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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다운타운에 위치한 이모네 술집은 그곳 한국 술집 중 가장 유명하다.
 시애틀 다운타운에 위치한 이모네 술집은 그곳 한국 술집 중 가장 유명하다.
ⓒ 손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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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추운 겨울, 6개월 간 아르바이트로 힘들게 번 돈과 부모님이 주신 돈을 모아 미국 시애틀 어학연수 길에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외국에 나가는 것이어서, 인천공항 국제선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내 심장박동은 급격히 빨라졌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보이는 구름마저도 모두 신기해 한장 한장 소중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그로부터 1개월 뒤 벌어질 웃지 못할 참담한 굴욕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술자리도 잦은 편이다. 가장 큰 단점은 술과 분위기에 취하면 주량을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당시 환율을 따졌을 때 미국에서 맥주나 위스키를 직접 사서 마실 경우, 그 가격은 한국보다 더 쌌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외국친구들과 한국보다 싼 가격으로 집에서 술자리를 함께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 꿈만 같은 일이었다.

사건은 유학길에 오른 후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벌어졌다. 나를 포함해 각국에서 온 같은 반 친구들 10명이 함께 술자리를 할 기회가 생겼다. 다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주로 돌아가며 서로의 집에서 술을 마셨지만, 그날은 한 친구가 며칠 뒤 자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이라서 송별회의 명목으로 특별히 한국 술집에서 모인 것이다.

고추장군, 와사비양, 춘장군, 버터양 등등 모두를 다함께, 또 가장 빠르게 융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촉매제는 무엇이겠는가? 역시 술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깨주는 신비의 묘약이었다. 나는 주종을 가리지 않지만, 타국에서 마시는 소주는 그 가격이 비쌈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향수를 자극했다. 거기에 '애국심'이라는 요소도 더해져 한국에서보다 더 소주에 끌렸다.

시애틀서 만취한 내가 택시 타고 간 곳

미국 워싱턴주에서는 술집에서도 통째로 술을 팔 수가 없고, 잔으로만 팔게 되어 있다. 병째로 팔면 손님들이 술을 많이 마시고 빨리 취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 술집에서도 소주 또한 병으로 내어 놓는 것이 금지되어 작은 호리병 같은 곳에 담겨 나온다.
 미국 워싱턴주에서는 술집에서도 통째로 술을 팔 수가 없고, 잔으로만 팔게 되어 있다. 병째로 팔면 손님들이 술을 많이 마시고 빨리 취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 술집에서도 소주 또한 병으로 내어 놓는 것이 금지되어 작은 호리병 같은 곳에 담겨 나온다.
ⓒ 손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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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시내에서 한국인들과 교포들이 많이 찾는 '이모네'라는 술집에 친구들과 함께 들어섰다. 한국의 상징이기도 한 '소주'를 외국 친구들에게 설명하며 한 잔 두 잔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평소 친구들의 술 문화 교류 현장에서, 앞에 나서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하는 편이다. 그러니 그날 홈경기장이나 다름없는 한국 술집에서는 오죽했을까?

한국 친구들 몇 명이 주축이 돼 한국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369게임부터 일명 '소맥'이라 불리는 폭탄주를 제조해 한 잔씩 돌리는 작업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고, 분위기는 업될 대로 됐다. 처음엔 소주의 도수가 그리 높지 않다고 콧방귀 뀌던 각국 친구들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 둘씩 눈이 풀려갔다.

밤 9시경 술자리가 시작되었는데 어느덧 시각은 새벽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워싱턴주 법에 따라서 새벽 2시에 모든 술집과 편의점 등에서 술판매가 금지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술집도 2시 30분 즈음 문을 닫는다. 우리 모임 멤버들도 하나, 둘 귀가를 하기 시작했다. 술값을 1/n로 나누어 지불하고 나도 자리를 일어섰다.

한창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하며 떠들고 즐길 때는 몰랐는데, 계산을 하고 일어나니 머리가 핑 돌았다. 역시나, 주량을 초과한 것이다. 택시를 분명히 잡아탔는데 이후 기억이 없다. 깜깜하다. 택시 기사에게 큰 소리로 어디를 가자고 외쳐댄 것 같은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푹신한 침대 위에 대(大)자로 뻗어있는 나를 발견했다. 럭셔리한 인테리어와 정돈된 커텐, TV, 객실 안내책자… 한 눈에 봐도 호텔이었다. 그것도 시애틀에서 가장 고급 호텔 중 하나인 힐튼 호텔이었다. '내가 왜 지금 여기에 누워 있는걸까?' 내 동공은 사정없이 급격히 확대되었고, 3병은 족히 마셔 '멍'해졌던 내 머리도 해머로 맞은 듯한 충격에 의해 단숨에 깨났다.

