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교육문제에 관심이 많다. 스스로 한국교육의 피해자라는 피해의식이 사무쳐있고, 교육문제가 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할 때 교육과 언론은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개혁의 대상이고, 우리사회의 과제이다.

오늘 전국의 학교에서 '일제고사'라는 시험이 일제히 치러진다고 한다. 이미 과거의 일제고사에서 이를 반교육적 처사라면서 거부하고 현장견학 등의 대안을 모색했던 교사들은 징계의 폭풍을 한 차례 겪은바 있고, 이번에도 정부는 이 시험에 협조하지 않는 학생과 교사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감 선거 이후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교육감들의 등장으로 교육의 현안들은 이제 바야흐로 제대로된 논쟁과 토론의 대상이 되어 이슈가 되는 문제마다 새로운 사회적 합의와 규칙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국민으로부터 강요된 민주주의의 과제가 교육계에도 피하지 않고 다가왔다고나 할까?

경남교육연대는 일제고사를 치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그 결과를 11일 발표했다. 사진은 경남교육연대가 지난 7일 경상남도교육청 브리핑룸에서 연 기자회견 모습. 
출처 : 학생 83.1% "일제고사 뒤 스트레스 더 받는다" - 오마이뉴스
▲ 일제고사 경남교육연대는 일제고사를 치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그 결과를 11일 발표했다. 사진은 경남교육연대가 지난 7일 경상남도교육청 브리핑룸에서 연 기자회견 모습. 출처 : 학생 83.1% "일제고사 뒤 스트레스 더 받는다" - 오마이뉴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가진것은 교육열이 아니라 입시열

우리나라의 교육열, 교육에 대한 관심은 다시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과연 교육열이고, 교육에 대한 관심이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정말 우리는 교육에 관심이 있는가? 우리의 교육수준과 교육열은 정말 이 나라를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릴 만큼 높고 과열되어 있는가?

나는 좀 더 정확한 단어의 선택이 필요함을 느낀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그리고 우리들이 그토록 매달려왔고 매달릴 그 무언가가, 수많은 학생들이 성적표와 유서를 남겨놓은 채 아파트 옥상에서 스스로 떨어져 꽃다운 삶을 마감하는 일들이, 설문조사를 해보면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며 극심한 스트레스로 청소년기를 보내는 학생들의 삶이, 엄마들이 자녀들을 위해 파출부에 노래방 도우미도 마다하지 않는 이런 일들이 과연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의로부터 온 것일까?

나는 그것을 교육열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바로 입시열이고 입시에 대한 관심이고 입시를 통한 한풀이에 대한 열망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입시를 교육이라고 오해하고 착각해온 것은 아닌가? 그래서 교육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수많은 정책들도 어떻게 하면 교육을 잘하고 좋은 사람들을 키워낼 것인가가 아니라 입시제도를 이리고치고 저리고치고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는 입시정책의 변천사가 아니었던가. 우리가 그동안 고통받아오고, 목숨을 걸어오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경재해온 그 모든 것들의 결론은 교육이 아닌 입시가 아니었던가.

강준만교수의 책, 입시전쟁잔혹사(인물과 사상)
▲ 입시전쟁 잔혹사 강준만교수의 책, 입시전쟁잔혹사(인물과 사상)
ⓒ 인물과 사상

관련사진보기

교육이 아니라 입시에 온 가족이, 온 학교가, 온 나라가 포위되어 헤매어 온 과정을 보여주는 책, 강준만 교수의 <입시전쟁 잔혹사>다. 강 교수는 왕조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입신양명과 출세의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입시가 이 사회속에서 어떻게 그 위력을 유지하고 키워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성공'이라는 단어가 각자의 인생과 재능 그리고 여러가지 직업으로 다양하게 정의되지 못하고, 오로지 좋은 학교와 좋은 직업이라는 한 가지의 뜻으로만 개념정리되는 한국사회에서 입시는 그 성공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단 하나의 좁은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좁은길을 비집고 들어서서 성공의 영광을 쟁취한 사람은 그 열매를 잃어 버리지 않기 위해, 그 길에서 밀려나 탈락한 사람들은 열등감과 한을 곱씹으며 그 자녀들은 낙오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피를 말리고, 허리가 휘고, 신경이 곤두서고,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입시전쟁에 기꺼이 자신이 가진 대부분의 자원을 동원해 참전한다. 물론 이 좁은길에 들어서는 승리자들은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은 피를 흘리며 장렬하게 전사하지만.

그리고 그마저도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소리가 틀린 말이 아닐정도로 공부만 잘하면 기회가 열리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는데, 이제는 물좋은 곳에서만 용이나는 세상이 되어서 이 전쟁도 무기와 식량을 충분하게 보급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승리자가 되는 전쟁이 되버렸다.

교육문제는 '입시제도'로 풀수 없다

그렇다면 입시전쟁이라는 전쟁상황을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새로운 입시정책의 도입과 실험으로 해결될 문제인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입시의 문제는 단순한 입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시가 전쟁이 되어 버린 것은 입시가 단순한 입시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입시는 한 가족의 역량이 총동원되는 가족의 문제이며, 이 사회에서 성공과 출세를 재단하는 사회구조의 반영이다. 또한 입시 하나로 인생이 결정되는 인생 전체의 문제이고,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동안 열패감과 한에 몸서리치게하는 사회통합의 가장 큰 적이기도 하다.

