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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길가에 아카시아 몇 그루가 소녀처럼 곱게 서있고, 그 옆으로 강원도에서 유명한 감자꽃도 피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경찰 순찰차 한 대가 낮잠을 자고 있는지 정지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유년 시절이 생각나 그 위험한 국도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차들이 다시 씽, 씽, 나를 위협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자전거가 휘청휘청 넘어지려 했다.

 

나는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그 산속에는 배고픈 집 한 채만 항상 누런 배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겨울이 되면 먹이를 찾지 못한 시커먼 늑대들이 소복하게 눈 쌓인 마당 건너편까지 내려와 먹이를 찾던 곳. 그러다가 아버지가 방문을 열면 개들이 그 소리에 힘을 얻어 힘차게 짖고, 그러면 그들은 산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하루에 두어 대 지나가는 버스를 보고 싶어 소나무에 위로 올라가 손차양을 하고 한참을 기다린다. 산모롱이 넘어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는 돌아오고 그러면 부리나케 내려가 그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와 경주를 하곤 했다. 

 

학교가 끝나면 검정 고무신 태가 동그랗게 난 신발을 지근덕거리며 논을 무질러 오고, 농수로 따라 빠르게 흘러가던 그 물줄기에 앉아 코흘리게 친구들과 종이배를 띄우던 곳. 온갖 장난질에 삐비를 뽑아먹고, 그러다가 종이배를 따라 달리기도 하던 곳. 바람이 불 때마다 흙길 위로 먼지는 뽀얗게 날리고 그 길을 따라 무더기로 펼쳐지던 아카시아의 행렬, 바람이 불 때마다 눈처럼 하얗게 달리던 그 꽃사태들 갑자기 아카시아 향이 내 코에 물씬 풍겨오는 것 같았다. 한참을 가다보니 조그만 시가지가 하나 나타난다.

 


다리를 하나 지나는데 강폭이 상당히 넓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여기가 남대천이라고 했다.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곳이 매년 가을이면 연어들이 돌아와 축제가 열리는 장소란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흙탕물만 뿌옇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얼마쯤 달리자 하조대라는 팻말이 나왔다. 이름이 아름다워 정말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 하조대 해수욕장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곳 하조대해수욕장은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약 4㎞이상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수심은 얕고 경사가 완만하여 해수욕장으로서 천해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76년 개장했으며, 1984년 시범해수욕장이 되었다고 했으며, 그  남쪽으로는 광정천(光丁川)이 흘러들고 있었다. 또한 하조대 앞으로는 등대가 있어 그 일대를 지나가는 배들에게 따뜻한 불빛을 비쳐주고 있었다.

 

해변으로 들어서니 밀가루를 채로 쳐놓은 것 같은 고운 모래들이 기분 좋게 발바닥에 밟힌다.

 

 

그 위로 자동차 바퀴 몇, 어지럽게 뒹굴고 있고, 바닷가로 걸어가니 수억만 년 물결에 쓸린 모래들이 깊게 패여 있었다.

 

 

동해안은 남해안에 비해 바다가 깊어 파도가 세다고 하더니 과연 파도들이 세차게 몰려와 갯바위에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 모서리에는 낚시꾼 하나, 불안하게 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고, 그에게는 그 위험한 파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모래밭을 보니 따스한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젊은 연인들이 이 하조대를 찾아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위해 그려놓고 간 모양이다.

 

 

먼 곳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햇빛을 등지고 또 한 쌍의 연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 분은 외국인이었다. 

 

 

아직까지 바다는 한가했다. 바닷가에 서서 충분히 해풍을 들이마시고, 오른쪽 야트막한 산에 있는 하조대 정자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약 10여분 동안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하조대 아래 미니 관광버스가 한 대 서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니 전라도 광주에서 왔단다. 그러면서 캔음료수 한 개를 손에 꼭 쥐어주면서 시원하게 마시라고 한다. 계단을 따라 오르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내 키보다 더 높은 철조망이 답답하게 둘려져 있는데, 그 안에서 군인들이 족구를 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답답하게 철망 속에 들어있는 우리의 젊은 혈기들을 보자, 갑자기 반세기 이상 이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단의 현실이 답답하게 다가왔다. 