1시간 만에 사라진 지갑 속 100달러짜리 6장

미국 시애틀 시내에 있는 힐튼호텔 입구
 미국 시애틀 시내에 있는 힐튼호텔 입구
ⓒ 힐튼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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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보니 새벽 3시였다. 2시에 분명히 택시를 잡아탄 것까지 기억 났는데, 1시간 사이에 내가 집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곰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렴풋이 라운지 호텔직원과 대화를 나눈 것이 끊긴 필름 조각이 되어 띄엄띄엄 스쳐 지나갔다. 미친듯이 주머니의 지갑을 확인해 보니 100달러짜리 6장이 비어 있다. '아, X됐다.' 곧장 1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당시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지만,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하필이면, 왜 한 달 용돈을 그날 모두 찾아 지갑에 넣어두었을까?'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내가 가진 영단어와 표현을 모조리 동원하여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와는 달리 호텔직원의 표정은 얄밉도록 부드럽고 친절하고 차분했다. 그리고 내가 deposit(보증금) 150달러를 내고, 힐튼 호텔에서 최고급 방을 요구하여 423달러 짜리 방을 달라고 해서 내준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객실 안 냉장고 미니바에 진열되어 있는 미니어처 양주 2병도 다 마신 것 아닌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저는 정말로 이성이 없고 만취한 상태였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방에 들어가 있던 게 고작 1시간도 안되는데 환불해 주시면 안 되나요? 마신 술 값은 당연히 계산하고요."

애원하듯 부탁을 했다. 하지만 직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이미 방을 열쇠로 열고 들어간 상황이기 때문에 규율상 환불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은 확실한데 생떼 쓰는 꼴이 되어 민망했지만, 눈 깜짝한 사이에 기억에도 없는 일로 60만 원을 내버렸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이판사판으로 그럼 반이라도 되돌려 주면 되지 않냐고 물고 늘어지자, 멀리서 매니저로 보이는 남성이 오더니 사정을 듣고는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환불도 불가능하고 자꾸 이러시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에서 고작 한 달을 보낸 이방인이 경찰이란 단어를 들으니 갑자기 콩알만해졌다. 그리고 과감하게 포기를 하자고 스스로 결정했다. 내가 마신 술값이 보증금 150달러로 충당이 안 되어 돈을 더 보태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그들에게 던진 말은 뜬금없게도 "I can go home"였다. "알았어, 당신들! 차라리 이까짓 것 그냥 가버리고 만다!"라고 시원하게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당시 잔뜩 겁을 먹어 어설픈 표현이 나왔던 것이다.

호텔방에서 하룻밤이라도 즐길 걸

술은 동전과 같은 양면성이 있다. 그 중 악마의 모습을 들춰내는 것은 다름 아닌 술을 마시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술은 동전과 같은 양면성이 있다. 그 중 악마의 모습을 들춰내는 것은 다름 아닌 술을 마시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 손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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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생각을 해보니, 나는 그 날 또 다른 실수를 저질른 셈이었다. 술이 취해 힐튼호텔에 가서 최고급방을 얻은 것이 그 첫 번째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되돌릴 수 없던 것이었다.

그렇게 돈은 이미 지불했고 환불이 안 되는 마당이라면 차라리 반성의 계기로 삼을 추억이라 생각하고 다시 오기 힘든 호텔방에서 하룻밤이라도 즐기고 나왔어야 했거늘, 그저 '경찰'이라는 단어만 듣고 긴장한 나머지 황급히 도망쳐 버리다니.

어디 가서 이야기를 하면 한심한 놈이라고 욕만 얻어먹을 테니 이 이야기는 한동안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고 살았다. 그래도 1시간 눈 붙이고 60만 원 낸 뒤 얻은 교훈이 있다면 역시나 술은 '두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돈을 날린 것 외엔 별 탈이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술 때문에 돈 보다 더 중요한 사람 사이의 믿음을 잃고 연이 끊기기도 하며 심지어 건강과 목숨을 잃기도 한다.

벌써 12월이다. 벌써부터 송년회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술 좋아하고 흥을 좋아하는 많은 한국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술 한두 잔이 어느새 한병 두병이 되어 과음을 하고 만취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적당한 음주는 좋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그 이면의 무서운 악마의 모습은 꼭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악마를 초대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술을 마시는 우리 본인이다.

덧붙이는 글 | <그들의 특별한 술버릇을 공개합니다> 응모글



태그:#힐튼, #호텔, #HILTON, #미니바,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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