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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민주주의와 인권보호는 정착이 돼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치관이 붕괴하고 있어요. 현정부는 '경제'(돈)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가치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돈 때문에 과거로부터 존중돼 왔던 공동체의 선을 무너뜨려서는 안 되겠지요."

 

고교 시절 <사상계>로 등단,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돋을새김 된 <객지> <장길산> <손님> <오래된 정원> <심청> <바리데기> 등의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문학의 우뚝한 산맥으로 자리잡은 소설가 황석영(65). 그는 지나치게 "돈~돈" 하는 요사이 세태를 우려했다.

 

"이제 한국 중산층들 제법 잘 삽니다. 골프 치고, 해외여행 다니고, 대형 승용차 타고…. 그럼에도 지나치게 '돈'에만 집착하고 사는 게 보기 안 좋아요. 지난 몇 년간 런던과 파리에서 생활했는데, 거기선 은행지점장도 월세가 비싼 시내를 피해 외곽으로 나가 사는 경우가 흔합니다. 한국 중산층들, 이제 돈만 좇지 말고 관심의 영역을 문화로 돌려야 할 때라고 봅니다."

 

애초 황석영에게 인터뷰를 청한 건 2월 18일부터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연재될 새 소설 <개밥바라기별>에 관한 걸 묻기 위해서였다. 2차례의 전화통화로 약속을 정했고, 부랴부랴 관련된 질문지를 준비했다.

 

며칠간 계속된 추위가 다소 누그러져 햇살에서 이른 봄기운이 느껴지던 14일 오후. 경기도 일산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회갑을 넘긴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좋은 혈색에 날렵한 풍모.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시작한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열정 탓인지 목소리도 젊은이의 그것 같았다.

 

그런 좋은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어려운 만남이 성사된 김에 준비해간 질문지에 적힌 새로운 연재소설에 관한 궁금증 외에도 여러 정치·사회적 현안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여 나눌 수 있었다. 아래 그날 오간 황석영과의 대화를 3개의 키워드로 정리했다.

 

새 소설 <개밥바라기별> :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 담아낼 터"

 

"내가 청년이던 1960년대나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청춘은 언제나 불안한 그 어떤 것이지요. 우울과 고뇌 또한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고. 내 체험을 녹여내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연재는 아마 18일부터 시작될 것 같아요."

 

'아날로그 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불리는 그가 '디지털 시대의 총아'로 불리는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가 적지 않을 듯하다. 이 의문에 황석영이 명쾌하게 답한다.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난 요즘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나와 친구들이 1970년대 주도했던 문화운동의 그림자를 봅니다. 블로그가 1970~80년대 문화운동이 했던 역할 이상을 할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블로그 문화운동 선언'이라도 하고싶어요(웃음).

 

이번 연재소설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미디어에 따라 구성과 표현법이 다소 달라지긴 하겠지만 컨텐츠는 영원합니다. 종이신문이 아닌 인터넷에선 문학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실험한다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을 듯하네요."

 

블로그에 글을 이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될 황석영의 인터넷 연재소설 <개밥바라기별>. 제목이 가진 의미가 궁금했다. 

 

"금성을 그렇게 부릅니다 해가 지자마자 서쪽 하늘에 나타나는 별인데, 달을 따라 움직인다고 해서 개(犬)별 혹은, 거지별, 동냥치별 등으로도 불리지요. 또한 여행자의 별이기도 합니다. 내가 팔도를 떠돌던 젊은 시절 '오늘은 또 어디에서 밥을 얻어먹고 하룻밤 묵어갈까'라는 고민을 할 때면 보이던 별이지요. 젊음의 방황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또한 상징한다 싶어 정한 제목입니다."

