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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만 평에 이르는 갈대밭 뒤편의 갯둑을 넘으면 광활한 순천만이 펼쳐진다.
 70만 평에 이르는 갈대밭 뒤편의 갯둑을 넘으면 광활한 순천만이 펼쳐진다.
ⓒ 성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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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에서 김승옥은 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라고. 하지만 나는 갈대를 생각한다. 그 끝없이 이어지는 갈대 군락지, 순천만. 사람들로 하여금 순천을 찾게 만드는 갈대밭, 그것이 순천의 명산물이다.

'무진(Mujin) 10km'라는 이정표는 없었다. 소설 속 '무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무진기행>은 작가 김승옥이 나고 자란 남도 땅 순천을 그 배경으로 했다.

내가 순천만을 찾은 것은 가을의 막바지인 어느 토요일이었다. 순천만은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꼭 찾아야할 '마음의 숙제' 같은 곳이었다. 시내로 들어서자 '정겨운 순천'이라는 띠를 두른 시내버스가 지나다닌다. 처음 와 보는 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슬며시 가신다. 타지에서 온 이방인들에게도 순천은 이내 정겨운 도시가 된다.

순천에 들어서면 어디에서나 순천만에 갈 수 있게 이정표가 잘 되어있다. 표지판을 따라가자 얼마 안돼 순천만에 다다랐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바다도, 배도 아닌 일렬로 줄 세워진 빈 자전거 떼. 왈칵 해풍을 마주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무작정 뛰어 내려가 자전거를 대여한 후 페달을 힘껏 밟아본다.

'삐걱대는' 연인들이라면, 순천만 갈대밭으로...

바다와 갈대를 뒤로 한 채 여행객들의 인적이 드문 논길로 돌진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갈대는 평양 시내를 가득 메운 채 꽃술을 들고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을 연상시킨다. 조금 더 가자 긴 둑이 나타났다. 갯둑에 올라서니 순천만이 짠하고 나타난다. 탁 트였으면서도 고즈넉한 바다는 겨울빛을 띠고 있다. 물에 반사되어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했지만 겉옷을 침투한 바닷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온다.

논두렁을 빠져나와 갈밭길이 조성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70만평에 이르는 갈대밭으로 향하는 길에 '무진교'가 있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현대식 다리다. 무진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갈대밭과 순천만, 그리고 형형색색의 인파는 가을이 절정임을 알려준다.

네 식구의 흑두루미 가족. 제일 왼편의 목이 하얀 흑두루미가 어미다.
 네 식구의 흑두루미 가족. 제일 왼편의 목이 하얀 흑두루미가 어미다.
ⓒ 성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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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교와 이어져 갈대밭 사이로 난 나무판자 길은 로망 한 편 찍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짙게 배어있다. 바닥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갈대 속에 푹 파묻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텐데, 아쉽다. 사이가 삐걱대는 연인이라면 꼭 한 번 와보시길. 행복했던 옛 기억들을 회상하기 좋은 공간인 이곳 순천만 갈대밭은 연인의 손을 꼭 잡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보통 갈대는 다른 자연의 배경이 되어준다. 해안도로의 가장자리를 장식해주거나 강변을 치장해주는 따위의 배역을 맡던 갈대지만, 순천만에서는 주인공이다.

갈밭길을 끝까지 가면 용산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산이 용 모양을 닮아서 용산이란다. 내 눈엔… 잘 모르겠다. 뭐, 여기 사람들이 용산이라고 지었으니 수긍할 밖에. 이름은 짓는 이 마음이므로. 산이라고 말하기 겸연쩍을 정도로 야트막해 15분 정도만 살살 걸어 올라가면 용산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면 순천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망망대해로 뻗어가는 물결의 일렁임이 마치 여인이 얇은 허리로 얄랑얄랑 춤을 추는 모습이다. 바다를 향해 서서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바다로 나아가고 싶다.

'순천만 탐사선', '낭만호'라고 부르면 안 될까?

