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자식을 키운다는 것 참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몸부림 치는 사춘기 자식과 제2의 사춘기로 인생을 방황하는 부모가 만나면 그곳에서 튀는 불꽃은 최고 절정에 이릅니다.

큰딸과 그 최고 절정을 경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다 지나갔다고도 보지 않는데 둘째와 새로운 절정을 경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요즘 까칠한 둘째. 삐딱함에는 도가 없는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까 말까 간당간당합니다.

사춘기 딸이 쓴 팬픽 보고 기절할 뻔하다

둘째가 여행을 간 사이 그 방에 들어갔다가 전 기절을 했습니다. 딸이 뜯어놓고 간 공책에는 요상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뭘 보고 배껴 쓴 것으로 보이는데 요즘 아이들이 하는 팬픽이라는 것이랍니다. 저도 '팬픽'이라는 것이 뭔지 이번에서야 알았습니다. 유명한 가수들을 가지고 소설화한 것인데 내용이 아주 훌륭하십니다. 코믹한 것도 있다는데 딸 방에서 나온 것은 여성을 상품화 하는 연애소설류입니다.

처음엔 엄청 화가 나고 열을 받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여행에서 돌아오면 '넌 죽었어'라고 씩씩거리다 생각하니 '사춘기'에 괜히 잘못 건드리면 벌집 쑤시는 격이 될 것 같아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냥 모른 척 할까도 생각했는데 그건 도저히 제 성질에 안 되겠기에 큰딸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아무래도 얼마 전까지 사춘기를 겪었고, 저보다는 요즘 아이들의 사고방식을 더 이해하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엄마. 다 지나갈 거야."
"야, 당연히 지나가야지. 안 지나가면 니 엄마 심장 터져 죽어. 어떻게 지나가느냐가 문제지."

큰딸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테니 문제 삼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큰딸 말대로 다 지나가겠지요. 큰딸도 안 지나갈 것 같더니 지나가고 있는 걸 보면 크게 걱정은 안 합니다. 그러나 지나갈 때 가더라도 그 과정에서 서로가 상처를 최대한 주지 않으면서 지나가게 하고 싶다는 게 제 고민이지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에 기울었습니다. 청소년기에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야 하는데 여성을 상품화 하는 그런 내용은 맞지 않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나 더러 엄마랑 한편이 되자는 거야?

"결심했어. 오늘 니 동생 오면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저녁 먹으며 말할 테니까 니가 도와줘."
"뭘 도와줘? "

"분위기를 은근하게 맞춰서 나를 지원해 주는거지."
"나더러 지금 한편이 되자는 거야?"

"한편이 되자는 게 아니라 니 동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거지."
"글쎄......"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딸을 맞이하러 터미널에 갔습니다. 큰딸과 눈짓으로 무언의 작전을 짜고 괜찮다 싶은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스파게티와 샌드위치, 녹차라떼, 핫초코를 시켜놓고 어떻게 말을 할까 망설이는데 큰딸이 시작하라고 눈치를 자꾸 줍니다.

"저기... 팬픽이 뭐야?"
"왜?"(당황하는 눈빛입니다)

"니 방에서 봤어. 어디서 보고 그런 내용을 써놓은 거야?"(돌려서 말을 못합니다)
"**가 불러줘서 썼어. 이제 안해. 그렇잖아도 버릴 거였어."

답하는 딸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그 눈물의 의미가 뭘까. 엄마가 자기 방에 들어와서 자기 물건을 봤다는 억울함도 들어있고, 들켜서 창피함도 들어있고, 기분 좋게 카페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 짜증도 들어 있고, 아주 복합적으로 보이는 눈물입니다.

"근데, 엄마 생각에는 말이야......"

제 딴에는 아주 교양 있는 부모가 돼서 조심스럽게 딸의 마음에 상처를 안 주려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큰딸이 제게 전화가 온다고 휴대전화를 주는데 웬걸 큰딸의 번호가 찍혀 있었습니다. 

"야, 니가 나한테 전화한 거잖아?"
"엄마. 아니거든"(큰딸이 당황합니다)

'심문을 멈추세요'라는 딸의 문자

심문하는 것 같다는 딸의 문자
 심문하는 것 같다는 딸의 문자
ⓒ 권영숙

관련사진보기

헉. 눈치가 이렇게 없어서야. 이어서 날라온 '심문하는 것 같다'는 딸의 문자. 바로 알아채고 화제를 돌렸습니다. 화살을 돌릴 곳이 없으니 큰딸에게 방학에 뭐 하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큰딸도 제 의도를 알았는지, 아님 방학이 고민되었는지, 현재 자신의 고민을 말합니다. 

큰딸에게 충분히 놀고, 충분히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서 방학에 해보라고 했습니다. 2년 뒤 사회로 나오기 전에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 다 해보라고 말이지요. 학생 신분일 때는 엄마가 얼마든지 지원을 해주지만 일단 사회에 나오면 알아서 해야 하니 최대한 엄마의 경제력을 활용할 수 있을 때 활용하라고 충고해줬습니다. 딸이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둘째 딸과 이야기하는 중에 '화'란 놈이 여기저기서 툭툭 올라왔습니다. 그때마다 화내지 않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엄마 기분이 나쁘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아이에게 말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첫째 딸을 통해 알았습니다. 큰 딸에게는 참고 말을 안 하다가 한꺼번에 폭발해서 싸움이 크게 일어났었기에 둘째에게는 감정표현을 솔직하게 합니다. 

"엄마, 생각보다 심하다. 엄마가 아까 성질 안 내는 거 보고 수행이 좀 됐군 생각했어."
"야. 말도 마라. 내 속은 썩는다."

집에 돌아와서도 큰딸과 저는 둘째가 '쌩할' 때마다 꿀밤 주는 시늉을 하면서 우리끼리 동지처럼 웃습니다. 둘째 딸은 그것도 모르고 잔소리를 안하는 엄마와 언니를 승리자의 눈으로 보는 듯합니다. 

참 그나마 다행인 건 큰딸이 제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니 부모의 권위로 아이를 누르는 일은 줄어듭니다. 사춘기를 혹독히 지나고 있는 큰딸은 제게 위로를, 동생에게는 이해하는 마음을 써주니 집이 평안해집니다. 그날 간 카페에서 딸이 찍은 사진입니다. 맛보아 주세요~

딸이 마신 핫초코
 딸이 마신 핫초코
ⓒ 권영숙

관련사진보기


사춘기 딸이 좋아하는 녹차라떼
 사춘기 딸이 좋아하는 녹차라떼
ⓒ 권영숙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사춘기, #팬픽, #초딩, #대안학교, #여행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