 

1974년부터 자그마치 10년간 <한국일보>를 통해 연재된 역사소설 <장길산>. 그 연재기간 동안 빚어진 에피소드가 숱하다. 팩스와 이메일이 없던 시절이라 황석영이 집필하며 머물고 있던 시골의 버스정류장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손에 들려 한국일보 편집국을 향하던 <장길산> 원고도 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위험천만한 방법이지만, 다행히도 원고가 중간에 유실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단 한번. 군인이 급해진 휴가복귀 시간 탓에 국방부로 원고를 들고 들어간 일이 있었다. 그 원고를 회수해온 이는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김훈. 맞다. <칼의 노래>를 쓴 바로 그 김훈이다.  

 

<장길산> 연재는 이런 에피소드와 함께 황석영을 '주목받는 작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다지 영예롭지 못한 악명도 드날리게 했는데, 수십 수백 만 독자들이 기다리는 소설 연재를 사전 양해나 예고 없이 가끔 '펑크' 냈다는 것.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을까?

 

"입북 등을 이유로 수감돼 있다가 출감한 1998년 이후에는 그런 일(원고 펑크)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독자들과의 약속을 소중히 생각하게 됐으니 이젠 완전히 철이 든 거죠(웃음). 현재 100매쯤 써놨고, 아마 800~900매쯤의 경장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손님>이나 <바리데기> 정도의 분량이죠.

 

한국엔 제대로 된 '성장소설'이 드물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개밥바라기별>이 그 부분을 채워줬으면 합니다. 인터넷의 주된 사용자인 10대 후반, 20대 초반 젊은 친구들과 소설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싶어요. 악플요? 그런 걸 다는 건 개인의 자유겠죠. 허나, 겁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린 여배우들이 그것 때문에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는 것을 압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하지만, 나는 황석영입니다. 나를 잘 알지 않습니까(웃음)."

 

1940년대 생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과 달리 황석영은 일찍부터 컴퓨터를 집필에 이용해왔다. 1985년부터 원고지와 펜이 아닌 전동타자기를 썼고, 독일 베를린에 머물던 1989년부터는 컴퓨터로 소설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번 '블로거 황석영'으로의 변신이 그다지 이물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어쨌건 18일이면 황석영의 새 소설이 인터넷에 공개·연재된다. 그 내용과 함께 '악플에 임하는' 그의 자세가 어떠할 지에 궁금증을 가지는 독자와 네티즌이 벌써부터 적지 않다. 기자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정치·사회 : "이명박 당선인과 대화하고 싶다"

 

"많은 대중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고생하며 성장한 동시대인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선진화의 대안의 꼭 미국-일본식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복지와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고싶고요. 어쨌건 우리 공동체가 뽑은 사람이니 보수와 진보로 갈려 서로 헐뜯을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명박 당선인과 '대화'를 하고싶다는 황석영. 그렇다면 그 대화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최근 논란을 부른 당선인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몇 가지 정책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한국 주류사회마저 홀대하고 있는 여성문제를 개선할 여성가족부 폐지가 논의됐다는 건 걱정스럽습니다. 북핵문제와 향후 북-미 수교 이후의 상황을 조율해갈 통일부 존폐 논쟁 역시 그렇고요."

 

"영어 몰입교육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데…. 런던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각 나라마다 그 나라 특유의 억양이 남아있고, 품위 있는 영어는 자국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내재한 영어라고 하더군요. 우리의 경우 너무 조급하게 밀어붙이는 것 같습니다. 호들갑스럽단 말이지요. 일본의 경우처럼 좀 여유롭게 대처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한반도 대운하에 들일 돈과 정열이 있다면 몽골과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에 이를 철도를 놓는 초석을 닦는 게 나을 듯합니다. 국토를 훼손시킬 것이 뻔한 운하를 만들겠다는 태도를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유럽에서도 운하의 경제성과 효용성에 대한 회의의 목소리가 크다고 들었습니다."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서울 영등포로 이주해온 황석영. 호기심 많던 시절이라 가끔 사대문 안으로 들어가 숭례문을 올려다보곤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잘못된 복수심이 야기한 숭례문 화재와 붕괴를 바라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 이명박 당선인의 '국민성금 모금' 제의는 온당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타버린 숭례문을 보며 김지하(67·시인)가 '불길한 조짐'이라고 했죠. 그 말이 심상찮게 들립니다. 개인의 집도 대문이 중요한 법인데…. 이번 사건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엇나간 욕망이 화재라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고 봅니다. 원인을 철저히 파악하고 향후 유사한 형태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점검해야 하지 않겠어요? 복원대책 수립은 그 이후라도 늦지 않습니다. 고통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민성금 모금은 위로부터의 지시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제의가 먼저 있어야 정상적인 형태 아닐까요?"

