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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겨울은 내 생애에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나는 집안 살림이 어려워서 간신히 다니고 있는 중학생이었다. 그리하여 방값이라도 아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 무렵 전남 순천지방에서는 대부분의 방들이 1년 방세를 한꺼번에 받았는데 우리 집 형편으로는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방세가 없어서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3km를 달려가서 오전 5시 10분경에 출발하는 통학기차를 타고 통학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우리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의 막내인 내 1년 후배가 외삼촌네 집으로 들어가서 하숙을 하기로 했다고 했다. 시골이어서 하숙비를 받지 않는 대신 외삼촌네와 같이 먹고 사는 조건이었다. 더구나 새집이라고 하였다.

 

이 즈음에 우리나라 형편으로 집이라는 것이 모두 낡고 험했던 시절이었다. 시내라고 해도 낡은 초가가 많았고, 시설도 형편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2년생이 혼자서 이 방을 쓰게 되었고, 공부가 조금 시원찮다보니 나를 함께 붙여 생활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같이 있으면 공부를 하는 것도 좀 도와주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선배이기도 하지만 모범생이라서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는 부모님들의 부탁이었다.

 

나로서는 이만한 조건이 없었다. 우선 통학을 면하게 되었고, 자취하면 늘 식사준비 같은 것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그럴 필요 없이 식생활이 해결되고 공부할 시간을 벌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더구나 하숙이라고 돈을 낸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자취할 때 먹던 식량만 보내주면 된다니 집에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일단 함께 가기로 하였다. 학교에서 약 4km나 멀리 떨어진 마을이었다. 조례동에 있는 학교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지만, 약 한시간 정도 커다란 들판을 타고 올라야 하는 거리였다. 학교에서 바라보면 아득하게 보이는 들판 끝에 조그만 산이 보이는데 그 산 너머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이었다. 마을의 한복판에 우물이 있고 이 우물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살 집이 있었다.

 

초가삼간이었지만, 새로 지은 집이라서 깨끗하고 널찍한 것은 좋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방은 너무 추웠다. 가을철에 이사해 추워지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날씨가 점점 추워지기 시작하자 너무 추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겨우내 방바닥에 불기운이 들어간 적이 없었으니 추울 수밖에 없었다.

 

옛날식 초가집인데 도배를 하지도 않은 상태라서 천장도 없고, 벽과 중방, 벽과 기둥 사이가 잘 붙지 않아서 구멍이 빤히 밖이 내다보일 정도였다. 울타리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 보였다. 전기도 없던 시절이라서 호롱불을 켜고 공부를 하는데 바람이 불면 호롱불이 흔들리면서 까만 연기를 내뿜기도 하였다.

 

어느 주말, 방안이 너무 추워서 방안에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 앞의 산으로 돌아다니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바람이 잔잔해 산에 가니 오히려 따뜻하였다. 양지바른 산언덕에 앉아 있다가 작은 소나무 밑에서 솔잎들을 긁어 보았다.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긁어모은 솔갈비 '소나무 낙엽'는 몇 줌이나 되었다.

 

우리는 아주 방에 피울 나무를 하자고 나섰다.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소나무 몇 그루를 뽑고 썩은 나뭇가지들과 솔갈비를 모아서 반 아름쯤 모았다. 그러나 막상 집에 가져 와서는 이것들을 피울 수가 없어서 큰 방 부엌의 나뭇간에 던져 놓고 말았다.

 

중학교 3학년이면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밤새워 공부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요즘처럼 학원에 다니거나 다른 곳에서 공부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입시 공부는 오직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시간은 내 평생에 잠자는 습관으로 정착되어 버렸다.

 

이 무렵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특선은 요즘처럼 24시간 전기가 들어오지만, 일반선은 밤 11시 30분이면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림과 동시에 꺼졌다가 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나는 이렇게 전기가 나가는 시간과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사이렌이 울리면서 전기가 꺼지면 스위치 손댈 필요도 없이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4시 사이렌이 울리면서 전기가 들어오면서 자동으로 불이 켜지면 벌떡 일어나서 세수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바로 집 앞에 우물이 있었지만, 여자들이 사용하는 우물에 들어가서 세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로 곁에 있는 연못으로 가서 세수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연못이 날씨가 추우면 얼어 붙어서 세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날은 발로 얼음장을 깨고 얼음덩이를 밀어 내고서야 간신히 세수를 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나는 세수를 하기 위해 발을 굴러 얼음장을 깨다가 얼어붙은 얼음에 미끄러져서 연못물에 빠지고 말았다. 얼른 빠져나왔지만, 정강이까지 흠뻑 젖은 옷을 말릴 수가 없었다. 단벌교복의 바지가 젖었으니 대책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방안으로 화분을 하나 가지고 들어가서 이 화분에다가 종이 몇 장을 태우면서 바지를 말리고 있었다.

 

옷이 잘 마르지 않아서 애를 쓰면서 다시 불을 피우다가 그만 젖지 않은 부분에 불이 붙어 버렸다. 얼른 비벼 껐지만, 바지엔 손가락 몇 개가 들어 갈만한 불 구멍이 나고 말았다. 아랫부분은 젖어서 마르지도 않았고, 윗부분에는 불구멍이 난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휑한 들판을 가로질러서 학교를 향해 가는 길은 북풍을 정면으로 받고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얼마지 않아서 바짓가랑이는 꽁꽁 얼어붙어서 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요즘처럼 옷을 몇 벌씩 가지고 살 수 있던 시절이 아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단벌 교복으로 살던 시대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날은 어떻게 학교생활을 했는지 모른다. 다른 이이들이 눈치 챌까 봐서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살아야 했다. 걸어 다니면 바짓가랑이가 눈에 뜨일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동안을 이런 바지를 입고 살아야 하는 초라한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하게 겨우겨우 버틸 수 있었다. 토요일 집에 와서 미싱(재봉틀)으로 들들 박아서 구멍을 막은 옷을 입고 그 겨울을 나야 했으니 참으로 춥고 힘들었던 겨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세입자 이야기> 응모작


태그:#1959년, #중3, #입시공부, #친구외삼촌댁, #전기일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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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아동문학회 상임고문 한글학회 정회원 노년유니온 위원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 ***한겨레<주주통신원>,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꼼꼼한 서울씨 어르신커뮤니티 초대 대표, 전자출판디지털문학 대표, 파워블로거<맨발로 뒷걸음질 쳐온 인생>,문화유산해설사, 서울시인재뱅크 등록강사등으로 활발한 사화 활동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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