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구름 많고 흐린 날씨가 되레 경기하기엔 그만이다. 진명과 빠삐용이 기싸움에 돌입하고 우주들이 각자의 소에 기를 불어넣고 있다.
 구름 많고 흐린 날씨가 되레 경기하기엔 그만이다. 진명과 빠삐용이 기싸움에 돌입하고 우주들이 각자의 소에 기를 불어넣고 있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오늘(28일)은 의령 무전리 전통논경테마파크 민속경기장에서 오전 내내 소싸움을 구경했습니다. 직접 보기 전엔 흔히들 소싸움이 지루하고 시시할 거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놀고 먹는 사람을 소에 비유하듯, 게으르고 느린 짐승이란 이미지 때문일 텐데요. 하지만 600~700킬로그램이 넘는 근육질 소들이 펼치는 박빙 승부를 한 번이라도 본다면 아마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남해안 지역을 포함해 전국 각지에 호우주의보가 발령됐지만 다행히 구름 많고 바람만 불 뿐 비가 내리진 않았습니다. 사회자 말에 따르면 이런 날씨엔 소들이 5~10분 정도 더 싸울 힘을 얻는다는군요. 부채도 그늘도 필요없으니 구경꾼 입장에선 말할 나위 없고요.

힘겨루기에 들어간 두 마리 소. 20분 가까이 어느 쪽도 밀리지 않은 채 긴장감 넘치는 경기가 계속되었다.
 힘겨루기에 들어간 두 마리 소. 20분 가까이 어느 쪽도 밀리지 않은 채 긴장감 넘치는 경기가 계속되었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경기장 벤치에 들어선 순간 멋진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대치기가 제대로 걸린 소 한 마리가 몸을 반쯤 들린 채로 상대편 소에게 밀려 2미터여를 뒷걸음질치는 중이었습니다. 사람 운동인 씨름에 버금가는 박진감 넘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옥수수를 한창 먹고 있던 중이라 사진을 찍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경기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짜릿한 한판이 끝나고 다음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소 두 마리는 빨강과 파랑 유니폼을 입은 우주(소주인)에 이끌려 간격을 두고 위엄있게 들어옵니다. 본격적인 경기에 앞서 기싸움이 시작됩니다. 이때 바로 승부가 결정날 수도 있는데, 상대 기에 눌린 소가 곧장 싸움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치거나 줄행랑을 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격렬했던 대결을 입증하듯 두 마리 소의 이마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격렬했던 대결을 입증하듯 두 마리 소의 이마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진명'과 '빠삐용'. 체격부터 쟁쟁한 두 소는 싸우는 스타일도 비슷해 쉽게 승부가 나지 않을 거란 예측이었습니다. 예상대로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하던 녀석들은 섣불리 기술을 걸지 않고 머리를 맞댄 채 지루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무너지길 바라며 이따금씩 주고받는 뿔치기의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뿔이 부딪힐 때마다 둔중한 울림이 경기장을 채웠습니다. 

15분이 넘어서자 입담좋은 사회자의 표현을 빌리면 진명의 '수도꼭지'가 틀렸습니다. 머잖아 '잼'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기운이 빠져서 소변과 대변을 뿜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승패가 갈렸다는 분위기가 우세했는데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진명이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마지막까지 신중했던 빠삐용을 강력한 뿔치기로 제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경기가 끝나고 두 마리 소가 맞대고 있던 이마를 떼자 얼굴이 온통 핏빛이었습니다.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상대 소가 나오기 전 격렬한 쇼맨십으로 투지를 불태우는 똥장군.
 상대 소가 나오기 전 격렬한 쇼맨십으로 투지를 불태우는 똥장군.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다음은 이번 대회 들어 승승장구 하고 있는 '기대'와 체력전에 강한 '똥장군'. 이 녀석들도 만만찮은 박력이 있었는데 쇼맨십은 똥장군 쪽이 한 수 위인 듯 나오자마자 모래를 흩뿌리며 모랫바닥에 드러누울 듯 격렬한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기싸움입니다.

