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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묵묵히 강변의 쓰레기를 줍는 봉사자의 모습을 담았다.
▲ 템스강의 봉사활동 아침 9시, 묵묵히 강변의 쓰레기를 줍는 봉사자의 모습을 담았다.
ⓒ 구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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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어떻게 하나요?"

낯선 한국인 여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잠깐 그녀를 멀뚱히 쳐다봤지만, 사실 질문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냥 수돗물 마셔도 되고, 찜찜하시면 물을 사서 드셔도 돼요. 전 그냥 마셔요."

애매한 답을 던지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그녀가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는 영국문화에 익숙해질 때까지 물지게 나르듯 페트병들을 실어나를 것이라 확신했다. 어쩌면 몇 달 동안은 영국인의 홍차 대접에도 '노땡쓰'를 연발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물에 대한 영국인들의 습관은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런던 생활이 4년차에 접어드는 나로서도, 끓이지 않고서는 수돗물을 마실 수 없다. 왠지 수돗물에서는 냄새가 날 것 같아서다.

많은 외국인들이 좀처럼 바꾸지 않는 수돗물에 대한 고정관념, 그렇다면 그걸 깨는 영국인들의 고정관념은 과연 어떤 것일까. 템스강에 대한 자부심일까.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하천으로 꼽히는 템스강, 그래서일까.

템스강을 청소하는 템스21

템스강변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없다. 쓰레기의 대부분이 유리나 철근같은 위험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 강변의 쓰레기들 템스강변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없다. 쓰레기의 대부분이 유리나 철근같은 위험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 구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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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귀를 열면 영국은 환경보호의 나라로 바뀐다. 신문의 다채로운 환경 칼럼들과 거리 곳곳에 붙는 광고들. 다큐멘터리는 쉴새없이 제작되며 라디오는 연일 떠든다. 다양하게 제작되는 환경 다큐멘터리·콘서트·설치예술 등 다채로운 행사들은 영국인을 기후변화문제와 이산화탄소 문제에 통달한 전문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템스강을 지키자는 취지의 '템스21'(Thames21)도 그런 환경봉사단체 중 하나로, 필자가 이 단체를 알게 된 경위 또한 라디오 광고를 통해서다. 런던의 물길에 생명을 부여하는 단체 템스21에서 템스강을 청소하는 봉사로 함께하자는 것이 광고의 주요내용이었다. 지난 4년동안 내 몸을 씻었고 내 목을 축였던 물, 나는 과연 어떤 물을 먹었던 것일까.

바람이 잠잠하던 어느 날, 템스강을 마주하고 있는 그리니치(Greenwich)를 찾았다. 1년에 수차례 정기적으로 만나 강을 청소하는 사람들, 아무런 친분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구분없이 그곳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사흘 동안 벌어지는 템스강 청소행사의 첫날, 약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안전수칙과 함께 가죽 장갑과 고무 부츠가 전달됐고, 주요업무는 강변에 흩어진 쓰레기를 청소하는 작업이었다. 여자들은 줍고 남자들은 날랐다. 처음에는 다들 난감한 표정이었지만, 사람들은 금세 바빠지기 시작했다. 햇살이 떠오르면서 강이 반짝거렸고, 반짝거리는 모든 것들이 유리조각이었기 때문이다.

한 곳에 주저앉아 유리조각을 주우며 무심코 숫자를 셌다. 적게는 여덟로 끝났고 많게는 스물하나까지 갔다. 내 앉은 자리 주변으로 깔린 스물  한개의 유리조각들…. 곳곳에 깔려있는 유리도 문제였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철근과 철판들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어른들까지 위험으로 몰 수 있었다. 부식된 철근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몸이 움츠러들며 목이 따끔거리는 듯했다.

쪼그려 앉아 쓰레기를 줍다 보면, 돌 사이로 비닐 조각이 보이곤 하는데 그 비닐 조각을 결코 우습게 볼 수 없었다. 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당길수록 더 큰 쓰레기가 땅속에서 딸려 나왔다. 시커먼 기름때를 가득 담고 있는 일회용품 쓰레기도 종종 보였다. 봉지가 서서히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환경오염이라는 문제의식보다 먼저 아름다운 강가에 아이들을 데려올 수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나게 다가왔다. 

봉사자들이 100명 넘게 모였지만, 넓은 강변을 정화시키기에는 부족해보였다.
▲ 템스강의 봉사자들 봉사자들이 100명 넘게 모였지만, 넓은 강변을 정화시키기에는 부족해보였다.
ⓒ 구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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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스강은 현재 깨끗하다. 18세기 말부터 오염되기 시작했고, 1950년도 그 오염도가 극에 달했던 이 죽음의 강은 20년 후 기적처럼 다시 되살아났다. 기록에 따르면, 1883년부터 보이지 않던 템스강의 연어는 1974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타났다.

100년 가까이 사라졌던 연어. 연어의 귀환에는 적극적인 수질개선정책을 펼친 영국정부의 공이 컸다. 그러나 템스강에게 정부의 관심만큼 소중했던 것은 영국 대중의 관심이 아니었을까. 시민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는 하지만, 대중의 적극적인 요구가 없었다면 템스강의 환경정책이 과연 시도됐을지 의문이다.

엄청난 양의 장화와 장갑, 그리고 물통까지, 봉사자를 위한 준비물이 담긴 상자들이 마지막에는 그 바닥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삽으로 묻힌 쓰레기를 퍼내느라 발이 빠졌는지도 몰랐고, 얼굴에 진흙이 묻어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사기 조각에서부터 유리병·밧줄·고무 호스·창틀·수도꼭지·일회용 접시·타일까지…. 쓰레기의 종류가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사실에 경악하는 사람들과 그 뒤로 아무런 표정없이 쓰레기 줍고 있는 봉사자들이 어우러져 3시간의 봉사활동이 끝나가고 있었다. 

100년후의 이름, 템스

3시간의 봉사활동이 끝나갈수록 쓰레기함은 검은봉지로 채워졌다.
▲ 채워지는 쓰레기함 3시간의 봉사활동이 끝나갈수록 쓰레기함은 검은봉지로 채워졌다.
ⓒ 구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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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물 마시면 되지’라고 대꾸하는 영국인의 독특한 고정관념. 3시간의 봉사활동만으로 그 고정관념의 의미를 알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국인의 수돗물 사랑이 어쩌면 정부정책에서 나온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템스강을 지키고 있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어가 돌아오는 길을 만들어주는데 100년이 걸렸다. 이제 깨끗해진 템스강의 강물에서는 연어가 뛰어놀고 있지만, 강변은 텅 비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유리조각의 물결이 사라질 때까지 아이들은 뛰어놀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영국인들은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강변을 만들기 위해 또다시 100년을 투자할 것이다.

100년 후에 템스의 이름은 무엇일까. 100년 전, 누군가는 오염된 강을 보고 '죽음의 강'이라고 불렀고 그로부터 100년 후, 누군가는 개선된 강의 수질을 보고 '템스강의 기적'이라고 외쳤다. 이제부터 100년 후, 템스강은 과연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 사뭇 기대된다.

해가 짧은 영국의 초겨울, 느즈막히 떠오르는 태양이 봉사자들의 어깨너머 템스강으로 따뜻한 햇살을 보냈다.
▲ 강변의 아침 해가 짧은 영국의 초겨울, 느즈막히 떠오르는 태양이 봉사자들의 어깨너머 템스강으로 따뜻한 햇살을 보냈다.
ⓒ 구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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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태그:#영국, #템즈강 , #환경 , #봉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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