 

근황과 향후 계획 : "공익적 광고 찍어 좋은 일에 쓰고싶다"

 

지난 달 황석영은 한 주류회사가 주는 '마크 오브 리스펙트 상'을 받았다. 존경받는 문화예술인에게 주어지는 이 상의 상금은 2천만원. 그는 그 돈을 기름 유출로 인해 불행을 겪고있는 태안 주민을 돕는데 써달라며 쾌척했다. "좋은 일에 쓰려는데 상금이 왜 이리 적나"라는 지극히 '황석영적인' 농담을 곁들여서다.

 

또한 얼마 전에는 한 아파트 건설회사로부터 "광고모델로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너무 상업적이라는 판단에 거부했다. 하지만, 공익성이 높은 광고라면 언제건 출연해 거기서 얻어진 수익으로 좋은 일을 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가 지켜온 공동체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그에게 어떤 곳이 인간이 살만한 따스한 세상인지 물었다.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울림이 큰 대답이 돌아왔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겠지요. 진보-보수로 나눠 아귀다툼을 하고 있지만, 내 보기엔 한국의 경우 그 둘 사이에 별 차이도 없어요. '중도'의 영역이 넓어져야 합니다. 상식적인 생각이 사회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겁니다."

 

지난해 11월 초. 몇 년간 이어진 런던과 파리 체류를 끝내고 귀국한 황석영은 현재 경기도 일산에 머물며 집필과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여유가 나면 영화를 보거나 산에 오른다. 최근 개봉된 영화 <명장>을 흥미롭게 봤다는 그는 "진정성을 가지고 독립영화 작업을 하는 이들이 내 소설을 원작으로 사용하겠다면 낮은 원작료를 받더라도 허락하겠다"고 한다.

 

"이른바 '88만원 세대'보다 더 좋지 못한 형편에서도 문학을 선택해 그 길을 가는 후배들이 고맙다"고 말하는 황석영. 그는 "문화의 기초분야가 되는 공연과 조형, 문학에 대한 지원이 대폭 강화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은 "시장논리와 정치권력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는 게 황석영의 지적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개밥바라기별> 연재가 끝난 후의 계획과 '젊은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오래 전부터 구상해오던 '강남 형성사'를 써볼 생각입니다. 우리 시대의 변화와 그 기저에 깔린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공간이 강남입니다. 독자들과 나눌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한 곳이죠. 젊은이들이 '세상은 보다 더 좋아질 것이다'란 낙관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데 움츠리지 말고, 좋은 생각들을 모아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시대건 청춘은 빛나는 동시에 우울했습니다. 취직, 장래 문제 등이 걱정되겠지요. 하지만, 희망을 가지세요.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영원한 것이니까요."

 

오는 6~7월경이면 전라북도 진안에 '황석영문학촌'이 건립될 예정이다. 폐교를 리모델링해 작가의 집필실과 지역 주민을 위한 도서관, 후배 문인들이 작품활동을 하며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계획대로 문학촌 건설이 진행된다면 올 여름 황석영은 그곳에 둥지를 틀게된다. 전북 진안이 '민중에 대한 낙관'과 '해학적 낭만성'으로 축조된 황석영 문학의 새로운 고향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땡볕 아래 매미 울어대는 무더운 날. 고무신 신고 느린 걸음으로 주변 저수지를 산책하는 황석영. 그 특유의 너털웃음을 만나고 싶어하는 독자들은 벌써부터 올 여름이 기다려질 법도 하다.


태그:#황석영, #개밥바라기별, #연재소설, #강남형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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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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