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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앨라배마의 스카츠보로(Scottsboro)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화물기차를 타고있던 흑인 10대 소년 9명이 부랑과 질서파괴 혐의로 체포되었다. 단순 경범죄로 넘어갈 수 있었던 이 사건은 그후 그 기차에 타고 있었던 두 명의 백인여성이 흑인 소년들을 강간죄로 고발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사실 그 여성들이 전혀 성폭행 당하지 않았다는 의학적인 증거와 여타 증거들이 충분히 있었다. 이 여성들은 자신들도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거짓 고발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백인만으로 구성된 앨라배마의 배심원들은 '스카츠보로 소년' 9명 모두를 신속하게 기소했고, 그 중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대법원이 기소를 뒤집고, 재판을 새로 시작했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남부의 백인 배심원들이 피고인들 중 누구의 무죄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자유를 얻었다. 스카츠보로 피고인 중 마지막 한 소년이 그 후 20년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도 결국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 '스카츠보로 사건'은 흑인의 인권문제에 대해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사건이 흑인들이 노예로 살던 시대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카츠보로 사건은 1931년 3월에 일어났다.

흑인들은 미국 시민으로 대접받고 있나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1805~1859)은 "노예제도의 전통은 특정종족에게 치욕을 안겨준다.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조치가 취해지는 것은 흑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백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흑인노예가족사진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1805~1859)은 "노예제도의 전통은 특정종족에게 치욕을 안겨준다.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조치가 취해지는 것은 흑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백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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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구 3억명이 넘는 이 거대한 나라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중 13%는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n)' 일명 '흑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의 시민으로, 제대로 대접받고 있을까.

미국은 '멋진 신세계'였다. 단지 백인들에게만! 일만 하기 위해 신천지로 끌려온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합법적으로 노예로 부려졌다. 또 한낱 소모품에 불과했으므로 그 목숨조차도 백인 주인님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1863년, 흑인들은 '위대한 해방자' 링컨에 의해 노예신분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링컨이 노예제도를 철폐한 것은 도덕적인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남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인 조치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남북전쟁 이전 미국 정치에서 노예제도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분열적 요소가 아니었다. 공업화가 된 북부에 비해, 남부는 농장지대가 대부분이었다. 남부의 농업 주들은 끊임없이 공산품 관세를 낮추고자 시도했고, 북부의 공업주들은 관세를 높은 상태로 유지하거나 아니면 더 높이자는 주장을 폈다. 결국 남북전쟁은 '흑인노예 해방'이 아닌 '공산품 관세 대립'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셈이다.

북부를 대변하던 링컨은 수세에 몰리던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흑인 노예들을 전선에 투입시키기 위해 노예해방을 선언했고, 노예를 위해 피를 흘릴 수는 없다는 북군 병사들을 대신해 전선에 투입된 흑인 노예들의 활약으로 결국 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그 흑인들의 피값으로 미국은 이후 공업국가로서의 발을 내딛게 되어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 100년이 지나도록 흑인들은 말뿐인 노예해방 속에서 참정권을 얻지 못하였다는게 진실이다.

제이콥 로렌스(Jacob Lawrence, 1917~2000)가 살았던 당시 흑인의 처지 역시 그랬다. 그도 이같은 불합리적 상황을 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 역시 '까만 피부'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제이콥 로렌스의 사진
 제이콥 로렌스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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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피부의 아메리칸, 역사를 그리다

제이콥 로렌스는 1917년 뉴저지의 아틀란타 시티에서 태어났다. 7살때 부모님이 별거하자, 13살이 되던 해인 1930년에 그의 형제들과 어머니는 뉴욕의 할렘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할렘은 1차대전의 발발로 전쟁노동력을 충당해주기 위한 흑인들과 남부의 억압을 피해 이주해온 흑인들이 들어서면서 흑인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 남부에서는 '백인과 흑인은 평등하나 분리해야 한다'는 짐 크로우 정책이 만연해 있었다. 따라서 흑인들은 공공기관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또한 백인우월주의를 고수하는 비밀테러조직 KKK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왜였을까. 로렌스는 너무나 궁금했다.  왜 흑인들이 미국 역사에서 해왔던 역할들이 간과되고 있을까. 아니, 간과된 것뿐 아니라 차별당하고 무시당하고 있는 흑인들의 처지! 그는 무언가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것, 즉 그림으로써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간과된 중요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흑인들의 역사부터 탐구했다. 그가 붓을 들었던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던 미국인들에게 아프로 아메리칸의 역사를 이해시키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학교 교과서에는 공인된 흑인 역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훨씬 이후인 1970년대에나 등장했죠. 하지만 할렘의 거리에서나 우리의 저녁식사 테이블에서는 용기있고 강직한 흑인들의 이야기가 언급되고 또 언급되었죠. 그리고 이것은 일상의 한 리얼리티가 되었습니다."

