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손님 잘 치렀어?"

"똥차 봤어."

"…."

 

밖에서 돌아온 남편이 묻는다. 손님 잘 치렀냐고. 아내의 대답은 동문서답이다. 똥차를 봤다고. 손님 잘 치렀냐는 질문에 웬 똥차 얘기? 뚱한 표정의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내의 표정을 살핀다. 

 

"똥차를 봤다고."

 

화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똥차를 강조하는 아내. 

 

"창피했어. 지방에서도 본 적이 없는 똥차가 왜 수도 서울에 있냐고. 요새 수세식 화장실 아닌 곳이 어디 있다고."

 

평소 같았으면 집에 온 손님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시시콜콜 늘어놨을 아내가 그날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주인공: 비정규직 남편 & 무직 아내

때: 1987년 늦봄

장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4동 181- ***

 

[사건 개요] 신혼부부가 사는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여자의 옛 직장 동료들이었다. 번듯한 아파트가 아닌 남의 셋집이라는 게 좀 걸렸지만 여자는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위해 정성껏 대접을 했다. 그리고 집을 나서 손님을 배웅하러 가는 길, 문제의 '똥차' 사건이 발생했다.

 

어디서 풍겨나는 야릇한 냄새, 코를 킁킁거리며 둘러보니 똥차가 서 있었다. 어렸을 때 말고는 본 적이 없는 똥차였다. 모처럼 마음 먹고 찾아온 옛 동료에게 좋은 동네, 아름다운 집, 화려한 신혼살림을 보여주고 싶었던 여자는 '그때를 아십니까' 시절이 연상되는 똥차  때문에 그만 스타일을 구겼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남자는 오랜 만에 찾아온 아내의 옛 동료 얘기가 궁금했지만 입을 굳게 다문 아내 때문에 말없이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5백만원 짜리 전셋집도 좋아

 

27살 고교 교사인 여자가 결혼을 했다. '보따리 장사' 시간강사 남자랑.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남자는 사당동과 봉천동이 만나는 하늘 가까운 곳에 5백만 원 짜리 집을 얻었다. 순진한(?) 여자는 '서울특별시'에서 5백만 원짜리 집이 어떤 곳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래서 남자를 따라 처음 신혼집을 구경가던 날, 아주 신이 났다. 왜냐고?

 

사랑에 눈이 멀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곁에 있으니 눈 먼 사랑 앞에 그만 콩깍지가 씌여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89번 종점에서 내려 신혼집을 향해 걸어갈 때 언덕 위의 집을 보며 순진한 생각을 했다.

 

'저기 살면 비싼 돈 들여 헬스클럽에 갈 필요가 없겠구나. 운동이 저절로 될 테니.'

'전망대에 오르지 않아도 매일 밤 아름다운 서울 야경을 감상할 수 있겠구나.'

 

집주인이라고 소개 받은 후덕한 인상의 아주머니도 마음에 들었다. 아주머니는 자기 집에 살게 될 신혼부부가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적어도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거나 떠들어대는 등의 무식한 행동은 안 할 걸로 기대했을 것이기에. 

 

그래서였을까. 아주머니는 인사하러 온 예비 부부에게 '내 집'을 마련할 때까지 편하게 오래 살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네 세들던 사람은 모두 내 집을 마련해 나갔다며. 

 

모든 게 아름다웠다. 하늘 아래 언덕 위의 집도 친절한 집주인도 다 좋았다. 비록 셋방살이이긴 해도. 게다가 서울치고는 공기도 좋아 신혼부부는 앞으로 그곳에서 <사당동 연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셋방살이 잊지 못할 추억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결혼식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와 웬만큼 콩깍지가 벗겨진 여자. 하늘 가까운 곳 언덕 위의 집에 대해 '개념'을 갖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 날 경사 30도의 길을 올라가는 게 어떤 것인지, 추운 겨울 날 미끄러운 빙판 길을 아슬아슬 내려가는 게 어떤 것인지.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언덕 위의 높은 집만이 아니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잠자리에 든 여자 얼굴 위로 뭔가 차가운 게 튀었다. 눈을 떠 보니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함께 자던 남자는 먼저 잠이 깨어 부엌에서 플라스틱 바가지를 가져왔다. 바가지 위로 빗물이 튀고 있었다.

 

"다 튀잖아."

"… 거 이불 꿰맬 때 쓰는 굵은 실 있지? 압정이랑?"

"그거 뭐하게?"

"일단 줘 봐."

 

머리 좋은(?) 남자는 압정을 천장에 박은 뒤 굵은 실을 감아 아래로 길게 늘어 뜨렸다. 천장에서 직접 튀던 빗방울이 실을 타고 조용히 내려와 바가지에 담겼다.

 

그날 밤 남자는 천장에 예닐곱 개의 압정을 박아 용감하게 빗물을 제압(?)했다. 그런 다음 남자와 여자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빈궁한 셋방살이의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친정 어머니 같은 주인 아주머니

 

"새댁, 오늘이 정월대보름이야. 오곡밥이랑 나물 무친 거 먹어봐요."

