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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1월 노무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가 베트남 하노이 국제회의센터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승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같이 많은 국가 정상들이 동시에 한자리에 모이는 다자회의는 언제부턴가 메인 행사보다 그에 수반되는 양자 외교의 장으로 더 각광받는다. 국제관계에서 갈수록 정상외교의 비중과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다자회의는 정상외교를 집약적으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14~15일 필리핀의 휴양지 세부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정상회의도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현안을 집중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런데 이번 행사를 면밀히 관찰했다면 한가지 특이사항을 발견했을 것이다. 활발히 정상외교가 펼쳐지는 가운데서도 한 ∙일 간 양자회담은 열리지 않은 것.

한∙중∙일 3자 정상회담이 열렸기 때문에 한 ∙일 간 따로 자리를 갖지 않은 것을 의식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중, 중∙일 간 양자 정상회담은 분명히 3자 회담과 별도로 열렸다. 왜 한∙일 양자회담만 없었을까?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서?

@BRI@이번 'ASEAN+3'은 지난해 12월 중순 열릴 예정이었으나 개최 직전 주최측 사정으로 한 달 연기됐었다. 그 때도 한∙일 정상회담은 예정에 들어있지 않았다. 당시 정부 당국자의 설명은 "10월(아베 신조 총리 방한)과 11월(APEC 정상회의)에 양 정상이 만났기 때문에 특별히 새롭게 논의할 의제가 없고, 일본 측에서도 만나자는 얘기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이번에도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서…"라고 정부 당국자는 설명했다.

그렇게 매번 한·일 정상이 만나야 하느냐고 오히려 되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대답은 "당연히 만나야 한다"이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적어도 무역상대국 1, 2, 3위인 중국, 일본, 미국 정상과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만나 관계를 다지고 실리를 챙겨야 한다. 그게 정상외교다. 만나면 좋고, 내키지 않으면 안 만나도 좋은 개인간 관계와는 분명히 다르다.

꼭 경제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양국 정상이 만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한·중 양자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원자바오 중국 총리에게 요청한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와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지지는 일본 측에도 똑같이 협조를 구할 사안이다. 중국 측과 역사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한 상호 관심 있는 유물·유적의 발굴, 보존, 조사 사업에 대해 논의했듯이 일본과도 조금씩 논의를 진전시켜나가야 할 민감한 현안들이 놓여있다.

북한 핵문제 역시 한·중·일 3자가 마주 앉았다 해도, 일본 측과 따로 논의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현재 한·일 간 북핵문제의 해법을 놓고 상당한 입장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인내심을 갖고 설득할 것은 설득하고, 경청할 것은 경청해야 한다. 냉정하게 따져서 일본을 배제한 북핵 문제 해결이나, 더 나아가 한반도 통일 과정을 생각할 수 있는가?

물론 전략적으로 만나지 않는 것도 외교의 한 방법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해 10월 아베 총리의 방한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런 전략은 거둬들였다고 이미 내외에 선언했다. 전임 고이즈미 준이치로 시대에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 등으로 단절됐던 정상 간 관계를 복원한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한·일 관계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착실히 전진해가는 중·일 관계

▲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4일 필리핀 세부 샹그릴라호텔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원자바오중국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다.
ⓒ 청와대 홈페이지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황은 지난해 10월 아베 일본총리의 한·중 순방 이후 착실히 진전되고 있는 중·일 관계와 비교해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중·일 관계의 개선은 한·일 사이보다 훨씬 오래 단절됐던 최고위급의 교류 재개가 상징한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이번에 아베 총리와의 회담에서 오는 4월 일본을 방문하겠다고 확약했다. 아베 총리의 지난해 방중에 대한 답방 성격이다. 이 방문이 실현되면 중국 최고위급 지도자의 방일로서는 2000년 10월 당시 주롱지 총리 이후 거의 7년 만이 된다. 원 총리에 이어 후진타오 주석도 연내 방일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런 신호들과 함께 중·일 관계는 그 동안의 냉각상태를 빠른 속도로 정리해가며 활발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답방에 관한 이야기는 오리무중이다. 가려는 의지도, 받아들일 의사도 없어 보인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아무래도 마지막 양자회담이었던 지난해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한·일 정상회담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의 이른바 '평화의 바다' 발언이 뒤늦게 알려져 문제가 됐던 바로 그 회담이다. 이후 양측은 등을 돌린 셈이다.

일본 측은 노 대통령의 제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민감한 제안을 그렇게 쉽게 꺼냈다가 거둬들이는 '가벼움'에 크게 실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측은 처음부터 '공식 제안'이 아닌 예를 든 것에 불과하다고 해명했지만, 일본 측은 '평화의 바다' 제안을 아베 총리가 거부하자, 노 대통령이 "공식 제안은 아니다"며 거둬들인 것으로 설명했다.

아베 정권으로서는 임기 1년을 남겨놓고 국내적으로 현저하게 힘이 빠진 노 대통령과 굳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청와대로서도 일본의 총리 교체에 따라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일단 봉합하긴 했지만, 굳이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겠다는 자세이다.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은 지난해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한·일 간 갈등의) 원인제공은 언제나 일본 측이 했다"면서 "역사문제 등에서 일본이 보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일본 측에 공을 넘겼다.

원인을 따지기 이전에 분명한 것은 이대로라면 한·일 관계는 다시 1년을 허송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중국이 움직인다고 초조해서 따라가는 것도 현명한 외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가 최근 이 지역 정세의 뚜렷한 변화 속에서 어떤 원칙과 입장을 갖고 대일 관계를 풀어가고 있는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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