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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제씨의 젊은 시절 모습.(1933년으로 추정) 그는 폭력과 전쟁을 혐오했던 평화주의자였고 한국이 거쳐온 역사를 매우 서글퍼했다.
 이용제씨의 젊은 시절 모습.(1933년으로 추정) 그는 폭력과 전쟁을 혐오했던 평화주의자였고 한국이 거쳐온 역사를 매우 서글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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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터널을 걸어야 했던 식민지 청년들

식민지 때 젊은 시절을 보냈던 청년 지식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일본의 식민지 점령을 견뎌냈고, 희망이라는 단어 한 자도 걸어놓을 수 없었던 그 길고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걸어갔을까?

36년의 긴 터널 끝에야 광복이라는 햇살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나름대로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했다.

그 중에 당시에는 멀고 낯설기만 한 유럽 땅에까지 발을 디뎌놓은 한국인들이 있었다. 1920년대 초, 21명의 젊은이들이 일본의 강압을 벗어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이 스물 한 명의 젊은이 중에 이용제씨가 있었다. 1896년 함흥 출신의 이씨는 어린 나이에 모친을 여의고 시베리아로 일을 찾아 떠난 아버지를 거의 만나지 못한 채 자식 없는 종조부 밑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함흥에서 소학교 선생을 지냈던 이씨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당시에는 총독부 산하의 토지지적계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당시 서울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신문(아마도 <매일신보>로 추측됨)의 통신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친구가 몰래 보내준 독립선언문을 며칠 동안 감추고 있다가 한 동료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런데 당시 한국 경찰 조수 하나가 눈치를 채고 이 동료 방을 뒤져 독립선언문을 발견함으로써 동료가 감옥신세를 지게 된다. 다행히 며칠 후에 감옥을 나온 동료가 그에게 일본의 감시가 그에게도 집중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해준다.

1920년 식민지 조선을 떠나 중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던 21명의 한국 유학생들. 맨 뒷줄 가운데 선 사람이 이용제씨.
 1920년 식민지 조선을 떠나 중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던 21명의 한국 유학생들. 맨 뒷줄 가운데 선 사람이 이용제씨.
ⓒ 이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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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명의 청년들, 중국 거쳐 프랑스로 가다 

일본인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는 당시 명망이 있던 법학교에 등록하게 되는데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를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자유롭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려고 생각하고 있던 그에게 감옥살이를 했던 동료가 의외의 제안을 한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어. 프랑스로 가는 거야. 우리가 상하이까지만 갈 수 있으면 거기서는 단체로 프랑스에 갈 수 있는 길이 있어."
"난 돈이 하나도 없는데."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해보는 거야."

이렇게 해서 1920년 6월 11일 이 둘은 서울을 떠나 일본인의 감시를 피해가며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많은 어려움 끝에 6월 20일 상하이에 도착한다. 당시 중국 정부는 제1차 대전을 겪은 프랑스의 인력난을 보충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와 협조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프랑스로 보내고 있었다.

3백여 명이 되는 중국인의 무리 속에는 21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용제씨와 그의 동료 한수룡씨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당시 중국 정부에서 발권해 준 중국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고 중국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이들을 프랑스로 보내는 일을 관장하는 단체에 등록하면 한국인이라도 중국여권과 중국이름을 발부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정부의 눈에는 이들도 다른 중국인과 다름이 없었다. 이들 젊은이들을 태운 선박은 11월 7일 상하이를 떠나 12월 4일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했다. 이들이 탄 배에는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총리가 되는 저우언라이(周恩來)도 타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 역시 1920년에 이런 방식으로 프랑스에 도착했던 것이다

프랑스에 도착한 21명의 한국인들 중에 많은 수가 미국으로 떠났고 유럽에서 학업을 할 수 있는 재력이 있는 사람은 독일로 떠났다. 동료 한수룡을 비롯하여 7-8명의 젊은이들이 독일의 뷔르츠부르크(Wurtzbourg)에 정착하여 학업을 이수한다.

한국인 21명과 300여명의 중국 젊은이들을 상하이에서 프랑스로 싣고 온 배.
 한국인 21명과 300여명의 중국 젊은이들을 상하이에서 프랑스로 싣고 온 배.

일하며 공부하며... 고달픈 유학 생활

돈 한푼 대줄 가족도 없었던 이용제씨는 파리에 남아 닥치는 대로 일하였다. 시골에 있는 제철소에서 2개월 동안 일을 하기도 했고 러시아로 일을 찾아 나섰다가 프랑스로 들어오게 된 한국인 노동자 15명과 함께 샴페인 지방의 소도시 쉬이프(Suippes)에 있는 한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으며 사환 등 입에 풀칠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다행히 1922년부터 6년 동안 파리 16구에 있는 한 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할 수 있게 되어 오전에만 병원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학교에 나가 불어를 배웠다. 병원에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세탁해 주면서 한 달에 100프랑을 벌었다.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공부했던 이씨의 동료 한수룡씨가 1925년 독일의 마르크가 붕괴되어 더 이상 생활이 어렵게 되자 파리에 돌아왔다.