"인절미를 좀 했어요. 먹어봐요."

"김장 했어요. 맛 한 번 봐요."

"잡채랑 오징어무침이랑."

"시래기 국 끓였어요."

 

솜씨 좋은 주인 아주머니는 종종 맛있는 반찬을 가지고 와서 남자 여자가 사는 집 방문을 두드리곤 했다. 비 오는 날이면 부침개를 해 오기도 하고 특별한 절기가 되면 절기 음식을 챙겨오기도 했다. 김장철이면 넉넉한 김치를 김치통에 담아 오기도 했고 온갖 종류의 국과 죽도 끓여왔다. 

 

여자는 친정 어머니 솜씨가 그립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친정 어머니 이상으로 잘 챙겨 주었기에.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여자가 첫 딸을 출산했을 때 남자에게 물어 직접 병원을 찾아오기도 했다. 빨간 장미꽃 한다발을 들고서.  

 

가족보다도 먼저 병실을 찾아와 산모를 축하하고 위로해 준 주인 아주머니였다. 세상에 어떤 주인이 이렇게 따뜻한 정을 베풀어줄까 싶어 여자는 그 앞에서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주인 아주머니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 사이에 인연이 끝날 뻔한 적도 있긴 했다. 
 
아주머니는 낡아서 비가 새는 그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짓는다고 했다. 그러니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아주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새 집이 지어질 동안 임시 거처를 정해 근처로 이사를 갔고 몇 달 뒤 다시 새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렇게 계속 인연은 이어졌다.

 

여자는 그곳에서 둘째를 낳았고 남자는 공부를 마친 뒤 학위도 받았다. 남자는 지방의 한 대학에 취직을 했다. 이들은 셋방살이 할 때부터 부어 온 청약 통장으로 분당에 새 아파트도 분양 받았다. 이제는 내 집도 마련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것이었다.

 

지방으로 이사를 온 뒤 여자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내 집 마련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 아주머니는 마치 당신 일인 양 아주 좋아했다. 그렇게 몇 번 연락을 주고 받았던 이들이었지만 각자 생활이 바쁘다 보니 그만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옛 주인 아주머니를 찾아 나서다

 

하지만 잊은 건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의 큰딸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두 딸을 데리고 옛 추억을 찾아 나섰다. 신혼집이었던 사당동이 이들 추억 찾기의 첫 출발역이었다. 

 

"아직도 아주머니가 살고 계실까?"

 

그동안 전화번호도 바뀌어서 주인 아주머니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여자는 케익을 사들고 두 딸을 앞세워 사당동 언덕길을 올랐다. 

 

"엄마, 힘들어."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서 아이들이 힘들다고 했다.

 

"이곳은 엄마 아빠가 결혼하고 처음 살았던 곳이야. 엄마도 힘들어서 이곳을 늘 '골고다 언덕'이라고 불렀었지. 그런데 이제는 하나도 안 힘드네. 넌 힘들어?"

"응. 많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이 올라 다녔던 추억의 언덕길이었다.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기를 포대기에 업고 유모차에 태워서 늘 함께 다녔던 길이었다. 그 추억의 길을 오르고 있자니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뗄 때마다 추억의 사건이 머릿 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아니 힘들기는커녕 펄펄 날았다. 여자도 남자도.

 

하지만 그런 추억의 보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힘들다고 투정을 할 뿐이었다. 그렇지. 추억이 없으면 이 길은 그저 고통스러운 골고다의 언덕일 테지.  

 

힘들어 하는 아이들 때문에 '가족'은 쉬엄쉬엄 걸음을 늦춰 언덕을 올라갔다. 옛날 살던 집 앞에 섰다. 181-***번지. 대문에는 아직도 주인 아저씨 이름의 문패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아, 아직도 살고 계시는구나.

 

"딩동!"

 

호흡을 가다듬고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누구세요"라는 아가씨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 전에 여기 살았던 사람인데요. 한나영, 주연이 엄마예요. 주인 아주머니 계세요?"

"…."

 

잠시 뒤, 주름살이 더 늘어난 주인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대문을 열어줬다. 

 

"어머, 이게 누구야?"

 

초인종에 응답을 했던 아가씨는 초등학생이었던 아주머니의 대학생 딸이었다. 감격스러운 재회였다. 

 

남자와 여자, 두 아이들은 오랜 만에 만난 주인 아주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주인 아주머니도 이제는 중년이 다 된 옛 세입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 눈에 이슬이 맺혔다. 아주머니는 여자의 두 딸에게 절 값이라며 용돈을 건넸다.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그 때 아주머니께서 늘 잘해 주셔서 저희가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있는데요."

 

아무 것도 모르던 신혼 시절, 남자와 여자는 서러웠을지 모를 고단한 셋방살이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준 옛 주인 아주머니의 사랑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 좋은 주인을 만나 행복했던 남자와 여자, 이들은 이제 그 때 받은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어한다. 

덧붙이는 글 | <세입자 이야기> 응모 기사


태그:#셋방살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