그런 입시문제 앞에서 입시제도의 변형과 실험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건, 더 나아가 입시가 교육의 전부인양 교육문제의 해법은 입시제도에서 구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문제를 학교라는 단위에 국한된 좁은 의미의 교육문제로 푸는 것도 정확한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든다. 입시문제는 그것을 뛰어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강준만교수의 해법에 100% 동의할 수 없게 된다. 강준만 교수는 그의 주장을 서울대 폐지론 정도로 이해하는 '진보적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며, 서울대를 없애자는 게 아니라 좋은 직업 좋은 자리로 진출할 수 있는 서울대와 같은 학교들을 여러 개로 만들어 놓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하나의 학교가 공직과 기업의 중요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며,  미국에서도 아이비리그의 학교가 사회지도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학교들은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근거를 제시한다.

나는 강준만 교수의 의견이 매우 일리있고, 의미있는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좁은 길을 터서 좀 더 큰 길로 만들고, 길을 여러개로 만들어서 더 이상 좁은길로 들어간 것이 특권과 평생의 안락을 보장하는 보증수표가 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 대단해 보이고 실제로 대단한 위세가 되는 일이 더 이상 대단한 일이 아니게 만들어 보자는 주장은 분명히 귀를 기울이고, 실제적인 대안으로 모색해봐야할 의견이다.

성공의 정의를 여러개로 만드는 정책과 제도 만들어야

하지만 나는 여기서 부족한 무언가를 느낀다. 1% 밖에 못가는 길을 10%가 가도록 만들어놓는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줄세우기교육, 학벌위주의 사회가 어느 정도는 완화가 될 수 있겠지만 여전히 남아있을 90은 계속되는 불안과 열등감과 막혀있는 기회에 절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90%까지 포함한 대안과 정책을 만들어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모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정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길이 있을까? 100%가 다 대학에 가고 그 대학이 다 명문대학이 되면 문제가 해결될까. 그것은 아닌것 같다. 나는 입시를 중심으로 한 교육의 문제가 '성공'에 대한 단 하나의 정의만을 허용하는 데서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높은 자리에 가서, 평생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유일한 성공의 길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이 성공의 정의를 바꾸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길은 없어 보인다.

모두가 공부를 잘할 수 있는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가?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는가? 아니 질문을 바꾸어서 모두가 공부를 잘할 필요가 있는가? 좋은 대학에 갈 필요가 있는가? 높은 자리에 갈 필요가 있는가?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데 모두가 단 하나의 길을 가기위해 피터지게 싸우는 것에서 문제는 시작한다. 이것이 사회적 에너지를 무자비하게 낭비시키고 있고, 총기있는 젊은이들 수만명이 신림동과 노량진에 청춘을 바치는 원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을 쟁취해 내지 못하면 사람 취급을 못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시전쟁의 해법, 더 나아가 교육문제의 해법은 사람 취급을 받는 길을 다양화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좋은 대학을 단순히 여러개 만들어 놓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 것은 사람이란 존재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기이자, 재능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좋은 대학에 가고 그것이 다른 이에게 열등감이나, 패배감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는 해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성공의 정의를 다양화하는 것, 그렇다면 그것이 실제적인 정책과 사회제도로서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그 핵심은 임금과 복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잘해야만 사람 취급을 받고, 안락한 생활이 가능한 경제적 수입을 얻고,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는 사회에서는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공부를 하고, 운동을 잘하는 학생은 운동을 하고, 글쓰기를 잘하는 학생을 글을쓰고, 노래를 잘하는 학생을 노래를 하고 그렇게 하면 먹고살 수 있고, 존중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 핵심은 바로 복지와 임금이 아닐까? 얼마 전 기본적인 생활도 영위하기 힘든 경제적 상태에 놓여있는 연예인과 문학인들이 수만에 이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들에게는 그들만이 가진 재능과 꿈이 있는데 사회는 그것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너는 나처럼 살지말고 죽어라 공부해서 명문대에 꼭 가야한다"고 말하지 않을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자기의 재능을 따라,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임금과 복지가 보호되는 나라에서 똑같은 단 하나의 성공만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꿈을 썩히며 살아가는 일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의 임금이 같아지는 것은 있을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지만, 어떤일은 아무리 일해도 빈곤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단 한번의 시험으로 행운을 잡은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 입시라는 전쟁의 참혹한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성공의 길을 여러가지로 만들어내는 사회적 제도와 정책이 곧 교육문제와 입시문제의 해결이라는 생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해본다. 교육관료나 교육단체의 구성원들뿐 아니라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머리를 싸매고 교육문제를 고민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이상 교육이 입시에 포로가되고, 입시제도에 목매지 않고 진정 행복한 사람들을 길러내는 일이 될 수 있도록 본질적인 치유의 방법들을 다 같이 고민해 볼 때다. 일방적인 입시경재의 교육에 제동이 걸리고 있는 지금이 바로 그 기회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권오재의 블로그 '오재의 화원'(http://vacsoj.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입시전쟁 잔혹사 -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2009)


태그:#강준만, #교육, #입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