나중에 연세대 교수가 된 정석해씨도 같이 돌아왔는데 이씨는 정석해씨와 김법린씨(이승만 정부시절에 문교부장관 역임)에게 자신이 일하고 있었던 병원의 일자리를 얻어준다. 한수룡씨는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의 유명 무용가 로와 퓔러의 시중꾼으로 들어갔는데 폐결핵을 알았던 퓔러로부터 폐결핵이 옮았다.

친구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이씨는 병원일을 그만두고 영화감독 레르비에의 시중꾼으로 들어갔다. 매달 600프랑 받는 월급으로 이씨는 친구의 병간호를 했는데 친구의 도움이 부담되었던 한수룡은 1928년 12월 병든 몸을 끌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36년 결핵으로 사망하는데 그의 아내도 결핵으로 사망한다.

당시 1920-30년대에도 한국의 유명인사들이 파리를 방문했다. 그 중에는 이용제씨의 친구였던 장덕수씨도 포함되었다. 상하이에서 여운형과 신한청년단 조직에 간여했고 동아일보의 진정한 창시자였던 그가 1928년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 이씨는 오페라 등 파리 구경을 시켜주었다. 이 당시에 이승만도 파리에 들렀는데 이씨는 그와 오전 한나절을 같이 보내기도 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에 이승만 일당에 의해 피살되었다.

홀로 파리에 남아 결혼... 해방된 조국은 분단되고

젊은 시절 이용제씨(앉은 사람)
 젊은 시절 이용제씨(앉은 사람)
ⓒ 이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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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속속 귀국하는 동안 이씨는 홀로 파리에 남았다. 굳이 돌아갈 고향도 가족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36년 5월 이씨는 마들렌느라는 이름의 프랑스 여자와 결혼을 하고 프랑스에서 가정을 꾸린다. 슬하에 3남3녀를 두었던 이씨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의 벌이로 가정생활을 꾸려가고 본인은 집에서 자식들을 거두며 살았다.

지난 7월 초에 기자가 인터뷰한 이씨의 3녀 미레이에 의하면 이씨가 나중에 운동요법사 자격증을 땄지만 프랑스 국적이 아니어서 직업활동을 펼 수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제2차 대전을 겪은 이씨. 전쟁이 끝나는가 했더니 이제는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 몸은 프랑스에 있지만 한시도 한국에서 마음이 떠나지 않았던 이씨는 당시 <르몽드>나 <리베라시옹>에서 전하는 한국 전쟁의 실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읽으면서 무척이나 괴로워하였다고 미레이는 전한다. 기자가 최근에 만난 이씨의 2남 앙투완느는 한국전쟁 이후로 아버지의 머리가 하얗게 셌다고 기억한다.

휴전이 되고 강대국에 의해 한국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자 이씨는 완전히 절망하게 된다. 그토록 싫어했던 일본의 식민지에서 놓여나는가 했는데 곧바로 미국의 앞잡이던 이승만에 의해 남한 정부가 설립되니 이씨로서는 이를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씨가 북한 정부를 인정한 것도 아니었다.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 이씨였지만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던 그는 돌아갈 조국이 없게 되었다. 이씨가 프랑스에 혼자 남아 고립된 생활을 하는 동안 프랑스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은 한국에 돌아가 정계, 학계에서 유명 인사들이 되었다.

60년대 중반쯤,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일부 한국 젊은이들은 전쟁으로 분할된 남북한 통일을 위해 노력했는데 이씨도 이 일에 같이 참여한다. 이들 중의 한 명과 함께 60세가 넘은 이씨는 어느 날 이제껏 한번도 입지 않았던 정장을 차려 입고 베를린으로 떠난다.

그는 왜 북한행을 포기했을까

지난 7월 초 인터뷰에 응해준 이용제씨의 3녀 미레이(66세). 자택 테라스에서. 아버지의 나라를 알기 위해 3년 전에 오빠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고 불어로 번역되는 한국 문학을 열심히 구독하고 있다.
 지난 7월 초 인터뷰에 응해준 이용제씨의 3녀 미레이(66세). 자택 테라스에서. 아버지의 나라를 알기 위해 3년 전에 오빠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고 불어로 번역되는 한국 문학을 열심히 구독하고 있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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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도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던 이씨는 베를린 행을 위해 여권을 타이완 여권으로 바꾸었고 스위스 제네바를 통해 서베를린에 도착한 후 동베를린으로 떠났다. 거기서 북한 관계자들을 만나 북한의 실상을 전해들은 이씨는 막연하게 동경했던 고향의 변질된 모습에 치를 떨고 다시 프랑스 가족에게로 돌아온다.