 

한참을 철조망 밖에서 망연히 쳐다보다가 나도 그 옛날 펄펄 뛰던 젊음을 안고 훈련소를 나오던 날이 생각났다. 수많은 기합에 몽둥이를 맞고 나오던 그 여름날, 아프게 쏟아지던 그 소나기. 나는 그 때 그 소나기의 시원함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길옆으로 참호가 파여 있고 배 한 척이 위태롭게 파도를 넘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하조대로 오르는 길은 양쪽으로 철망이 있어 몹시 답답했다. 그 좁다란 길을 따라 약간 올라가자 정자가 하나 정면에 버티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바위에는 하조대(河趙臺)라는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다.  올라서 보니 하조대는 돌출된 만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동양화에서 본 듯한 암석이 치솟아 마치 남근석처럼 보였으며 그 기세는 자못 기운차게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정상에는 소나무 한 그루 고고하게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조대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울창하였다.

 

이 곳 하조대에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고 한다. 한 가지는 고려 말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혁명을 꿈꾸었던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 은둔하며 살고 있었는데, 뒷날 그 꿈이 이루어져 그들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고 지었다는 설과,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 처녀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연으로 인해 명명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조대는 조선 정종 때 세웠졌으나 쇠락하여 철폐되었다가 수차례 중수를 거듭했단다. 그러다 1940년에 다시 팔각정을 건립했는데, 그만 한국 전쟁 때 다시 불에 타, 1955과 1968에 각각 복원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에 해채 복원된 건물로 주위의 소나무들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바위 위에 새긴 하조대라는 글씨는 조선 숙종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세근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한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왼쪽 편에 하얀 등대가 하나 서 있었다. 누군가가 우리나라에 단 두 개 뿐인 무인등대라고 설명한다.

 

 

 

 

내려오다가 보초에게 길을 물고 다시 계단을 내려오는데 보초가 나를 부른다. 웬일인가 하고 다가가니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만일 그대로 갔다면 하고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부대 차량 하나가 숲속의 길을 따라 사라지고 그 뒤에 우리 군인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내리막길을 따라 시원스럽게 하조대를 빠져 나오는데, 강물에 빠진 노을이 곱다.

 

 

점점 주위가 어두워져 오기 시작했다. 그 밤길을 달려 주문진으로 가는데 정말 위험했다.
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개처럼 당한다 해도 어느 누가 알까. 생과 사의 거리가 이리도 짧은데, 우리는 매일 얼마나 착각하며 사는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의 직시하는 자만이, 삶의 참의미를 안다고 하는데.”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먹빛 속에서는 불빛 하나만 보아도 반갑다. 그런데 주유소라도 하나 만나면 그냥 괜히 들렸다고 가고 싶어진다. 멀리 어둠 속에 주유소 하나가 졸고 있었다. 들어가서 주문진 가는 길을 묻고 다시 출발했다. 한참을 달리니 멀리 불빛들의 모둠이 나타났다.


비릿한 갯내음과 함께 주문진읍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내에 가면서 보니 주문진읍이 강릉시에 속해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주문진 해수찜질랜드을 물어보는데 정말 불친절했다. 지금까지 내가 길을 물어본 것 중에서 가장 불친절한 것 같았다. 현대는 한 나라나 자치제들에게 관광은 정말 중요한 자원이다. 그것에 가장 첫걸음은 시민들의 친절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사는 지역의 도우미라는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사실 친절은 인간 사이의 기본이 아닌가. 멀리 사우나가 보인다. 뒷쪽 약간 후미진 주차장에서 가방을 풀어 놓고 늦은 식사 준비를 하였다. 사람들 몇 차를 세우고 흘끔흘끔 보고 지나간다.

 

하지만 여행자는 이런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휴대폰을 보니 10시가 다 되어갔다. 문득 주문진에 산다는 맨발이라는 후배가 생각나 전화를 했는데 시큰둥하다. 그는 지금 포천 수락산 아래에서 살고 있는데, 맨발이라는 닉네임은 그가 수락산을 오를 때 맨발로 오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내원암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고 있다. 봄이 되면 그가 가져온 씀바귀와 민들레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한 잔 먹는데 맛이 일품이다. 정말 그의 손과 발을 보면 솥뚜껑 같다.  서둘러 치우고 자전거를 맡기려고 하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다. 장소를 찾아보다가 지하 중간계단에 요행히 자전거를 놓고 사우나로 올라갔다.


태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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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여 세계오지 배낭여행을 했으며, 한강 1,300리 도보여행, 섬진강 530리 도보여행 및 한탄강과 폐사지 등을 걸었습니다. 이후 80일 동안 5,830리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였습니다. 전주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를 쓰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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