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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들 정말 훔치려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도서관 경비의 말에 나는 난감했다. 그 옆에서 사서 아가씨마저 그 예쁜 눈이 가자미눈이 되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말을 해야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할 말이 없었다. 내 앞엔 엄청나게 크고 두꺼운 책이 세 권씩이나 있었다. 서점에서 사려면 10만 원도 더 나갈 책들이었다. 그런 책을 '대여등록'도 하지 않고 열람실 밖으로 갖고 나가려던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변명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앞으로 이 도서관에 '출입금지' 낙인이 찍히게 될까봐 큰 걱정이었다. 책보다는 사실 도서관의 시원한 냉방장치 때문이었다. 이 도서관은 바로 우리 집 앞에 있기 때문에 무지막지하게 더운 요즘, 내겐 훌륭한 피서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도서관은 잠시 바람을 쏘이며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딸려 있다. 노려 보는 경비와 사서 아가씨 앞에서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나는 어떻게든 이 피서지를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낡은 아파트에 딸린 훌륭한 정원과 별채

 

지난 봄 전북 전주 삼천동에 있는 낡은 아파트(20년도 넘었다)를 소개 받았을 때, 망설이다가 결국 이사를 결정한 것은 그 공원과 도서관 때문이었다. 운동시설까지 갖추어진 훌륭한 정원(?)과 장서 그득한 별채(?)를 두고 사는 것도 쉽게 오지 않을 축복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만 공원의 쓰레기 문제가 있긴 한데, 이 이야기는 전에 기사로 쓴 바 있다.

 

생각과는 달리 이사를 해놓고도 그 도서관을 사용할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10년 이상 평탄하게 꾸려왔던 사업체가 어려워져 거기 매달리느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거래하던 내 임가공 무역업체는 지난 6월에 문을 닫고 말았다. 중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값싼 물건들에 버티지 못한 일본의 본사가 결국 무릎을 꿇으면서 그 여파가 내게까지 온 것이다.

 

회사 문을 닫고 나는 미래의 새 일거리를 구상한답시고 집안에 들어앉아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자 졸지에 실업자의 부인이 되어 버린 아내는 집안의 재정 형편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아내가 직장을 다녀 다행이었지만 집안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것이 절약의 대상으로 돌변했다. 기름 값이 비싸다며 압수한 차 열쇠를 잘 내주지 않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화장실을 나오며 잊어 버리고 불을 끄지 않으면 호통이 날아들 뿐만 아니라, 따뜻한 물을 받아 간혹 피로를 풀 수 있는 욕조 사용도 금지됐다. 냉장고에 과일이 없다며 아이들이 툴툴거려도 아내는 못들은 척했다. 방학을 이용해 큰 아이가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하려던 계획도 당장 취소됐다.

 

한 번은 아내가 혼자 웬 서류들을 벌려 놓고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각종 보험증서들이었다. 해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겪고 있는 아내에게, 그것만큼은 도로 상자에 넣어두도록 설득하는 데 진땀을 빼야 했다.

 

장마라고 하면서도 비는 잘 내리지 않은 채, 본격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폭염 속에서도 뒤집어 씌워 놓은 에어컨 커버를 벗길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나마 사람을 불러 베란다에 놓여진 실외환풍기 선을 떼어 버렸다. 한낮 더위에 도저히 참지 못한 내가 몰래 에어컨을 몇 번 틀었다가 들통 난 직후였다. 나는 어떻게든 이 더위를 피할 곳을 찾아내야 했다.

 

그제야 우리집엔 별채가 딸려 있었다는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시험 답사를 해본 나는 도서관의 너무도 시원하고 쾌적한 실내온도에 대단히 만족했다. 당장 나는 아침마다 그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시원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장서와 푹신한 의자, 조용한 환경, 그야말로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었다. 덕분에 나는 도서관에서 그동안 생소했던 불교서적들과 함께 살게 됐다.

 

마음껏 에어컨 바람을 즐겨도 아내 눈치 안 봐도 되는 천국

 

뜨거운 여름철, 냉방장치 훌륭한 곳에서 내가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제대로 된 피서도 없는 것 같다. 점심시간에 잠깐 집으로 들어와 밥을 먹는 중에도 땀을 줄줄 흘려야 하는 더위 속을 탈출해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때면, 마치 고단하고 번뇌 깊은 차안(此岸, 범부의 세상)에서 도솔천 같은 피안(彼岸, 이상적 세계)으로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 일이 대부분 그렇듯이 완벽한 듯 보이는 내 별채 생활에도 불편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너무도 조용한 환경이라 졸음도 몰려오고, 독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간혹 방귀를 뀌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따위의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 적응력이 빠르다고 했던가. 도서관 사용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내게도 요령이라는 것이 생겼다.

 

졸음이 쏟아질 때마다 서가(書架) 뒤편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 바닥에 앉아 무릎에 책을 펼쳐놓고 졸 수 있는 노하우를 습득한 것이다. 그것은 누가 봐도 바닥에 주저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진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대단한 신기술이라고 자부할 만하다. 졸음은 그렇게 해결 되었지만 문제는 방귀였다.

