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큰이모와 막내조카 사이, 나한테는 엄마와 사촌동생이다.
ⓒ 배지영
"내 지영이, 세상이 살아볼 만하네이. 어쭈고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이."

어버이날 친정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는 구름 저 편에 계신 듯했다. '훈남'인 남편이 나도 모르게 엄마 앞으로 꽃바구니를 보냈다. 우리 고향에서 나고 자란 자식들은 모두 '성공'했는지, 엄마의 동료가 어버이날 선물로 현금 300만원을 받았다는 자식 자랑을 하고 있을 때에 꽃집에서 조금자 여사에게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배달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내가 완전히 감격했씨야. 300만원 보다 더 좋아야. 이러고 좋을 수가 없제이."

엄마가 카네이션 꽃을 좋아하신 줄은 몰랐다. 우리 부모님이 쑥스러워하는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세배 받는 것과 가슴에 카네이션 다는 거였다. 그런데 엄마도 늙어간다는 신호로 특별한 날을 새기고 계셨다. 지난달에 두 번 찾아뵙고, 함께 여행하고, 맛있는 것을 먹은 것은 무효였다. 그런 의미에서 막내 이모는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특별한 날이면 시댁에 간다. 5월 7일 저녁에도 카네이션 사 들고 시댁에 갔다. 아버지 어머니는 쓸 데 없는 돈 낭비라며 마다하는데 막상 거실에 작은 꽃바구니를 놓고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면 좋아하신다. 저녁밥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정집에 전화를 걸었다.

"조여사, 아까 시댁 가면서 전화하니까 안 받대."
"오째가 왔다갔씨야. 오째 덕분에 소고기 육회를 양씬 먹었다이."


엄마가 말씀하시는 오째는 내 막내 이모다. 나보다 한 살 위고, 우리 언니보다는 한 살 아래다. 막내 이모를 낳던 날, 외할머니는 낮부터 배가 아팠지만 표 내지 않으셨다. 식구들이 잠든 밤에 이녁 혼자 잿간에 가서 아기를 낳으셨다. 잿더미에 묻어버릴 심산이셨는데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식구들이 달려 나왔다.

외할머니는 시집 간 큰 딸이 낳은 아기가 돌도 안 지났을 때에 이녁이 아기 낳은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셨다. 그래서 이녁이 어딘가 다니러 가서 묵고 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출가외인이 된 우리 엄마를 불러서 막내이모를 부탁하셨다. 외할머니랑 떨어진 젖먹이 막내 이모는 밤새 우리 엄마 빈 젖을 빨았다고 한다.

▲ 몇 년 전 추석 때 우리 엄마의 자매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식성을 닮아서 갓 잡아올린 '모치'를 먹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 배지영
방학이면 우리는 모든 것이 풍부했던 외가에 가서 지냈다. 이모는 어릴 때부터 철이 든 척 했던 우리 자매들과는 달랐다. 외가 식구들은 윗목에 놓아둔 요강에 이모가 밤똥 누는 소리까지 좋아하는 것 같았다. 숨바꼭질 하다가 이모랑 나랑 똥통에 빠진 적도 있는데 외할아버지는 똥독이 안 오른 것도 대견하게 여기셨다.

이모가 다니는 초등학교 교문은 외할아버지가 기증해서 만들었다고 새겨 있었다. 이모는 넷이나 되는 오빠들이 오째 이름을 새겨서 주문한 연필을 사다줬다. 하마터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뻔했던 오째는 외할아버지가 다섯 딸 중에서 유일하게 가르친 자식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관청'에 다니는 사람이 되어서 할아버지 가슴을 뻐근하게 해드렸다.

외할아버지는 오째를 여우기(시집보내기) 전에 이녁이 저 먼 곳으로 가 버릴까봐 늘 걱정하셨다. 오째 앞으로 따로 논을 떼어 두고 싶다고 말버릇처럼 이야기하셨다. 그러나 외삼촌들을 도시의 학교에 보내고, 거기에서 혼인 시키고, 살림집을 마련해 주느라 할아버지 뜻은 자꾸만 뒤로 미뤄야 하셨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는 위암에 걸리셨다. 3년 동안 병원을 옮기며 투병하시는 동안 가산은 기울어갔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소 외양간이 비어 있는 것을 허전해 하셨다. 막내 이모는 소를 사서 외할아버지 마음을 채워드렸다. 외할아버지에게 자식 키우는 재미를 줬던, 잿간에 묻힐 뻔했던 잿간이 오째는, 끝까지 예쁜 자식으로 남았다.

4년 전에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엄마 남매들은 고아가 되었다. 우리는 엄마한테 '천애고아 조금자 씨'라고 대놓고 말할 때도 있지만 막내 이모한테는 그럴 수 없다. "오래만 사셔도 좋았을 것을…" 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살게 된 막내 이모는, 부모를 모두 잃고 첫 번째로 맞는 어버이날에는 큰언니인 우리 엄마를 찾아왔다.

▲ 늙어가고, 돈 없어도, 살아계신 존재 자체가 기쁨인 우리 엄마 아빠
ⓒ 배지영
막내 이모는 우리 부모님 모시고, 온천에 가고, 엄마 좋아하시는 회도 실컷 사 드리고, 백화점에 들러 옷을 사 드렸다. 엄마는 스스로 못난 큰딸이고 못난 큰언니라고 자책한다. 오째한테 김치 담가주는 것 말고는 해 준 게 없는데 받기만 한다고 부끄러워하신다. 그러나 이모가 부부 싸움 하고 마음 둘 데 없어서 찾아오는 곳은 우리 엄마 집이다.

어버이날이 지나고, 엄마는 사위가 보낸 꽃바구니를 이녁 핸드폰에 찍으려고 하는데 잘 안 찍힌다고 전화를 걸어오셨다. 핸드폰 화면으로 꽃을 보고 계시다가 "어버이날이라 그런지 자꾸 눈물이 나야. 느그 외할머니 생각이 나제. 나도 그런디, 느그 오째 이모는 엄마가 없응게 짠해야"라고 하셨다.

나는 되도록 짠한 마음을 걷어내고, 이모한테 전화를 했다.

"이모, 오째 동무."
"뭣이야?"
"어렸을 때 오째 동무라고 맞먹고 까불었던 것 미안해. 우리 엄마 아빠 챙겨줘서 너무 고마워. 생고기 사 드린 것도."
"느그 엄마기만 하냐? 우리 큰언니다이."


이모는 어버이날이 닥쳐올 때면, 외할아버지가 빈 외양간을 볼 때 같은 마음이 되는 것 같다. 나는 그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우리 자매들과 방학을 같이 보냈던 오째 동무는 알려준다. 늙어가는 부모, 돈 없는 부모도, 살아계신 존재 자체가 자식에게는 기쁨이라는 것을.

덧붙이는 글 | <특별한 5월, 난 이렇게 했다>에 응모합니다.


태그:#어버이날, #막내이모, #꽃바구니, #아버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