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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살고 싶어 하는데, 왜 못 사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 대답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동차도 다니지 못하는 산촌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에는 다 그렇게 못 살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만 특별히 가난하다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배가 고파 보았느냐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나는 배가 고파 보았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에 그랬고, 1970년에 입대한 군 생활도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까지가 그랬습니다. 1973년 봄에 제대하고 곧 혼인을 하였는데, 그때 부터는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는 경우를 말합니다. 집에 먹을 것이 많이 있는데, 지금 당장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픈 것은 여기서 말하는 배고픔이 아니지요. 나는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고픈 것, 참는 것, 높은 데 올라가서 느끼는 공포감 같은 것입니다.

 

찾아보면 많습니다. 차별대우 받는 것도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충분히 이해가 안 되지요. 무시당하는 것, 자존심 상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힘든 게 배고픈 것입니다. 생리적이고 원초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니까요.

 

가난은 나라도 구해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 가난을 물리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난에서 탈출하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잘 살 짓을 하는 것입니다. 잘 살 짓을 하면 가난도, 차별받고 무시당하는 것까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4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8년 1월 1일,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 가나안농군학교! 나는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가난을 극복하고 잘 사는 방법을 배웠고, 실천하여 성공하였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에 대하여는 신문이나 잡지, 방송을 통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나도 가서 교육을 받아야지라고 생각하였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입학하였습니다. 농촌운동을 하던 한 청년동지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지요.

 

가나안농군학교 15일간 교육비는 9800원이었습니다. 첫날 첫 시간은 지금 이사장으로 있는, 김종일 선생님의 오리엔테이션이었습니다. 교육기간 동안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사항을 설명 듣는 것이지요. 내용 중에는 이렇게 유치한 것들이었습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는 소변기에 바짝 다가서서 정조준해서 소변을 볼 것, 단 한 방울도 밖에 떨어지지 않게 오줌을 눌 것, 식사를 할 때는 밥알을 단 한 알도 남기지 않게 다 긁어 먹을 것, 쌀 알 한 알도 농부들의 손길을 88번이나 거쳐야 생산되는 소중한 생명의 음식이라는 것을 알 것, 이를 닦을 때는 치약을 꼭 필요한 만큼만 짜서 닦을 것"

 

이렇게 유치해 보이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그러면서도 매우 쉬운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울 수 있는 정도의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가벼운 흥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그런 강렬한 느낌이 온 몸을 휘감고 도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 딴에는 농촌운동가라고, 농촌지도자라고 떠들고 다니다 왔는데, 한 말씀 한 말씀이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씨알을 일깨웠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현대의 탁월한 농촌부흥의 지도자요, 생활혁명가인 일가 김용기 장로님의 가르침은, 나를 그렇게 흥분시키고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자랑 같지만 나는 그날 이후,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배운 대로 살아 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먼저, 밥을 먹을 때 단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긁어 먹었습니다 42년 동안. 치약도 조금 더 짜거나 덜 짜는 경우는 있었지만 꼭 필요한 만큼만 짜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42년 동안. 다른 말씀도 가르쳐 준 대로 살아보려도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치약 짜는 이야기는 설명이 더 필요합니다. 첫 날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아니 새벽에 4km구보를 하였습니다. 구보를 마치고 그 추운 날 새벽에 냉수로 세면을 하는데, 치약 사용법을 설명 듣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가 치약을 보기 좋게 짜가지고 이를 닦으려는 순간, 김용기 장로님 손에 낚아 채였습니다. 김용기 장로님께서 칫솔을 들고 한 말씀하였습니다.

 

"치약은 꼭 필요한 만큼만 짜서 이를 닦아야 합니다. 이를 닦는데 꼭 필요한 만큼이란 2cm가 필요하면 2cm를, 1cm만 짜도 이를 닦을 수 있으면 1cm만 짜야 합니다. 혹시 5mm만 짜도 닦을 수 있거든 5mm만 짜서 닦으라는 말입니다. 더 많이 짜면 낭비지요. 이 칫솔의 치약은 많습니까 적습니까?"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 아닙니까? '절약하라, 아껴서 써라!'고 아무리 외쳐도 공허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례를 들어가면서, 더구나 온 가족이 실천하면서 외치는 말씀에는 머리가 수그러지고, 감동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외쳤습니다.

 

"잘 살고 싶으면 잘 살 짓을 하고, 못 살고 싶으면 못살 짓을 하라!"

 

이 얼마나 우렁차고 분명하고 쉬운 웅변입니까? 근로 봉사 희생을 기치로 내걸고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가나안농군학교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는 살아있는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며, 적어도 4시간 이상 일하고 밥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1968년 1월!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배운 15일간! 내 인생의 보석 같은 학습시간이었습니다. 긴 인생으로 보면 매우 짧은 교육기간이었지만, 내 인생을 한 차원 높여준 황금 같은 배움의 기회였습니다.

 

배운 대로 살아가는 것, 아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길입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행복할 짓을 하고, 성공하고 싶으면 성공할 짓을 하면 됩니다. 밥알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은 전기 한등, 물 한 방울, 단 10분이라는 시간조차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잘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길을 42년간 걸어 왔습니다. 나는 지금 도시 생활 35년을 접고 귀촌하여, 대 자연 속에서 맑은 하늘과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홈페이지 www.happy.or.kr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잘살 짓과 못살 짓, #밥알 하나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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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시민 사회운동가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2007년 봄에 밀양의 종남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집을 짓고 귀촌하였습니다. 지금은 신앙생활, 글쓰기, 강연, 학습활동을 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고 있는 1948년생입니다. www.happ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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