불행하게도 이씨는 자식들 아무에게도 자신이 이틀 동안 베를린에서 보고 겪은 일을 전하지 않았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무척 흥분한 상태로 베를린에서 돌아왔고 이들의 추측에 의하면 당시 이씨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소식도 묻고 가능하다면 북한 땅에도 발을 들여 고향의 모습을 눈에 담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결국 그는 북한 행을 포기하게 되는데 베를린에서 그는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이씨의 3녀 미레이는 아버지가 당시에 아예 북한으로 되돌아가 정착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60이 넘어 힘들게 내린 고국행을 번복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이상으로 갖고 있었던 사회주의 사상과 북한 공작원에 의해 서술되는 공산주의 북한의 실상의 갭이 하도 커서 유턴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딸 미레이의 추측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이씨는 북한에 남아있던 이복 여동생의 편지를 받게 되고 북한 공산당측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북한 신문을 받게 된다. 67년 한국에서는 동백림 사건이 시끄럽게 터지고 이씨는 이후 이 사건에 연루된 이응로 화백과 친분을 맺게된다.

언어학을 전공한 이씨는 언어에 재능이 뛰어나 불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수개 국의 언어를 구사했다. 당연히 한글에도 관심이 많았던 이씨는 언어학 교수의 조언대로 틈틈이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한글로 쓰여진 그의 원고는 이씨 사망 후 아내가 한 한국인에게 빌려주었는데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씨는 프랑스에서 평생을 살았어도 프랑스 국적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1986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사망 전까지 타이완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행동반경에도 제한이 있었지만 (당시 타이완 여권으로는 갈 수 없는 나라가 많았다) 이씨는 그 불편을 다 감수했다.

남북으로 분할된 한국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씨는 광복 이후 1대 주프랑스 공사인 공진항으로부터 남한 여권 발행을 권유 받았으나 거절했다. 프랑스에서 같이 공부하고 친분을 맺었던 공씨가 이승만파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게 못마땅했던 이씨는 공씨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한국이 반쪽으로 동강난 이상 남한여권도, 북한 여권도 가지지 않겠어." 이렇게 해서 공씨와 절교했다. 언젠가 남북이 통일이 되는 날 이씨는 한국 국적을 가지리라 생각했으나 그의 바람은 살아 생전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국문화 전수받지 못한 자식들, 한국에 큰 관심

이용제씨의 2남 앙투완느(64세)
 이용제씨의 2남 앙투완느(64세)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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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특이한 것은 이씨가 자식들에게 한글이나 한국의 문화를 전혀 인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한글을 가르쳐달라고 하면 이씨는 한글을 배우기 위해선 중국어를 미리 배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차일피일 미뤘다고 한다.

미레이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항상 프랑스 음식만을 만들어줬고 자신이 15세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김치를 담가주었다고 기억한다. 이씨의 2남 앙투완느는 아버지가 가끔 참깨가 들어간 깨강정을 해주었다고 기억한다.

외국인과의 결혼이 그리 흔하지 않았을 시절에, 특히 드물게 동양인 아빠를 가진 자기 아이들이 다른 프랑스 아이들처럼 자라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철저히 한국을 부정한 게 아닐까라는게 미레이 남편의 말이다.

결국 평생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불어를 모국어처럼 쓰게 되었어도 세월이 그의 동양 얼굴을 변화시키지 않듯이 이씨는 프랑스인도 아니며 한국인도 아닌 상태에서 평생을 보낸 셈이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이번 취재를 위해 기자는 자식 5명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인터뷰했는데 이들 모두가 한국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의 나라 한국, 비록 아버지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언어, 문화는 없어도 아버지는 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한국인의 피를 심어주었다.

셋째 딸 미레이는 아버지에게서 한글과 한글 문화를 배우지 못한 것이 무척 한이 된다고 한다. 대신 그녀는 번역되는 한국 문학 책을 혼자서 다 찾아 읽었고 이제서야 자신이 한국인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아버지 생전에는 한국에 관심이 없었던 다른 형제들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모두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레이는 오빠와 함께 3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고 언니 클로드는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올 3월에 북한을 방문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향인 함흥은 북한측이 원하지 않아 정작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이들 일행 중 하나가 몰래 카메라로 북한에서 본 것을 촬영했는데 이것이 오는 24일 프랑스 TV M6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클로드는 남한도 이미 방문했고 막내 아들 에티엔느도 한국에 다녀왔다. 미레이의 큰 딸은 외할아버지인 이씨의 영향으로 지금 중국에서 중국문화를 전공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1983년에 알렉상드르 기요메 한국학 연구자가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프랑스에 살았던 한국인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씨와 나눈 인터뷰 내용을 발췌했다. 그의 3녀인 미레이와 남편, 2남인 앙뜨완느가 실제로 들려준 사실과 나머지 자식들이 전화로 추가 덧붙인 내용도 곁들어 이 기사가 나올 수 있었다. 이 분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언젠가는 감동적인 이씨의 인터뷰 전체 내용이 한글로 번역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씨가 소장하고 있던 당시의 한국 관련 서적들이 가족들에 의해 보관되고 있는데 이것도 햇빛을 보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태그:#이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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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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