똥장군 이름의 유래가 재밌는데, '장군'은 그 아비에게서 왔고 '똥'은 녀석이 태어나길 한참을 기다리던 주인이 참다 못해 화장실 간 사이 나오고 만 데서 기인한 겁니다. '기대'는 생각하는 그대로고요. 여러모로 주목을 받은 건 똥장군이었지만 승리는 기대가 차지했습니다. 기력이 다한 듯 혀를 쭈욱 빼고 있는 똥장군을 우주가 다독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에 패한 똥장군을 우주가 다독이고 있다.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에 패한 똥장군을 우주가 다독이고 있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세 번째 선수는 범용과 장비. 이 경기는 함께 감상해 보시지요. 범용이는 전국 챔피언 대회에서 10회 이상 우승을 차지한 왕년의 스타입니다. 하지만 최근 1년 극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는데 사람으로 치면 환갑에 이른 나이라 하니 이해가 됩니다. 장비는 목찍기 장기를 가진 대표 젊은피입니다.

▲ 범용과 장비의 박빙 승부 경남 의령 전통논경테마파크 민속경기장에서 열리고 있는 소싸움 대회.
ⓒ 이명주

관련영상보기


초중반까진 범용이가 우세한 듯 했지만 결과는 장비의 승이었습니다. 모래판의 스타가 세대교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장비는 이번 대회 우승소로 점쳐지고 있어 내일 결승전에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다음은 덕칠과 기적. 그런데 이 판에 아찔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소의 곁에 서서 내내 기를 불어넣고 작전을 지시하던 기적의 우주가 소 엉덩이에 밀리는가 싶더니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를 틈타 덕칠이 기적을 한번 더 밀어붙였고 쓰러지는 기적의 배 아래 우주가 깔렸습니다. 놀란 객석에서 함성이 터지는 가운데 탄력받은 덕칠이 쓰러진 우주를 한번더 밟고 기적을 쫓았습니다.

소들의 몸싸움이 격렬해진 순간 우주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있다.
 소들의 몸싸움이 격렬해진 순간 우주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있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기적의 배 아래 우주가 깔려 있고 이 틈을 타 상대 선수인 덕칠이 한번더 맹공격을 퍼붓고 있다.
 기적의 배 아래 우주가 깔려 있고 이 틈을 타 상대 선수인 덕칠이 한번더 맹공격을 퍼붓고 있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긴장감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지만 다행히 우주가 금세 몸을 일으켰습니다.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사회자에 따르면 소가 부러 몸을 유연하게 움직여 우주를 살린 것이라 합니다. 하긴 수백 킬로그램의 소가 맘먹고 주저앉았으면 어찌 됐겠습니까. 소와 우주 사이에 삼자는 모르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요. 여튼 십년감수했습니다.

경기가 재개되고 끝으로 야신과 운암의 대결입니다. 야신은 이번 대회 최대 다크호스로 부상한 녀석이며 운암 또한 지구력과 맷집, 기술 삼박자를 고루 갖춘 실력자입니다. 명성답게 경기 시작과 함께 뿔치기로 정면승부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위력을 확인한 소들이 다시 뜸들이기에 들어갔습니다. 마치 싸울 의욕이 없는 듯 각자 다른 곳을 쳐다보다가 상대방의 경계심이 흐트러졌다 싶으면 한쪽이 뿔을 들이댔습니다. 이번판 또한 20여 분에 걸친 장기전이었는데 최종 승리는 '포커페이스'에 더 강했던 운암.

이렇게 해서 반나절 넘는 소싸움 구경을 마쳤습니다. 처음엔 동물학대나 생명존중에 반하는 행위로서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들의 투지와 기술, 우주와의 사이에서 보여준 사람과 짐승간의 연대와 의리 비슷한 걸 직접 보고 나니 섣부른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될 듯합니다.

대회는 이날 밤까지 계속되며 마지막 결승전은 내일입니다. 오늘 우승한 진명, 기대, 장비, 기적 등과 함께 전국의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일 예정이니 꼭 한번 와서 구경하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와 다음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태그:#국내여행, #공정여행, #소싸움, #의령, #다크호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