제이콥 로렌스 자화상
 제이콥 로렌스 자화상
ⓒ 제이콥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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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는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그럴듯하게 속여온 미국의 역사'를 아프로 아메리칸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는 "미국의 건설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땅을 경작하고 솜을 주웠으며 도시를 세우는데 일조했나"를 언급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할이 중요했을 미국의 산업혁명 등에 대해 이를 '공헌'이라고 부를 것을 제시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흑인들의 역사와 관계된 그림 연작들을 하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발전하고 형태를 갖춤에 따라, 그리고 내가 미국의 역사를 보다 더 많이 읽음에 따라 나는 점점 더 흑인들의 투쟁과 기여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이주해서 미국의 창조에 기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흥이 나는 미국의 이야기에 기여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를 그림에 담다

그리고 난방도 없고 수돗물도 안 나오는 뉴욕시 빈민가에 살고있던 24살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화가 제이콥 로렌스는 1940년부터 1941년까지, 60점의 그림을 시리즈로 그려냈다. 그를 아주 유명하게 만들어준 연작 <흑인들의 이주(The Migration of the Negro)>가 그것이다. 이 그림들은 수백만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후에, 농촌지역인 남부 아메리카에서 도시지역인 북부 아메리카로 도피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 한개 한개 떼어놓고 보아도 좋지만, 그의 그림을 죽 놓아놓고 보면 마치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연속적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다색 판화처럼 제한된 중채도의 색감, 그리고 단순한 인물 형태와 배경 처리가 특징인 그의 그림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구도와 짜임새는 빈틈이 없다.

The railroad stations were crowded with migrants-No32 .

북쪽의 시카고, 뉴욕, 피츠버그, 세인트루이스로 향하는 수많은 흑인들이 남부의 기차역에서(그 당시에는 공항이 없었다)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제이콥 로렌스 연작 <흑인들의 이주> 중 32번 The railroad stations were crowded with migrants-No32 . 북쪽의 시카고, 뉴욕, 피츠버그, 세인트루이스로 향하는 수많은 흑인들이 남부의 기차역에서(그 당시에는 공항이 없었다)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제이콥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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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 During the World War there was a great migration North by Southern 1940-41
▲ 제이콥 로렌스 연작 <흑인들의 이주> 중 1번 No. 1: During the World War there was a great migration North by Southern 1940-41
ⓒ 제이콥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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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이 연작은 1890년대부터 시작되어 1940년대까지 이르렀던 흑인 인구의 '대이동(Great Migration)'을 그려낸 것이다. 로렌스의 가족 역시 '대이주'를 겪었기에, 이 주제를 한층 더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남부 노예제도의 유산(遺産) 탓에 1900년까지도 전체 흑인의 85%가 남부에 살았다. 그러나 '대이동' 당시 미국 흑인의 총인구 1000여만 중에서 20%에 달하는 200만 명이 남부에서 북부 또는 중서부로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북부 도시로의 흑인 인구의 이동은 이민규제의 강화와 함께(1924년 강력한 이민법이 제정됐다) 노동력이 줄어들고 반면에 1차대전 후 미국의 산업팽창으로 노동시장이 확대됨으로써 싼 노동력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And the migrants kept coming-no.60
▲ 제이콥 로렌스 연작 <흑인들의 이주> 중 60번 And the migrants kept coming-no.60
ⓒ 제이콥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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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so the migration grew-18
▲ 제이콥 로렌스 연작 <흑인들의 이주> 중 18번 And so the migration grew-18
ⓒ 제이콥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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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부 백인들의 감시와 방해 및 위협을 무릅쓰고 감행한 흑인들의 북부 이주를 경제적 이유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남부 사회는 북부로 이주하려는 흑인들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들의 이주를 가로막았다고 한다.

대이주가 본격화되기 전인 1879년에는 미시시피주의 제임스 챌머스(James Chalmers) 장군과 한 무리의 백인들이 흑인들을 싣고 가는 배를 침몰시키겠다는 위협을 한 적도 있을 뿐 아니라, 1880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남부의 11개 주에서 북부로의 이주를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키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흑인들에게 북부행 기차표 판매를 거부한 곳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 제임스 그로스만(James Grossman)은 흑인 대이주가 "미국 흑인들의 인간적 삶에 대한 열망으로 촉발된 것"이라며 "미국 흑인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지로 인한 의식적이고 의미있는 행위"로 평하기도 했다.

