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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아저씨! 나 좀 살려주이소!
ⓒ 이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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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 아쉬워하는 듯 바람은 세차게 불고 파도는 배 하나를 집어 삼킬 듯 높아만 가고 있었다. 해상경비 임무수행 4일째날! 나는 해양경찰에 입문 후 평생에 잊지못할, 아니 잊혀지질 않을 해난사고를 경험하게 되었다.

집채만한 파도를 만나 어선이 뒤집혀 1명이 사망, 1명은 실종되고 8명이 극적으로 구조된 영화 <가디언>과 흡사한 내용을 체험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긴박한 구조요청

지난 8월 31일 마침 이곳 여수 거문도에서는 백도 은빛 바다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백도유람선에는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이 백도 유람선에 올랐다. 내가 일하는 276함은 백도유람선을 안전 선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해상기상이 좋지 않아 유람선도 좌우로 매우 흔들리며 제 속도를 못 내고 백도를 순회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유람선이 거문도항을 출항했지만 오후에는 그마저 할 수 없을 만큼 바다기상이 악화됐다.

오후에는 백도유람선 운항일정이 취소되자 우리 함은 평소처럼 경찰서에서 지시한 소리도-광도근해 불법조업차단 사전예방순찰 임무를 위해 백도에서 이동했고, 날씨는 더욱 더 나빠져만 갔다.

이날 오후 6시 20분, 소리도 남방 약 5마일 해상에 도착한 우리함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주변해상순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후 6시 43분, 조용하던 SSB통신기에서 갑자기 "2003어성호다, 배가 침몰 중이다, 구조를 해달라"며 "빨리 와서 구조 좀 해주이소"라며 무척이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저할 틈도 없이 나는 바로 "여긴 여수해양경찰, 위치가 어디입니까"라고 물었다.

조난사고가 발생한 위치는 북위 34-00N, 동경 127-42E. 우리 서 관할이다. 우리 함으로부터 19마일 정도 떨어져있어서, 전속으로 이동해도 1시간 정도는 걸린다. 큰일이다. 날씨는 점차 거세어지는데 구조 작업이 어려울 것 같다.

사고지점까지 전속력으로 가도 1시간, 큰일이다

즉시 기관 최대속력으로 상승시키고, 경찰서 상황실로 조난청취사항을 구두 보고한 뒤, 떨리는 손으로 SSB무전기를 다시 찾았다. 그러나 무전기를 다시 잡고 어성호를 여러차례 호출해도 도무지 응답이 없었다. 상황이 무척 다급한 모양이다.

난 '수협여수'를 호출하여 조난청취 사항을 통보하고 인근에서 조업 중인 어선들을 상대로 구조작업에 동참토록 홍보방송을 요청했다. 또 우리 함과 조우했던 해양수산부 어업지도선 무궁화 12호를 호출했다.

다행히 무궁화 12호는 바로 응답했고 경비함정보다는 조난선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난 우리 함정에서 청취한 조난내용을 통보하고 구조작업에 동참해 주길 요청했다. 또한 인근을 항행 중인 상선에게 구조작업 참여를 요청해 달라며 부탁했다.

저녁 7시 경, 2003어성호를 계속 호출했지만 여전히 응답하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선원들이 아무일 없이 조금만 참고 기다리길, 조금만 참고 기다리길 맘속으로 또 맘속으로 빌었다.

저녁 7시 20분 경, 멀리 백도 등대가 보이고, 그 동편으로 구조작업에 참여한 상선 1척이 보였다. 해상날씨는 최악이었다. 파고가 족히 4m는 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참고 기다리세요. 아니 기다려주세요.'

아무리 불러도 응답없는 조난선박 어성호

저녁 7시 40분 경, 경비함정은 드디어 조난선박 부근에 도착했다. 주변 해상을 살펴가며 혹시나 해상에 떠있을 선원들을 찾기 위해 모두가 갑판으로 모여 수색작업에 임했다. 주변 해역을 철저히 수색하였지만 선우너들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사고지점 일대를 수색해 나가던 중 저녁 8시 5분 경 우린 해상에서 파도에 휩쓸리며 브이(해상에서 조업시 어구를 붙잡아두기 위해 띄어놓은 부표)를 붙잡고 구조되길 애타게 기다리는 선원 2명을 드디어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린 즉시 구명환 등 구조장비를 들고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구조에 나섰지만 파도가 높아 구조는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우리를 바라보고 빨리 구조해 주길 바라는 그 선원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며 우리 또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저녁 8시 10분 경, 선원들은 칠흑같은 폭풍우 어둠 속에서 축구공만한 브이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며 높은 파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구명환을 여러 차례 걸쳐 던졌지만 바람에 워낙 거센 탓에 구명환은 선원들 옆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우린 포기하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가 한사람 또 한사람 그렇게 2명을 구조했다. 하지만 구조의 손길을 애타게 바라는 나머지 선원들도 있기에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구조한 선원 2명에게는 위생사를 전담배치했다. 차가워진 몸을 주무르며 더운 물을 주고 담요를 덮으며 체온보호에 주력했다. 쇼크나 저체온증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5분이 지난 후 우린 처음 구조한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뒤집힌 채 떠있는 어성호와 그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선원들을 발견했다. 또 다시 우리는 구조 작업에 나섰했다.

