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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소공원의 꼭짓점을 넘으면 나오는 가파른 내리막은 언제나 즐겁다. 자전거, 차 또는 걸어가는 그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이 길은 시원하게 펼쳐진 하늘과 바다가 있어서 더욱 즐거운 길이다.

 

하지만 겨울날에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하리라. 가벼운 몸, 가벼운 탈것은 여지없이 세찬 바람에 기우뚱거리니 말이다. 아직도 공항의 높은 벽을 벗어나지 못한 이 곳은 그래서 인가가 드물다. 비행기 소음은 덜한 편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 듯하다.

 

경사가 완만해질 즈음의 갯바위로 발을 옮긴다. 따뜻하거나 물살이 세지 않은 날에는 이곳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현대인이 여가 생활을 즐기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인 스쿠버 다이빙은 내게도 동경의 대상이다. 아름다운 제주도 바닷속을 찍어서 보여주는 여러 사진들은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바닷속을 헤엄치겠다는 꿈을 가슴에 담가놓게 하고 만 것이다.

 

이 '공기통을 짊어진 고둥'들은 물질하는 잠녀(해녀)와 대비되기도 한다. 다끄내에서 만났던 잠녀 할머니는 10킬로그램쯤 되는 무거운 납덩이를 달고 잠수를 한다. 여행을 자주 온다던 어떤 이가 관심있게 그 무게를 물었기 때문에 덩달아 알게 된 사실이었다. 스스로도 스쿠버를 하는데 비슷하다고 하며 소라와 전복을 할머니에게서 직접 사 시식하였다.

 

잠녀는 고무옷과 오리발을 입은 것을 빼면 옛날과 다름없는 '전통적' 방식을 고수한다. 그러고 보니 납덩어리를 달고 잠수하는 것도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적 방식'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숨을 참고 들어가서 일련의 일을 한 뒤에 물 위로 올라와 숨을 내쉬어 가다듬고 다시 물에 들어가는 것. 이는 고스란히 바다 위의 공기를 써서 들숨과 날숨을 스스로 힘으로 해결하는 것, 그야말로 자연에 몸담은 삶으로서 이루는 '자연적 방식'인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가장 오래 전에서부터 내려온 '채취'라는 인류의 전통적인 방식이 '물질'이라는 인간의 노동과 만나는 지점이 '제주도 해녀'의 시작점인 것이다.

 

길은 어느덧 가파르지 않은 평지에 다다른다. 예의 거무튀튀한 현무암 바위 위를 걸어서 가다보면 시멘트로 적당히 발라 굳힌 돌로 된 구조물이 보인다. 바로 옛 샘물터이다. 얕은 담장으로 에워놓은 곳이 두 군데 있다.

 

두 번째에 만나게 되는 샘물터를 보면 옆에도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인다. 뭍쪽에서 발라놓기 시작한 시멘트 길은 샘물터 입구쪽을 거쳐서 바다로 이어진다. 이 길은 바다를 일터로 삼은 사람들, 특히 잠녀(해녀)가 드나들기 좋으라고 만들어 놓은 길일 것이다.

 

바다에서 일을 마치고 이 곳으로 오는 젊은 잠녀의 동선을 잠깐만 상상해보자.

 

물질을 마친 잠녀는 온몸에서 물을 떨어뜨려 흔적을 남기며 길을 따라 들어온다. 입구에서 한 사람과 마주친다. 그이는 이미 이곳에서 몸을 씻고 나온 연배 높은 할망잠녀이다. 간단한 인사치레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선다. 할망잠녀는 길을 따라 뭍 쪽으로 오르고, 젊은 잠녀는 이제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있다. 물질 때 입었던 옷을 벗고 몸에 밴 짠물을 단물로 씻어낸다. 안에는 미리 들어와 옷을 빨고 있는 아낙이 몇 있어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웃느라 왁자지껄해진다.

 

그리고 모든 일을 마친 젊은 잠녀는 물에서 나와 입구 가에서 옷을 추스려 입고 입구를 거쳐 밖으로 나와 할망잠녀가 간 길을 따라 걸어 올라 마을로 향한다. 해가 도들오름 옆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았다.

 

물론 이 상상은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상상이다. 하지만, 샘물터라는 공간의 구조를 이용자 측면에서 살펴 그 기능이 어떠한지 드러내 보려는 의도로 적은 것이다.

 

이제 위의 상상을 기억하면서 샘물터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곳 샘물터는 낮은음자리표 같기도 하고 제대로 끝맺지않은 물음표 같기도 한 동심원 모양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전체가 둥근 느낌이다.

 

또한 다른 샘물터들 대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제주전통 가옥구조에서 보이는 '올레'의 기능적인 면을 데려다 온 것 같은 구조도 역시 갖추고 있다. 올레길이 사람들이 막바로 대문으로 들어와 내부 정면을 보는것이 아니라, 담장과 담장 사이로 몇 걸음이든 걸어 들어오는 일종의 휴식기를 거치고 나서야 실제 내부로 진입하게 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이곳도 그러하다.

 

 

샘물터는 담장을 탁 트이게 놓지 않고 담장 선의 처음과 끝부분을 겹쳐지게 놓아 바깥의 시선을 막는 것이다. 또한 이 겹쳐진 입구라는 공간은 사람에게도 처음이자 끝과 같다. 본격적인 내부에서의 활동을 이제 막 시작하려고 들어가는 것이거나 모두 끝마치고 나오는 것, 그래서 이곳에서 혹 외부인을 대면하더라도 이미 의복을 갖추었기 때문에 서로 낯 붉힐 일도 없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또한 돌담의 주기능인 바람막이 구실도 충실히 해내는 것은 굳이 설명할 나위 없는 일이다.