 

완벽한 피서지에서 딱 한번의 오점

 

살아오면서 일 하느라 바빴던 나는 도서관 이용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 날 방귀 때문에 일어났던 일은 요즘 도서관의 규칙을 전혀 알지 못한데서 발생된 엉뚱한 사고였다. 그날도 물론 불교관련 서적인 '디가니까야('아함경'으로 번역된 초기불교경전)'라는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엔 불교수행에 대한 복잡한 방법과 용어들이 나오는 통에 이해하기가 곤란했다.

 

당장 서가로 달려가 불교수행을 쉽게 풀이해 놓은 <불교수행강의>라는 더 두꺼운 책을 들고 와서 참고로 삼으며 읽어 내려갔다. 그래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단순히 음역(音譯)해 놓은 탓에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문용어들이 많았다. 급기야 나는 상당히 큰 데다가 두께마저 엄청나서 들고 다니기도 어려운 불교사전을 옆에 갖다 놓고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는 내가 생각해도 무슨 대단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는 고독한 학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주위 사람들도 상당한 존경심을 담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책에 빠져 있던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갑자기 속이 뒤틀리면서 방귀가 뀌고 싶어진 것이다. 사실 내 나이쯤 되면 방귀에 그다지 향기가 실리지 않는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소리가 조금 힘차다는 것일 뿐. 나는 어쩔 수 없이 방귀를 품위 있게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읽고 있던 책들이었다. 그 자리에 그냥 놔두고 나가면 내 별채지기(도서관 사서) 아가씨가 이 무거운 책들을 서가에 그대로 갖다 꽂아놓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차피 나간 김에 커피 한잔 해야 하고, 담배도 한 대 피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기에, 사서 아가씨가 책 읽던 사람이 가버린 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때문에 사서로 하여금 그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게 한다는 것은 너무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서 아가씨에게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책을 치우지 말아 달라고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책 대여할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 것을 보니 바쁜 것 같았다. 그렇기에 좀 크고 무거운 책들이지만, 잠깐 가지고 나갔다가 담배를 한 대 피운 다음 다시 들고 들어와 읽기로 마음먹은 것은 당시로서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결론이었다.

 

단지 책을 껴안고 낑낑거리며 문 쪽으로 나가는 동안 내 걱정은 엉덩이 쪽이었다. 안고 있는 책들이 무지막지하게 배를 누르고 있던 터라 혹시 뒤 쪽으로 영향을 끼칠 것 같은 불안 때문이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책 읽고 있는 조용한 실내에서 사고가 터지면 그것처럼 큰 낭패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재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통과하려는데 사고는 엉뚱한데서 터져 버렸다. 갑자기 입구에서 "삐익!~~"하는 엄청난 크기의 경보음이 울어댄 것이다. 책 읽다가 놀란 모든 사람들이 내 쪽을 쳐다봤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정작 나 자신이었다. 영문을 모르고 그렇게 서 있는 내게 사서 아가씨가 다가왔는데, 그 때부터 상황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나는 그 경보음이 대출등록을 하지 않은 책을 가지고 나갈 때 울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참 세상 좋아진 것을 실감했지만, 좋은 세상에 찬탄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곧이어 달려온 도서관 경비에 의해 당장 나는 구석진 사무실로 안내(?) 되었다. 졸지에 '책도둑'으로 몰리게 된 나는 도서관 '회원증'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가, 아직 주민등록도 집으로 옮겨놓지 못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법적인 내 주소지는 사업체가 있던 성남시였다.

 

그러니 내 신분증을 확인한 경비와 사서는 자꾸만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 무거운 책을 들고 밖에 나가 커피를 마시고 들어오려 했다는 내 말이 설득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 역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경비와 사서는 싸늘한 눈으로 나를 몇 번 더 훑어 본 다음 용서를 결정했다.

 

내가 그 무거운 책을 껴안고 사서를 따라 다시 열람실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보았는데, 이미 그들의 눈에서 존경어린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참담했다. 그렇다고 그 대로 책을 서가에 꽂아놓고 나올 수도 없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정말로 나를 '실패한 도둑놈'으로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라도 몇 시간 동안 책을 꿋꿋하게 읽어냄으로써 내 결백을 침묵으로 주장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도서관은 나의 천국, 나의 피서지

 

그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 억울했던 사연을 아내에게 고해바치니, 아내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에이그, 그 사서 아가씨하고 경비 아저씨, 참 맘씨도 좋지. 그런 상황에서 경찰서로 끌려가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아니, 커피 한잔 마시겠다고 어떻게 그 무거운 책들을 밖으로 들고 다닐 생각을 했을까 그래?"

 

나는 다음날 당장 주민등록을 옮기고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었으며, 이후로도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일상이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내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준 경비 아저씨와 사서 아가씨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커피를 몇 번 선물함으로써 고마움을 표한 이후로 친해진 그들하고 인사까지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훌륭한 피서지인 도서관, 아니 우리집 '별채'에 점차 적응해 나갔다. 올 여름, 아무리 뜨거운 뙤약볕이 세상을 난사해도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 살면서도 아내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봄, 시원한 별채와 정원 딸린 이 집으로 이사 온 것은 정말 잘 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2008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특별한 피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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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장편소설 (족장 세르멕, 상, 하 전 두권, 새움출판사)의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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