"노예들은 이동의 자유에 있어 제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남부 내에서의 강요된 이주로 고통받았다. 많은 흑인들은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자유가 나타내는 여러 가지 의미들 중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극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과거에 노예였던 이들은 자신들이 새로 획득한 지위의 가장 의미 있는 요소 중의 하나로 이동의 자유를 움켜쥐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과 그들의 아이들은  남부의 시골 내에서, 남부의 도시로, 마침내 북부 도시로 이주하였다."

Railroad stations were so crowed with migrants that guards were called in to keep order-No.12
▲ 제이콥 로렌스 연작 <흑인들의 이주> 중 12번 Railroad stations were so crowed with migrants that guards were called in to keep order-No.12
ⓒ 제이콥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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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ailroad stations were crowded with migrants-No40
▲ 제이콥 로렌스 연작 <흑인들의 이주> 중 40번 The railroad stations were crowded with migrants-No40
ⓒ 제이콥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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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로렌스의 그림도 이를 잘 포착하고 있다. 노예주의 허가증 없이는 농장을 떠날 수조차 없었던 노예 시절을 경험한 해방 노예들에게 있어서, 상대적으로 쉬워진 다른 곳으로의 이동은 당시의 흑인으로서는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난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으리라.

그래서 로렌스는 이동의 자유를 누리는 행위 자체의 상징적인 가치와 남부의 흑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노동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며 그림으로 하나의 대서사시를 써냈다. 

아직 끝나지 않은 흑백 차별, 그 극복을 향한 여정

그렇다면 이제 미국내 흑인들의 처지는 백인들과 동등해졌는가. 불행하게도 지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난민들의 대다수가 가난한 흑인이었음이 드러났듯이, 흑인에 대한 차별 극복과 자유에의 여정은 아직 미완의 서사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콘돌리자 라이스, 콜린 파월과 같은 정부 고위관료가 있지 않은가? 2002년 아카데미 영화상 수상식에서 흑인이 남녀 주연상을 독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대다수 흑인들은 분명 과거 노예일 때와는 처지가 다르지만, 불행히도 인식적·구조적으로는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 문제는 단순히 '편견'과 인식의 잔존 문제가 아니라 기업과 국가가 조장하는 체계적 차별이 문제라는 것이다.

카트리나 재난을 상기해보자. 해수면보다 낮은 뉴올리언스 시내 동쪽의 저지대 빈민가의 흑인들은 구조에 뒷전으로 밀렸다. 반면, 뉴올리언스 내 부유한 백인들만 산다는 생 찰스 스트리트에는 침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대재앙에서 겨우 살아남은 흑인들은 잠재적으로 범죄자 취급 받았다. 언론에서는 생필품을 구하는 백인의 모습을 가족의 생존을 위해 사투하는 영웅으로 묘사한 데 반하여, 대다수 같은 경우의 흑인들을 약탈자로 묘사하였다.

 폐암 환자로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산소가 떨어져 숨진 남편 시체 옆에서 흐느끼고있는 뉴올리언스의 여인 에블린 터너.
 폐암 환자로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산소가 떨어져 숨진 남편 시체 옆에서 흐느끼고있는 뉴올리언스의 여인 에블린 터너.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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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국가만들기 과정에서 제국으로 팽창하는 지금까지 흑인 문제와 인종 문제는 이 나라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빈곤과 범죄가 인종적으로 투사되고 도덕적으로 분리되어서 외국 사람은 물론 대다수 미국인들도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어 생각한다. 제도와 역사가 흑인을 빈곤하게 하고 범죄자로 만드는 게 아니라, 흑인이니깐 가난하고 빈곤해진다는 논리다.
흑인이나 소수민족 차원에서 보면 미국은 매우 후진국이다.

그래서, 다시 제이콥 로렌스의 그림을 보게 된다. 아메리카 드림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에게는 아메리칸 나이트메어였다는 사실. 그 악몽같은 현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모험을 감행했던 흑인들이 있었다는 것.

그러나 현재까지, 여전히 악몽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악몽은 현실속에서 살아숨쉬며, 흑인들에게 당장이라도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 태세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어디로 이주해야 하는가.  비상구가 없는 흑인들의 현실을 곱씹어볼 수 있게 하는 로렌스의 그림을 우리가 다시 진지하게 봐야 하는 이유다


태그:#제이콥 로렌스, #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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