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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공부 뒷바라지는 작은형님이 해 주었다. 아버님은 뇌출혈이 와서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귀도 어둡고 눈도 어둡고, 걸음도 바르지 못하셨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는 것부터 내 책값과 용돈, 건호 우윳값까지 어느 것 하나 빼 놓지 않고 모두 다 작은형님이 보살펴 주었다.

큰형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달리 기댈 언덕이 없었다. 작은형님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 그 모든 일을 했고, 머리 좋은 막내가 반드시 고시에 합격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는 그가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노무현 자서전 표지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표지
ⓒ 돌베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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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었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기자가 엮은 노무현 인터뷰, 노무현이 끝까지 고민했던 진보의 미래, 그리고  성공과 좌절 등 그동안 읽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책들에 비해 가장 개인적인 속내와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가장 비공식적인 기록이라고 할까?

위에 인용해 놓은 책의 내용은 노무현의 가난했던 고시생 시절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읽고 지나쳤을 이 내용이 나에게는 이 책의 그리고 노무현의 인생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구절로 읽혔다.

이 구절 속에 나는 노무현을 규정했던 그 무엇인가를 추측하고, 노무현이 싸우고자 했던 그 무엇을 느끼기도 하고, 노무현의 치열했던 삶에서 부딪혔을 한계와 고민을 본다. 새 시대의 첫째가 되고 싶었으나, 구 시대의 막내가 될 수밖에 없어서 괴로웠던 노무현을 본다.

정치적으로 빚이 없었으나, 개인적으로 빚이 너무 많았던 노무현의 인생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나에게 주었던 기대 중에 하나는, 그가 정치적인 빚 없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3당 합당이라는 방법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던 김영삼 대통령, DJP연합이라는 현실적 선택으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할때 그는 정치적으로 속박될 만한 빚 없이 당선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정몽준 의원이 하루 전에 그를 매몰차게 차버림으로써 그가 빚이 없다는 걸 공인해주었다.

그렇게 그는 운신의 폭이 가장 자유로운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그가 그 자유를 제대로 사용했던것 같지 않다. 불리하다 못해 적대적인 언론환경, 비판과 반대자라기보다는 증오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줬던 반대정치세력들의 행태가 그의 정치적 자유를 속박했던 이유로 언급될 수 있겠지만. 여튼 누구보다 풍성했던 정치적 운신의 폭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건 지금도 매우 안타깝고 실망스럽기도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가 남긴 절제된 유서에서 그는 너무 많은 신세와 빚을 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떳떳한 인생, 부채가 없는 정치인생의 이면에 그는 그를 괴롭게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의 희생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세는 작은형님이 책값과 용돈 그리고 자녀의 우윳값까지 책임졌던 것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싸우고자했던 사람사는 세상- 빚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

나는 그런 그의 빚진 인생이 그가 싸우고 결국에 만들고자 했던 사람사는 세상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가난과 어려움을 국가가 보살펴주지 않고 가족이 책임져야 했던 그의 성장기 속에 나는 그가 싸우고자했던 것이 담겨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초선의원 시절 대정부질문에서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고, 억울해서 스스로 목숨은 끊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다. 가세가 기울었던 집안에서, 입신양명을 위한 눈물나는 고시공부, 그 과정 속에 작은형님의 희생을 먹고 살았던 그의 과거가 나는 이 꿈에 일조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나라가 그런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기회를 선사하는 나라가 나는 그의 권력의지를 부추긴 사람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미루어둔 채 형님과 누나 그리고 어머니의 피눈물나는 희생속에 공부한 우리의 과거를 살맛나는 새로운 시대로 만들고자 하는 꿈을 꿨다. 그는 그것을 '새로운 시대의 첫째'가 되는 일이라했다. 이런 그의 꿈을 정치개혁에 집중되어 이해되곤 하지만 나는 그의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꿈에 비추어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의 첫째가 될 수 없었다. 그도 그런 희생과 신세 속에 성공했던 구시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한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의 인생이 치열하게 기억되고 빛이 나는 건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끊임없이 깨부수려는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게 개고생해서 얻은 성공과 부와 명예와 힘을 잃어버리기 싫어 끼리끼리 해먹고, 계승하고, 지키려 발버둥치는 구시대의 힘이 막강한 시대에 이 구시대의 막내는 그가 그렇게 얻어낸 성공을 더 많은 사람의 것으로, 특별한 것이 아닌 것으로, 꿈꾸면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 과정 속에 그가 구시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받았을 압력과 고뇌, 혈연과 주위 사람들에게 느꼈을 개인적인 부담감을 나는 절절하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그가 먹고 자랐을 희생을 제공한 사람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고, 구시대에 속한 자신의 처지로 새로운 시대를 흔쾌하게 열어제끼지 못했을 그의 처지는 외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싸웠고, 고민했고, 치열하게 살았다. 그가 그렇게 치열했건만 여전히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나라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어떤 이의 희생을 먹고, 그것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은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는 가혹한 평가를 스스로에게 내린다.

계승과 반성의 동행이 그에 대한 예의

정치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빚이 없었던 당당한 정치인 노무현, 그러나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울만큼 괴로웠던 신세가 많아던 인간 노무현, 나는 그의 고뇌와 치열한 사람을 그의 자서전에서 발견한다. 나는 그가 당당한 정치인이었다는것은 자랑스럽고, 그의 개인적 처지와 한계가 애달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한계속에 끊임없이 부딪히고 싸웠던 그의 삶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정책적인 평가와 토론을 뒤로하고 한 사람의 인간이자 정치인으로서 그의 삶이 담겨있는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노무현의 치열함을 계승하고 그런 한계를 반성하고 넘어서려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그에 대해 남은자로서의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의 예의임을 느낀다.

그에게 그런 예의를 다하는 것이 그와 동시대를 산 덕에 그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노무현의 삶은 그렇게 나에게 눈물을 남긴다. 그가 자랑스럽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권오재의 믈로그 '오재의 화원' (vacsoj.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돌베개(2010)


태그:#노무현,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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