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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수문장교대식 덕수궁의 수문장 교대의식은 내국인인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갈채를 받고 있었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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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굿, 매우 멋있어요.”

영국 로체스터에 살고 있다는 영국인 관광객 루비나씨의 말이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행해진 수문장 교대의식을 참관한 그녀는 이번 한국 관광에서 가장 멋진 추억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한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휴관하는 날을 제외하고 요즘은 매일 오후 2시부터 행해지는 수문장 교대식은 이제 서울 관광의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되었다. 외국인들만이 아니었다.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도 기회가 없어 교대의식을 처음 보게 되었다는 서울 수유리에 살고 있다는 김신연(44)씨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수문장 교대식이 행해지는 대한문 앞
 수문장 교대식이 행해지는 대한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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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을 정적인 면만 보았었는데 이런 생동감 있는 의식을 보니 역사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지난 주말(15일) 오후 2시에 행해진 수문장 교대식은 5백여 명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행해졌다.

교대의식은 옛날의 복장을 갖춘 군사들과 수문장의 질서정연한 행진과 상호 예의를 갖춘 군례로 행해졌다. 궁 안에 있던 군사들이 행진하여 대한문 앞으로 나가면서부터 행사는 시작되었다.

수문장 교대의식이란 행렬이 궁성문 앞에 이르면 궁성문을 경비하는 부대와 궁성의 외곽을 경비하던 부대간이 교대하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외곽을 경비하는 부대가 도착하면 교대식이 실시된다. 교대의식의 신호는 구령과 깃발, 악기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 단계는 큰 북을 치는 것으로 신호한다.

먼저 군호응대는 교대군이 도착하면 수문군의 참하와 교대군의 참하가 암호를 통한 신분확인 절차를 거친다. 두 번째 단계는 초엄으로 첫 번째 북신호로 큰북이 여섯 번 울리면 수문군의 참하가 교대군의 참하에게 열쇠함을 인계한다. 이때 승정원의 주서와 액정서의 사약은 열쇠함 인수인계를 감독한다.

다음은 중엄으로 두 번째 북신호로 큰북이 세 번 울리면 수문군의 수문장과 교대군의 수문장이 교대 명령의 진위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다음 순장패를 인수인계한다. 삼엄은 세 번째 북신호로 큰북이 두 번 울리면 수문군과 교대군이 마주선 상태로 정렬하며 군례를 행하고 서로의 임무를 교대한다.

큰 북과 취타대
 큰 북과 취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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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행순으로 교대한 부대는 궁궐의 외곽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행렬을 실시하는 것으로 행사는 끝이 난다. 시간은 15분 정도 소요되는데 이런 절차의 교대의식이 요즘은 오후 2시부터 30분 간격으로 하루 세 번씩 거행되는 것이다.

궁 안에서는 문화해설사의 덕수궁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수문장 교대의식으로 관광객이 더 늘어난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하여 임시 궁으로 사용하면서 궁궐이 된 곳이다. 그 이전까지는 연산군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던 사가였다.

선조임금에 의해서 궁으로 승격된 후 덕수궁은 선조의 대를 이은 제15대 왕 광해군이 창덕궁 복구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다가 광해군 3년(1611) 10월에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이때까지는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광해군은 그 해 12월에 다시 경운궁으로 옮겨 1615년 4월에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이 경운궁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경운궁은 비로소 왕궁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지만 궁으로 사용된 것은 훨씬 훗날이 되었다.

그 후 250여년이 지난 고종 32년(1895)에 명성왕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러자 고종은 1896년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다. 이때 고종은 태후와 태자비를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경복궁에서 시해된 민비의 빈전과 열성조의 어진(초상화)도 함께 옮겨오면서 경운궁은 명실공이 궁궐로서의 제구실을 하게 되었다.

교대의식 중의 기수들
 교대의식 중의 기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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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에 전각 짓는 일을 지휘하였다. 그 해(1896) 말에 경운궁의 준공을 보게 되었고 이듬해 비로소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경운궁은 그 후로도 공사가 계속되었다. 선원전, 함녕전, 보문각, 사성당 등이 세워졌고. 이 해에 고종은 즉조당에서 대한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광무 9년(1905)에는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 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광무 8년(1904)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함녕전 수리 중 발생한 화재는 강풍을 타고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의 건물과 그 곳에 비치되었던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다시 복구공사가 시작되었고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은 1909(융희3년)에 준공되었는데 이 건물이 조선조의 마지막 건축 공사가 된 셈이었다. 고종이 1919년 함녕전에서 죽음으로써 덕수궁도 다른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궁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격변기에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덕수궁의 수난은 해방 후에도 계속된다. 1960년대 태평로 일대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담장이 허물어져 나갔다. 대신 철제 울타리가 세워졌다.

지금의 담장이 복구된 것은 10여년이 지난 후였다. 담장이 복원되고 공원이 되었던 궁궐의 내부도 어느 정도는 복구되었으나 선조 이래 갖추고 있었던 궁궐의 면모를 추정해 보기는 쉽지 않다. 규모면에서 덕수궁은 창덕궁이나 경복궁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파란만장한 소용돌이 속에서 수난의 한복판에 있었던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관광객,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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