 10·26은 충성경쟁에서 밀려난 김재규가 차지철에 대해 품었던 앙심이나 개인적인 권력욕 때문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전에 이미 유신체제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1978년 총선에서의 참패나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같은 정치적 요인뿐만 아니라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폭등과 기습적인 부가세 도입, 부동산 투기와 중화학공업 부실화 등 경제적 불안이 체제의 구조적인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런 총체적 위기로 인해 권력으로부터 돌아선 민심이 결국 부마항쟁으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는 박정희와 "데모 대원 1~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는 차지철의 강경한 반응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날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면 확산일로를 걷던 부마항쟁은 엄청난 유혈참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잠시 권력의 수명은 연장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광주에서의 학살에 이은 6·10항쟁에서 보듯 대대적인 시민의 저항에 부딪혀 유신체제도 몰락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박정희도 지금처럼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기억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딸이 지금과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김재규는 자신이 평생 존경하고 따르던 박정희의 육체를 죽임으로써, 오히려 박정희가 역사 속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 1980 보도사진연감

관련사진보기


가장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역사를 복기하다

<만약에 한국사>는 지난 백 년 동안 한국사의 흐름을 바꾼 순간들에 도발적인 '만약에'를 대입한다. 34개의 흥미진진한 가정을 통해 한국사의 결정적인 기로에 섰던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탐험한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갔던 길'의 역사적 의미를 진지하게 되묻는다. 이런 질문을 통해 앞으로 '가야 할 길'의 선택을 위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바둑기사들은 치열한 대국이 끝나도 복기에 공을 들인다. 승패와 상관없이 서로가 두었던 수백의 착점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건 악수나 패착을 찾아내고, 그 대목에서 최선의 수는 무엇이었을까를 탐구하는 일이다.

그들은 이런 복기를 통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될 뿐더러 실력도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때로는 대국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만약에'와 '그렇다면'을 반복하며 '그게 최선입니까?'를 묻는 것이다. <만약에 한국사>의 저자들이 가진 문제의식도 이 언저리에 있다. 

이 책에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에서 출발한 가정들도 있다. 이를테면,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이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다는 사실이다. 1945년의 분단보다 거의 반세기나 앞서 우리의 운명이 남의 손에 의해 분단될 뻔했다는 것이다. 상당히 성사 가능성이 높았던 이 방안은 결국 일본의 과욕 때문에 결렬되었고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만약에 한국사>는 1903년 당시 이 논의가 실제 현실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으로 책의 서두를 연다. 결론을 말하자면,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미국과 맞서기보다 협력하여 소련을 견제했으리라는 것이다. 어쩌면 미군과 일본 황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39도선을 넘어 소련군을 몰아내고, 성조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압록강변에 휘날렸을지도 모른다는 드라마틱한 장면까지 상상한다.

이승만 제거 작전을 주도했던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이승만.
 이승만 제거 작전을 주도했던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이승만.
ⓒ 국가기록원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걸어왔던 길 바로 옆에 다른 길도 있었다!

한편 이 책은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도,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문서에 근거하여 되짚어본다. '언제라도 결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의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은 미국의 뜻에 반해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한국 군부와 손잡고 제거하려는 작전이었다.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4·19를 건너뛰어 5·16이 일어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경제문제 해결을 강력히 요구했던 4·19를 겪지 않고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면, 폭동·암살 같은 정치 불안에다 끊임없는 군사쿠데타로 멍드는 '제3세계 정치'의 패턴이 한국에서도 반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사의 몇 안 되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평가한다.

한반도는 격동의 백 년을 살아왔다. 빛나는 성취만큼이나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다. 굴곡이 깊고 그늘도 짙다. 그러므로 그 역사의 행간에는 가정하고 싶은 사건이나 상황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본문에서 따온 다음 인용문들의 행간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방정국에서 좌우가 연대해서 분단을 피했다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우리가 겪은 냉전은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양김이 단일화했다면, 최소한 민주화 인사들의 야합과 변절은 보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10월 25일 고려대 운동장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한 두 사람의 시선이 당시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87년 10월 25일 고려대 운동장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한 두 사람의 시선이 당시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김대중도서관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 <만약에 한국사>(김연철 외 씀, 페이퍼로드 펴냄, 2011년, 14800원)
* 이 책은 같은 이름으로 <한겨례21>에 1년여 연재된 글들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엮은 것입니다.
* 이송원 기자는 <만약에 한국사>의 편집자입니다.



만약에 한국사 - '만약에'란 프리즘으로 재해석한 우리 역사

김연철.함규진.최용범.최성진 지음, 페이퍼로드(2011)


태그:#만약에 한국사, #현대사, #박정희, #이승만, #김대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