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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자리를 잡고 도서관 열람실 한가운데로 걸어 나오다 보면 양옆으로 책상 위에 진을 치듯 벌여 늘어선 책들, 책 받침대와 보온물통. 꼼꼼하게 자로 그었는지 흐트러짐 없는 밑줄. 형형색색의 색지, 빼곡한 메모까지 책상 위에는 팽팽한 긴장이 완강하다.

나무그늘에서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들리는 높고 맑은 목소리. 아마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이 무엇인가를 성공한 모양이었다. 잘됐다. 멋진데. 그녀는 정말로 자신이 가르친 학생의 어떤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맑고 높은 톤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의 맑고 높은 톤에서 오히려 약간의 슬픔이나 부러움 같은 여운이 느껴졌다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해진 것인가.

세상에 치인다고 느껴질 때, 힘이 좀 부친다고 느껴질 때, 맹자는 나에게 힘이 된다.

가진 것 없지만 뜨거운 신념 하나로 버티는 사내가 가진 것 때문에 생각 많아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내를 만났다. 한쪽은 직선(直) 한쪽은 곡선(枉), 그래서 둘은 대척점(對蹠點)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당연히 맹자와 양혜왕(梁惠王)의 첫 만남은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양혜왕과 맹자는 첫 번째 편인 <양혜왕 상>에서 정확히 3합(合)을 겨룬다. 이 최초의 접전(接戰)은 매우 격렬하여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겨준다. 먼저 주인이 객(客)을 맞는 태도부터 살펴보자.

어르신께서 천리(千里)를 멀다않고 예까지 오셨으니, 역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을는지요(叟不遠千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

어르신, 즉 수(叟)라 하였으니 일단 객(客)을 맞이하는 겸양(뭐, 깝죽이랄 수도 있고^^)이 인상적이고 솔깃해진 양혜왕의 관심이 만져질 듯하다. 그런데 주인, 양혜왕의 다음 말이 너무 경솔하였고 너무 빨랐다. 생각보다 말이 빠른 사람.

맹자와 양혜왕의 대화를 읽다보면 양혜왕은 아마 자기중심적이어서 생각이나 고민이 많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닫힌 회로에 갇혀 끊임없이 그 자리에서, 그 질문에서 맴도는 인물.

상대가 대답을 성심껏 해주면 만족하게 여겨 돌아갔다가 다시 고만고만한 질문들을 싸들고 돌아와서 다시 되묻는 피곤한 스타일.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은 너무 성급하게 자신이 원하는 대답만을 듣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너무 경솔하였고 너무 빨랐던 것.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너무나 유명하다.

왕은 하필 利를 말하십니까? 역시 仁義가 있을 뿐입니다.(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쉽게 말하자면 웃기지 말라는 소리. 양혜왕의 인사성 쨉에 맹자가 카운터펀치로 제대로 정색하고 받아쳐버린 셈.

이어지는 맹자의 화려하고도 치밀한 논박(論駁).

왕의 말대로 일단 나라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최고로 여긴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당연히 작게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덤벼들어 빼앗고자 하여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혼란상태가 되겠지요. 이러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기강이 무너지면 나라도 없게 되지요(上下交征利而國危矣). 서로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지요.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 이때 양혜왕의 상태는 거의 공황상태가 아니었을까?

기원전 인물인 맹자(B.C 372 - B.C 289)의 견해는 놀랍게도 서양사상사에서 최초의 사회계약론자로 알려진 홉스의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萬人)의 투쟁' 상태라는 견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1651년 발표된 <리바이어던>은 맹자와 거의 2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격(隔)하고 있음에도 둘은 똑같은 상황을 예견한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공통적으로 혼란상태를 상정하고도 한쪽은 성악설(性惡說)을, 한쪽은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는 점, 그리고 해결방식에 있어서 홉스가 아주 강력한 심판(절대군주)을 하나 설정하는 외부적이고 현실적인 해결방식이라면 맹자는 오직 인의(仁義) 즉 내부적이고 정신적인 해결방식을 제안한 것뿐이다.

따라서 어진사람이 제 부모를 유기(遺棄)하는 법 없고, 의로운 사람이 제 군주(君主)를 뒤로 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두들겼으니 이제 얼러줘야 할 시간이다. 정리하면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이 이익만 내세우다가는 망하게 되고 인의(仁義)를 바로 세우면 자연히 나라는 튼실해질 것.

중국인들의 독특한 미의식(美意識), 좌우상칭(左右相稱) 혹은 수미쌍관(首尾雙關). 맹자는 최초의 접전(接戰)에서의 승리를 자신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니 왕께서도 역시 인의(仁義)를 말해야 할 뿐, 하필 이(利)를 말하겠습니까(王亦曰仁義而已矣 何必曰利)?

손 한번 제대로 놀려보지도 못한 양혜왕, 맹자의 일방적인 승리. 게임 스코어 1 : 0.

양혜왕: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맹  자: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王曰何以利吾國 大夫曰何以利吾家士庶人曰何以利吾身上下交征利而國危矣萬乘之國殺其君者必千乘之家千乘之國殺其君者必百乘之家萬取千焉千取百焉不爲不多矣. 苟爲後義而先利不奪不厭. 未有仁而遺其親者也未有義而後其君者也. 王亦曰仁義而已矣何必曰利.<孟子 梁惠王 上 1章>

양혜왕은 맹자 앞에서 단 한 번, 깝죽(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거려보고는 그것으로 끝이다. 맹자는 결론부터 내지른 뒤(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벌어질 사례(大夫曰何以利吾家 士庶人曰何以利吾身 上下交征利而國危矣 萬乘之國殺其君者 必千乘之家 千乘之國殺其君者 必百乘之家)들을 숨 가쁘게 나열해나간다.  그 결과 난장판이 될 것(萬取千焉 千取百焉 不爲不多矣 苟爲後義而先利 不奪不厭)이라고 말한 뒤에, 다시 자신의 주장을 받쳐주는 사례를 든다(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따라서 왕께서는 인의(仁義)를 말하면 될 뿐이지 이를 말해서 무엇 하시겠냐고 되묻는 것이다. 문장의 처음과 끝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으며 정례와 반례를 들어서 탄탄한 논리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대목의 표현 역시 매우 간결하며 극명하다. 문법적으로도 어렵지 않아서 원문으로 읽어보다보면 댓구가 주는 묘한 리듬감, 그로 인한 상쾌한 속도감 역시 느껴지는 대목이다.

비록 구체적인 해결방안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맹자의 생각은 분명하다. 무엇이 우리 모두를, 이 세상을 편안케 할 것인가?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우리 모두는 결국 불행해질 것이며, 올바름(Justice)에 대한 '믿음'이나 '신념'이 너와 나, 그리고 우리전체를 살릴 것. 이것이 맹자가 우리들에게 건네주는 힘의 정체이다.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라는 철지난 망령이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2010년, 대한민국에서 <맹자>를 읽는다는 것. 이렇게 절절하게 읽혀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동시에 씁쓸한 일이다.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씨의 한탄이 예서 멀지 않으리.  


태그:#신자유주의, #조세희, #난작공, #홉스,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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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아들이며 누구들의 아빠. 학생이면서 가르치는 사람. 걷다가 생각하고 다시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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