구명동의도 없이 뒤집힌 배 위에 남은 선원들

가까이에서 본 어성호는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이었다. 선원 4명이 전복된 선체 위에서 구명동의(Life jacket, 물에 빠져도 24시간 몸이 뜰수 있도록 입는 조끼)도 입지 못한 채 선저(배의 밑바닥)에 몸을 바짝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목이 터져라 "여기요, 여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예전에 원양어선 항해사로 근무한 적이 있던지라 나도 모르게 옛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큰 파도가 어성호 선체를 덮쳐 선원들이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되면 큰일이다. 우린 어성호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선원들에게 구명동의를 던져주며 반드시 입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세찬 비바람 때문에 구명동의는 자꾸만 우리가 바라는 곳과는 다른 곳으로 날려갔다.

가까스로 구명동의를 전달하자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원 중 한 명이 구명동의를 입는 도중 파도에 휩쓸릴까봐 두려운 나머지 구명동의 착용을 거부한 것. 우린 그 선원을 큰 소리로 다그쳐 구명동의를 억지로 입도록 했다.

채 1분이 지나지도 않아 집채 만한 파도가 어성호 선체를 덮쳤다. "아" 탄식과 함께 순식간에 선원 4명이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대로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해상으로 떨어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선원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우린 속수무책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울컥 올라왔다. 물 속으로 사라진 선원들은 한참동안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난 두려움을 느꼈다.

기적처럼 다시 물 위로 떠오른 어성호 선원들

그 모습을 지켜본 난 그대로 상황실로 보고했다. 목이 메어 제대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4명이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떨어졌어요. 안 보입니다. 떨어져서 안 보여요."

그런데 무전을 보내고 있던 중 누군가 "저기 떠올랐습니다, 좌현 11시방향에 그들이 있어요"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선원 4명이 구명동의 덕분에 부력으로 물위로 떠오른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우린 주저할 틈 없이 곧바로 구명줄과 구명환을 있는 대로 힘껏 선원들에게 던졌고, 선원들은 바닷물을 마셔가며 우리가 던져준 구명줄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저씨, 나 줄 잡았습니다, 빨리 좀 당겨주이소 빨리예." 다급히 소리치는 그들을 보며 우린 누군가 시작한 '영차 영차' 구령에 맞춰 안간힘을 쏟으며 젖먹던 힘을 다해 구명줄을 당겼다.

우린 파도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곳에서 한 명씩 한 명씩 선원을 구조해 나갔다. 그렇게 4명이 다 구조되었다.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낀 선원들은 우릴 붙잡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연신 반복했고, 순간 복바쳐오른 감정을 못이겨 소리내어 울기도 했다.

우리 함이 사고현장에 단 1분이라도 늦게 도착하고, 또한 구명동의가 단 1분이라도 늦게 선원들에게 전달되었더라면 이런 가슴벅찬 감격도 없을 것이며, 이 선원들의 생명을 그 누구도 보장 할 수 없었으리라.

일순간 긴장이 풀린 탓인지 선원들은 몸을 마구 떨며 여기저기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고개를 숙인 자리에서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떨어진다.

응급환자를 후송하러 전속으로 이동하다

잠시 후 우린 또다른 4명을 찾기 위해 주변 해역 수색에 임하였다. 파도는 더욱 커져만 가고 비바람은 더 세차게 몰아쳤다.

그렇게 수색을 해가던 중 경찰서에서 공군에 조명탄을 요청했고, 저녁 9시 43분 경 공군기가 도착해 조명탄을 터트려 주었다. 주변 해상이 일순간 밝아졌고 우린 그 순간을 놓치지않고 조명탄이 떨어지는 지점 밑에서 집중적으로 수색했다. 하지만 더 이상 다른 선원들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위생사로부터 우리가 구조한 선원 6명중 2명의 정신이 혼미하다는 보고를 받고 우린 여수에서 긴급 출항한 동료들에게 구조를 맡기고 뱃머라를 나로도로 향했다. 곧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며 반드시 우리가 구조해 드리겠다고 약속하며 전속으로 이동했다.


태그:#조난선박, #해양경찰, #긴급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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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치안상황실 및 수사과등 주요부서 근무하다 현재는 경비함정에서 근무중이며 오마이뉴스 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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