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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이 지난해 4월 7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천안함 침몰 희생자 추모 촛불집회가 추모형식을 빌린 미신고 불법집회라며 참가한 학생들을 강제연행하고 있다.(이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경찰들이 지난해 4월 7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천안함 침몰 희생자 추모 촛불집회가 추모형식을 빌린 미신고 불법집회라며 참가한 학생들을 강제연행하고 있다.(이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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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번 최규화, 접견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접견을 나가는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이번에는 제 이름이 불리니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궁금했습니다. '누굴까?' 교도관이 접견을 신청한 사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네줬습니다. 그리고… 눈앞이 하얘졌습니다. 누가 온 거냐고 묻는 같은 방 사람들의 물음에 답도 못하고, 누군가 빌려준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 교도관을 따라나섰습니다.

2002년 3월 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만 열아홉 살이던 저는 소매치기나 조폭 '유망주'들과 함께 서울구치소 소년수 혼거방 '14하12' 방에 수감돼 있었습니다. 그때는 '세계 경찰' 미국이 '동북아 파출소'인 한국에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강요하던 때였습니다. 마침 미국 대통령 부시가 한국에 온다고 했고, 한국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전쟁 놀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2월 18일에는 대학생들이 미국상공회의소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고, 이틀 뒤인 20일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격렬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대학교 2학년이 돼서 첫 후배들을 만나는 새내기새로배움터(신입생 오리엔테이션)를 하루 앞두고 있던 그날, 저는 서울 동대문 거리에서 경찰에 잡혔습니다.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등 열 개가 넘는 죄목을 줄줄이 달고, 저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습니다.

엄마는 '죄인'이 된 아들 보러 먼 길을 올라왔습니다

"철컹."

방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그 길고 복잡한 복도를 걸어 접견실까지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건네받은 쪽지를 다시 쳐다봤지만, 거기 적혀 있는 큰누나와 엄마의 이름도 눈물 때문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철창 건너편에는 아무도 없는 접견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습니다.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꽉 깨물며 눈물을 삼키려 애썼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문을 잡고 선 큰누나와 한 발 뒤에 서 있던 엄마…. 저와 눈이 마주치자, 엄마는 그대로 정신을 놓고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아들이 서울로 대학 간다고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길이 멀다고 입학식 때도 못 온 엄마였습니다. 저 졸업하면 그때는 꼭 올라와서 제 손 잡고 서울 구경 할 거라던 엄마는, 황토색 수의를 입고 '죄인'이 된 아들을 보러 그 먼 서울길을 올라왔습니다.

큰누나의 손에 질질 끌려오다시피 해서 겨우 엄마는 철창 건너편에 앉았습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 사람 다 눈물만 펑펑 쏟을 뿐…. 이따금 큰누나가 "엄마 정신 차려 봐라. 시간 간다. 정신 차려 봐라"하는 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저도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맥을 놓고 울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10분 남짓한 접견 시간이 다 지나갈 때쯤 엄마는 입을 열었습니다.

숨이 넘어갈 듯 울면서 하는 얘기를 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묻는지도 모르면서, 터져 나오는 울음 사이로 저도 "괜찮다", "나는 죄 없다", "금방 나간다" 하는 말만 겨우 뱉은 것 같습니다. 교도관이 접견 시간이 다 끝나간다고 말했을 때,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엄마를 불렀습니다.

"데모나 하고 감방이나 가는데 안 부끄럽나!"

해고 통보를 받은 홍익대학교 청소·경비용역 노동자들이 4일 오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문헌관 사무처를 점거한 채 처우 개선과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이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홍익대학교 청소·경비용역 노동자들이 4일 오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문헌관 사무처를 점거한 채 처우 개선과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이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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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는…… 내가…… 부끄럽나?"

왜 그렇게 물었는지 모릅니다. 순간 영화의 주인공이 됐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아니면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떠올랐거나…. 당연히 엄마가 "아이다(아니다). 엄마는 우리 아들 안 부끄럽다. 죄 없는 아들 잡아연(잡아넣은) 놈들이 나쁜 놈들이다!"하고 말해 주기를 기대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당하게 뒤돌아 접견실을 빠져나오는 상상을 했나 봅니다. 하지만.

"부끄럽다! 공부하라고 서울까지 대학 보내 놔띠만(놨더니) 데모나 하고 감방이나 가는데 안 부끄럽나!"

아…. 영화는 현실을 바탕으로 만든다는 말은 다 거짓말인가 봅니다. 눈물은 멎었지만, 다른 말은 더 못하고 그렇게 접견은 끝났습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교도관이 뭐라고 저를 위로했지만 그 말이 들릴 리가 없었습니다. 서운한 마음은 어느새 잊히고, '엄마는 또 그 먼 길을 울면서 내려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울음이 터져 나와서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다시 걸었다 하면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저는 석방됐습니다. 피의자를 계속 구속해 둘 건지 말 건지를 결정하는 구속적부심에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구속된 지 약 보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 뒤로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가, 2003년 2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사면·복권됐습니다.

잊을 만하면 걸려오는 정보과 형사들의 전화

이 이야기를 글로 쓰는 데 9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 이야기는 저한테나 엄마한테나 웃으면서 하기는 힘든 이야기입니다. 그 뒤로도 저는 군대에 끌려가거나 호적에서 삭제될 위기를 맞기도 했고, 엄마는 가족사진만 보면 울어서 식구들이 집에 있는 가족사진을 다 치워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잊을 만하면 "최규화 요새 착하게 삽니꺼?"하고 걸려 오는 정보과 형사들의 전화도 엄마를 또 울게 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명절에 식구들이 모이면 가끔 엄마가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합니다.

"규화, 자는(쟤는) 어릴 때는 속이라고는 안 썩였다. 얼마나 착했다꼬…. 나중에 한 방 크게 사고를 쳐서 그렇지…."

엄마의 이야기는 늘 거기서 멈춥니다. 식구들도 더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 이상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아직도 엄마한테는 너무도 잔인한 일이라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는 게 버겁고 앞길이 아득해질 때마다 저 자신한테 물어봤습니다. '나는 지금 엄마한테, 아들이 부끄럽냐고 물어볼 자신이 있나? 어떤 대답이 나올지 걱정하지 않고 그때처럼 당당하게 물어볼 자신이 있나?' 엄마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돼서, 당당하게 "지금도 내가 부끄럽나?"하고 다시 묻고 싶었습니다. 그날 엄마의 눈물은 그렇게 저를 다그쳤고, 세상 앞에 몇 번이나 무너진 저를 다시 일어서게 했습니다.

이제 몸보단 글로 싸우는 일을 더 많이 합니다

엄마는 지금도 서울에서 큰 집회가 있는 날이면 꼭 저한테 전화해서 "니 또 데모 가제? 거(거기) 가면 안 된데이" 하고 당부하십니다. 처음 고백하는 거지만, 솔직히 집회에 안 가려고 '뼁끼' 쓰고 있다가 엄마의 그런 기대(?)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워져서 뒤늦게 나간 적도 몇 번 있습니다.

이제 집회에 나가서 몸으로 싸우는 일보다는 지면 위에서 글로 싸우는 일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저를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제 제 나이 서른. 자신이야 있든 없든 한 번 물어볼 때가 되기는 했습니다. 그날처럼 다시 호통을 들을 각오를 하고 물어봐야겠네요.

"엄마! 엄마는 지금도 내가 부끄럽나?"

덧붙이는 글 | '제가 제일 불효자입니다' 응모글



태그:#불효자, #최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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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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