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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생존자 수조 존의 증언에 앞서 신도들이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부르고 있는 장면. 대형 멀티비전에 성조기와 더불어 노랫말이 적혀 있다.
ⓒ 김명곤
11일은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 공격 5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 전역에서는 9·11 5주년을 맞아 곳곳에서 이날의 악몽을 되새기며 2749명에 이르는 당시의 참사자들을 위한 추모식이 거행되었고, 하루 앞선 10일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전국 곳곳의 교회에서는 9·11 참사자 추모 예배가 이어졌다.

9·11 테러범들의 훈련 장소 중 하나로 알려진 플로리다의 중앙통인 올랜도의 퍼스트 뱁티스트 처치에서는 9·11 생존자 중 하나인 인도계 미국인 수조 존(Sujo John. 27)을 초청하여 당시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지역 경찰관 및 소방관 등 초청자들을 포함하여 약 8천명(교회측 추정)의 신도들이 아래 위층을 꽉 채운 가운데 진행된 수조 존의 '간증' 집회는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집회는 140여명에 이르는 매머드 성가대의 '자유는 신성한 권리'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아름다운 나라 미국'의 합창으로 시작되었다.

수조 존이 등장하기에 앞서 멀티비전 화면에서는 성조기가 펄럭이고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인터뷰 장면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등 시종 애국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중간 중간 기도 순서를 빼 놓는다면 이날의 집회는 일반적인 교회의 집회라기 보다는 시민단체의'단합대회'에 가까웠다.

이날 집회의 강사인 수조 존은 사회자가 소개할 때까지 침울한 표정으로 앞줄에 서 있었다. 사회자는 수조 존을 소개하기에 앞서 "우리는 대통령과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관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고 살았다"며 회개의 기도를 촉구하면서 "복수는 우리의 수중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강조했다.

▲ 단상에서 9·11 증언을 하고 있는 수조 존.
ⓒ 김명곤
9·11 생존자인 수조 존을 위한 헌금 바구니가 돌려지는 동안 연단 뒷면의 멀티비전 화면에서는 1·2차대전, 베트남전 등에 참전한 미군 참전용사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내용은 '미국이 이들 전쟁에 대해 얼마나 허술한 대비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3인조 그룹이 '자유의 종이 울리게 하라'는 노래를 부른 데 이어 드디어 주강사인 수조 존이 단위에 올라섰다.

그는 처음부터 날카로운 고음으로 단위를 좌우로 왕래하며 '9·11 증언'을 시작했다.

그는 마치 미국의 유명 부흥사를 연상시키듯 마이크를 잡고 자유자재로 손짓 발짓을 하며 증언을 엮어 나갔다.


아메리칸 드림 꿈꾸며 미국에 온 지 5개월 만에...

수조는 결혼 직후인 2001년 2월 26일 누구나가 원하던 성공의 기회를 잡기 위해 미국행을 결행했다. 9·11테러가 발생하기 5개월 전인 4월 14일 그는 세계 무역센터의 북쪽 타워 81층의 한 텔레커뮤니케이션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부인은 남쪽 타워 71층에서 일하고 있어서 점심을 늘 함께 먹었다.

사건 당일인 9월 11일 아침, 수조는 누구보다도 아침 일찍 일터에 도착했다. 그는 8시 46분경 팩스를 통해 거래처에 서류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아메리카 에어라인 11기가 그가 근무하던 무역센터 북쪽 타워의 94층과 98층 사이에 충돌한 것이다.

그는 바닥에 얼굴을 부딪치며 쓰러졌다. 순간 아내와 부모의 얼굴이 떠오르며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일한 탈출구인 비상계단에 불이 나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부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휴대폰이 작동되지 않았다. 가까스로 53층까지 내려와 공중전화를 걸려 했으나 역시 불통상태였다.