갈대밭 사이로 난 나무판자 길. 뒤로 산등성이가 구불구불한 용산이 보인다.
 갈대밭 사이로 난 나무판자 길. 뒤로 산등성이가 구불구불한 용산이 보인다.
ⓒ 성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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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전망대를 내려와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갈대밭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순천만은 선착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무진교까지 다시 건너오면 왼편에 간이 선착장이 보인다. 순천만을 둘러보려면 승선해야 하는 '순천만 탐사선'. 여행객들을 위한 자그마한 배 치고는 너무 거창한 이름 같다. 지붕도 없이 책상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간이 선착장 처지와도 맞지 않은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지은 이름은 '낭만호'. 배에 탈 때 "당신은 낭만호에 승선하셨습니다"라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더없이 운치 있는 여행이 될 것 같다. 선착장은 보트도 구비되어 있지만 정겨운 순천에는 재빠르고 날쌘 보트보다 낭만호가 제격이다.

모두 4척의 배가 왔다 갔다 하며 손님들을 실어 나른다. 대기하고 있던 한 척의 배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는 선장 아저씨의 모습이 재미나다. 6천원을 내고 표를 끊은 후 내 차례가 왔다. 13인승 배에 올라탔다. 바로 출발이다. 생각보다 빠르다. 배가 좁아서인지 넘실대는 바닷물이 배를 침잠해 버릴 것만 같다. 서 있기 힘들 정도의 강한 바람까지….

낭만호라고 이름 지었지만 배 안은 그리 낭만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 더 가자 700만평 갯벌위에 갈대밭이 펼쳐져 있다. 세상에나, 순천만이 자연의 보고임을 실감한다. 겨울 나러 온 청둥오리와 흑두루미, 하얀 저어새 등이 무수히 갯벌에 앉아있다. 특히 흑두루미는 매끈한 다리로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천연기념물들이 순천만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순천 별미, 얼큰하고 시원한 '짱뚱어탕'

겨울 나러 온 철새들이 갯벌에 앉아있다.
 겨울 나러 온 철새들이 갯벌에 앉아있다.
ⓒ 성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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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낚시질을 하던 선장 아저씨가 배를 잠시 멈추고 다시 낚싯대를 잡았다. 손님들에게도 낚시 해볼 기회를 선사하겠다는데. 커피도 타 주시겠다고 한다. 바다 한 가운데서 따끈한 커피 한 잔이라! 얼음처럼 차가웠던 손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마음 좋은 선장을 만나면 배낚시 기회에 커피 한 잔의 여유도 만끽할 수 있다.

순천만 가는 길 여기저기서 보이는 '짱뚱어탕'이라는 가게 간판이 타지인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갯벌에서 나는 짱뚱어는 그 이름만큼이나 퉁퉁하고 못생겼고 그 생김새가 아귀를 닮았다. 이래봬도 맛은 일품이라는데. 짱뚱어를 넣고 팔팔 끓여 얼큰한 국물을 내는 짱뚱어탕은 일종의 매운탕이라나. 낭만호에서의 여정을 끝내고 이 지방의 별미인 짱뚱어탕을 맛보며 순천 기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어떨까.

순천의 볼거리가 순천만과 갈대만 있는 건 아니다. 조선시대에 서민들이 살았던 옛 모습 그대로를 보전한 낙안읍성 민속마을과 성곽 2.5㎞ 내내 끊긴 데 없이 완벽하게 남아있는 전라도 유일의 왜성인 순천왜성이 있다. 또 개나리, 진달래, 매화, 동백 등이 화사하게 피어 봄에 아주 아름다운 절로 손꼽히는 선암사, 우리나라의 오랜 불교 역사 속에서 전통승맥을 계승한 승광사 등의 사찰도 있다. 여행이라는 건 어느 한 곳만을 다녀오는 일로가 아니기에 관심 가는 주변의 다른 곳들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작지만 큰 감동, 소소한 즐거움 주는 '순천만'

순천만은 설악산, 지리산, 제주도처럼 명소로 알려진 곳이 아니다. 수려한 경관으로 세인의 감탄을 자아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도 아니다. 유명한 명산물도, 크게 볼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지만 순천만에 오면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작지만 큰 감동의 여운이 진하게 남는다.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 혹은 지나간 것과 이별하려 할 때 순천만에 오면 참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지금, 가을의 문을 닫기 위한 마지막 여행지로 좋은 곳, 순천만. 12월 겨울 초입에 새 봄 맞으러 여행오기 좋은 곳, 순천만. 새로운 용기나 각오가 생기지는 않을지언정 사람들로 하여금 새 마음을 갖게 하는 순천만. 그것은 순천의 명산물 그 자체다.

순천을 떠나오는 길가 표지판에 '순천에서의 하루간의 여로를 마친 당신은 새 기분으로 순천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을 것만 같다. 


태그:#순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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