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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설레임과 두려움, 망설임, 기대. 누구나 한번쯤 청룡 열차를 타면서 느꼈을 감정이다. 내게 있어 그것은 스물넷을 먹도록 단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의문의 놀이기구다. 지난 11일 무서워 감히 탈 엄두도 못 냈던 놀이기구와 마주하며 '참 인턴기자 생활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부터 180도 거꾸로 매달리는 절정의 순간, 그리고 마지막 몇 초까지. 매 순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청룡열차처럼 오마이뉴스 인턴은 내게 두근거림의 연속이자 과감한 도전이었다. 2주간의 교육기간과 4주 간의 현장실습 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벅찬 순간을 기억해

▲ 지난 7월 10일 언론중재위원회에서 교육을 받고 나오는 길에 문 앞에서 사진 한 장 찰칵. 왼쪽부터 나, 기영오빠, 재인
ⓒ 최재인
"야 어떡해? 이거 죽는 거 아니야?" 선로로 들어오는 열차를 보니 가슴이 뛰었다. 재밌겠다는 기대감과 함께 안전띠가 풀려서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안전 불감증이 유별난 것도 아니건만 머릿속에서는 영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의 장면들이 헤집고 다녔다. 오두방정을 떠는 가슴을 애써 한 손으로 진정시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드디어 열차에 착석. 열차가 조금씩 움직이며 절정의 순간을 향해 올라갔다. 두 손 가득 힘을 주고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다음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두근거리며 고개를 빼곡히 내밀고 기다리던 마음처럼 인턴 첫 출근날인 7월 2일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던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사무실에 첫 발을 내딛으며 마주한 사무실 풍경과 오마이뉴스를 만드는 사람들과 동기들. 모든 것이 낯설고 흥분됐다.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한 듯한 야릇한 기분마저 들었다.

한편으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못하면 어쩌지?'하는 생각에 두렵다가도 '아니야, 넌 잘 할 거야'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두려움 반 자신감 반으로 시작한 인턴생활은 역시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대학생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한 선배님의 말처럼 내 안에 흐르는 대학생으로서의 나태한 습관을 훌러덩 버리려고 노력했다.

거의 매일 밤 신문, 뉴스 옮겨 쓰기 등 숙제를 끝내기 위해 잠과의 사투를 벌였다. 잠은 내게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친구들과 술 마시며 노느라 밤을 샌 적은 있으나 기사 때문에 밤을 샌 적은 없었기에 유혹을 참기가 힘들었다. 곁눈질로 보이는 이부자리에 시선을 주지 말자며 마음을 다그치길 수십 번 한 덕분에 2주 교육기간 동안 사는데 필요한 끈기, 집요함, 잠을 자지 않기 위해 눈에 힘주는 법 등 정신적으로 많은 것들을 배웠다. 특히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는 명언은 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나홀로 좌충우돌

열차가 속도를 올리며 순식간에 철로를 오르고 내렸다. 구명조끼처럼 생긴 안전장치에 볼이 이리저리 부딪혔다. 어찌나 빠른지 정말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어떡해" 고개를 푹 숙였다. 열차가 180도 돌아 머리는 어느새 아래를 향해 있었다. 배꼽 부분에 채워진 안전띠에 온 몸의 무게가 실렸다. 맥박은 아까보다 더 크게 요동쳤다.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광주에서의 인턴생활은 소위 '나 홀로 좌충우돌'이었다. 가끔은 시트콤의 주인공이 된 듯 착각할 정도로 마치 사막에서 홀로 오아시스를 찾는 기분이었다. 마음을 졸이던 순간도 '뻘쭘했던' 순간도 많았던 것 같다. 한 선배를 따라 현장을 취재하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정보 편식을 했는지. 모르는 국회의원 이름은 왜 이리 많은지. 나의 무식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광주로 내려가기 전 "적극적으로 먼저 나서서 하라"는 어느 선배님의 말을 기억하며 취재거리를 찾아보고 뭘 쓸까 고민했다. 하지만 첫 기획안에 대해 선배를 설득하지 못하고 조사를 더해서 이번엔 꼭 설득시켜야지 하던 찰나, 선배는 내게 인화학교 기획기사를 맡기셨다. 작년에 인화학교 문제에 대해 뉴스에서 스치듯 들었을 뿐 그 외에는 아는 게 없어 처음에는 당황했다. 올해로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인화학교 문제에 대해 광주시민으로서 몰랐던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현재 어떤 상황인지도 몰랐기에 2년간의 기사를 한꺼번에 보려니 힘들었다.

역사공부를 하는 것처럼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달달 외웠다.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이기에 많은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내 관심과 애정이 부족했던 걸까. 기사를 다시 쓰는 것을 반복했지만 결국 4개의 기사로 기획했던 인화학교 기사는 2주를 끌다 관계자 인터뷰 기사 하나로 끝나고 말았다. 그 부분은 아직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은 가시처럼 내 마음을 벌집처럼 들쑤신다.

4주간의 현장실습 중 가장 즐거웠던 때를 꼽으라면 광주전남 사람들의 대통합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다루는 민심르포였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며 가끔 오마이뉴스를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해 모를 수가 있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홍보대사처럼 구구절절 "오마이뉴스는요~"하고 늘어놓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밥을 못 먹어 허기졌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마음만큼은 푸근한 하루였다. 취재를 끝내고 버스 안에서 우유와 삼각김밥을 먹으며 기사는 정말 땀과 발로 쓰는 것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 오마이뉴스 사무실. 6기 인턴들
ⓒ 서영화
6주가 1분 30초처럼 빨리 지나가버렸네

"영화야~끝났어" 아직도 꼭대기에 매달린 줄 알고 계속 눈을 감고 있던 내게 친구는 어서 눈을 뜨라고 재촉했다. "아 벌써 끝난 거야? 뭐가 이렇게 빨리 끝나. 아쉬운데..."

1분 30초 동안 내 몸을 흔들어대던 청룡열차처럼 오마이뉴스 인턴은 6주 동안 내 생활의 정점이자 이름표였다. 처음에는 8월 10일이라는 날짜가 영원히 오지 않을 순간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아직은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 맘껏 취재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제 끝난 줄도 모르게 지난 6주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또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별로 한 것이 없는 것 같은 허탈함에 젖어 있는데 누군가 말했다. "시민기자 활동이 또 다른 시작이야" 그 말처럼 난 다시 한번 오마이뉴스를 향한 아름다운 비상을 꿈꾼다.

학내 영자신문사 활동을 하며 04년 7월 수습기자 딱지를 떼기 위한 통과의례로 오마이뉴스와 첫 인연을 맺은 후. 오마이뉴스는 내가 찾으면 언제나 반겨주는 열린 통로였다. 누군가 오마이뉴스가 뭐냐고 물으면 자세히 설명하게 되는 습관도 오마이뉴스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설득하게 되는 습관도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런 의무감과 책임감이 드는 것은 이미 내 삶에 오마이뉴스라는 다섯 글자가 주홍글씨처럼 박혀 버렸기 때문일 게다.

6주 동안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가슴에 오롯이 새기며 마음이 아름다운 동기들과 선배님들을 만날 기회를 준 오마이뉴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덧붙이는 글 | 6주 동안 함께 했던 11명의 잘생기고 예쁜 동기들과 이주빈 선배, 강성관 선배, 전관석 선배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태그:#인턴생활, #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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