 

두 샘물터의 동심원이 보여주는 조형미를 마음에 담으며  길을 따라 더 내려가면 지붕도 얹고 잔돌로 주변을 잘 에워싸서 비교되는 샘물터가 나오는데 이 곳이 이른바 '몰래물'이다.

 

사라진 '옛 몰래물 마을(구사수동)' 사람들이 식수원으로 사용했던, 말하자면 '부근에 마을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몰래물'이라 부르는 이 곳은 그 이름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몰래물'은 '몰래+물'인데, '모래+샘물'이 된다. 샘물 주변 해안에 모래가 있었다는 것으로 풀이되며 지금도 주변에서 모래를 확인할 수는 있는데 그 분포 면적이 넓지는 않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보는 시각도 있다. 김순택이 [제주도사연구 5집(1996)]에 개재한 글에 따르면, 문씨 성을 쓰는 이가 와서 정착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는 '문래몰(문래마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문래몰>몰래몰>몰래물>사수동>구사수동' 쯤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오성찬이 [제주토속지명사전(민음사/1992)]에서 밝힌 이름도 몰래물이 아니라 '엉물'이다. 이 '엉물'이라는 이름은 지난 여행길에 언급한 적 있는 서한두기 언덕 끝에 있는 샘물과 이름이 같다. 그 이유는 '엉'이 '언덕',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 아래쪽이 굴처럼 안쪽으로 패인 언덕'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곳 서한두기 엉물은 지금은 방파제 공사로 변형되어 있으나 이를 알고 보면 원래 지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교통환경, 인구수, 거주 지역 따위의 여러 이유로 말미암아 이동 영역이 그리 많지 않았을 옛날의 눈으로 본다면 둘 다 그 마을에 유일한 '엉물'이란 이름이었을 것이고,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헷갈릴 뿐인 것이다.

 

이곳의 엉물은 그래서 '엉물동산', 또는 줄여서 '물동산'이라 부르는 언덕을 뒤에 두고 있다.  현재는 다끄내마을 사람들처럼 이곳 몰래물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비도 세우고 쉼터로 단장해 놓은 상태이다.

 

 

다시 김순택의 글을 보면, 이 '엉물' 말고 위에서 이미 살폈던 동심원 모양의 샘물터 2곳은 '용다리새미'라는 이름이 붙는다. '새미'는 '샘'을 말하는 것이고, 앞에 붙은 '용다리'는 '나병을 앓는 환자', 곧 '한센병'을 앓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리'는 어떤 말의 뒤에 붙어 '--인 사람'으로 쓰인다. 예로, '간세다리'는 '매우 게으른 사람'이란 뜻이다. 종합하면, '나병 환자들의 샘'으로 뜻하고 불렀던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선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몰래물 마을은 1630년쯤에 생겼고, 이 때는 1445년이니 마을 형성시기보다 200여년이나 앞서 일어났던 일이다. 당시 제주 목사(안무사도 겸함)인 기 건이 이 부근을 지나다 신음소리를 듣게되어 살펴보니 나병 환자였다. 전염성이 있는 이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 손 쓸 방법이 없는 당시 의료환경에서는 그 부모일지라도 이렇게 내다버리는 게 상책이었던 구슬픈 시절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세종실록(1428년 8월 30일자)에 기록된 바가 있는데, '사노(私奴)인 일동이란 사람이 그의 아내와 함께 전 남편의 아들을 살해한 바가 있고, 또 나병에 걸린 아내의 딸을 언덕에서 떨어뜨려 죽였기에 마땅한 벌을 준다'는 것이다. 그 언덕이 이 '엉물동산'이라고 추정하고, 그 위쪽 '옛 몰래물마을'이 있던 일대를 '벵막이모르(병막이마루)'라 적고 있다.

 

기 건 목사는 곧 본격적인 구제에 뛰어들었다. 뒤에 이름 붙었을 '벵막이모르'일대에 '구질막'을 지어 환자들을 살게 한 뒤, 도둑놈의지팡이(고삼) 뿌리를 약으로 하고, 바닷물로 해수목욕법을 행한 뒤에 '용다리새미'에서 다시 샘물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며 종합적으로 병을 다스리게 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을 보살피는 데에는 의생과 승려에게 군역 면제와 보수 지급이라는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

 

 

글을 쓴 김순택에 따르면, 이는 오늘날의 '공중보건의제도' 따위와 같은 상당히 진보적인 의료정책을 시행한 것이며 그 치료 효과도 좋았다. 세종실록 27년 11월 6일자에 '69명 중 45명이 나았다'고 한 기록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2년의 재임기간을 마치고 그가 이곳을 떠난 뒤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아쉬워했다.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진 인물인 제주목사 기 건. 한없이 낮은 소외 계층의 사람들을 거두어 진심과 정성으로 돌본 그 모습, 오늘날 탐욕에 찌든 혀를 낼름거리는 위정자들이 그 혀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배워 실천해야 할 교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쩄든 '용다리새미'는 '엉물'과 달리 손을 대지 않아서 다행히도(?) 그리 멀지는 않으나 옛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다만 안에는 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돌들이 마구 놓여 폐허와도 같은 상태이다.

 

 

아마도 이 구슬프고 아름다운 역사 현장을 품고 있는 '용다리새미'는 다시는 울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인가 보다.


태그:#용다리새미, #몰래물, #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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