연기와 잔해를 헤치며 아래층으로 내달렸다. 여기 저기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고 구조대원들이 위층으로 올라가는게 보였다. 50여분 후 허둥지둥 건물 밖으로 빠져 나오자 곧바로 부인을 찾기 위해 무역센터 남쪽 타워 출구로 향했다. 부인은 당시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그 시각 이미 남쪽 타워도 붕괴되고 있었다.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진 사람들의 시체가 처참하게 여기 저기 널려 있는게 보였다.

여기저기 널린 시체... 하나님께 분노의 감정이

▲ 수조 존의 가족 사진
공포에 질린 그는 하나님께 분노의 감정이 치솟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왜 이같은 시련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곧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려 계획했다면 더 나은 장소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며, 자신이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무슨 계획이 있을 것이라 자위했다.

평안을 되찾은 수조는 한 FBI 요원과 앰블런스에 부상자들을 보이는 대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경황 중에 FBI요원은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타워 건물로 다시 들어갔는데, 그가 그곳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수조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정신 없이 구조활동에 참여했던 그는 뒤늦게서야 부인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결국 한 소녀의 아파트에 몸을 피하고 있던 부인을 찾게 되었다.

그날 아침 그의 부인은 8시 45분경 무역센터에 도착 예정인 지하철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탄 기차는 5분간 연착되어 북쪽 타워가 비행기와 충돌하여 무너지기 시작한 8시 50분경 무역센터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다행히 비행기가 무역센터 남쪽 타워에 충돌했을 당시 그 건물에 없었던 것. 남쪽 타워는 북쪽 타워가 무너진 지 16분 후에 무너져 내렸다.

수조 존의 이날 '9·11 증언' 집회는 증언의 내용보다는 증언을 접하는 청중들의 무거운 분위기가 더 큰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집회가 가라 앉은 분위기를 이루었던 이유는 3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9·11 참사 이후 '대 테러전'의 일환으로 개시된 이라크전이 크게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여전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데서 기인된 것으로 보였다.

9월 10일 현재 이라크전 미군의 사망자 수는 2666명에 이르고 있어 9·11 테러 참사 사망자 수인 2749명에 육박하고 있다. 미국 조야에서는 당초 우려하던 대로 종파분쟁으로 치닫고 있는 이라크 정정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미군의 철군일정을 앞당겨 확정하라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수조 존이 집회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테러전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표하면서도 자신은 정치인이 아니라며 이라크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직답을 피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였다.

올랜도 북부 롱우드 지역의 한 교회에 출석한다는 오스왈드 왓슨(45)은 "최근 상원이 후세인이 알카에다를 위협적 인물로 간주했으며 직접 코넥션이 없다고 밝힌 사실만 보더라도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을 대 테러전의 일환으로 몰아간 것은 큰 오류였다"면서 "미국민이 더 이상 테러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안보를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해야 할 적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일침을 놓았다.

보수 복음주의 신앙을 내세우는 미국 남침례교회의 '주일예배' 시간에 행해진 수조 존의 증언집회는 비록 이날이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 어떤 종교적 영감 보다는 세속적 에네르기가 넘쳐난 집회로 다가왔다.

왓슨이 '적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내뱉은 충고가 한낱 '울리는 꽹과리' 소리처럼 들리고, 앞서 사회자가 '복수는 인간의 수중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강조했던 말이 '우리가 못한 것을 하나님이 알아서 해 달라'는 소리로 들려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다음은 이날 증언 집회를 마친 후 수조 존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부시 행정부의 테러전을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9·11 참사 추모일이 되면 나돌곤 하는 '음모설'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 자신의 증언을 담은 책에 사인하고 있는 수조 존.
ⓒ 김명곤
"부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

- 9·11 테러 공격 직후 무슨 생각이 떠올랐나.
"그날 생명을 잃은 무수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어떤 인종 어느 나라 출신이냐에 관계 없이 우리는 늘 죽음 앞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9·11 테러 참사 이후 나는 자신과의 평화, 가족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9·11 테러참사를 겪은 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나?
"참사 당시 들이마신 연기로 호흡에 다소 고통을 겪고 있다. 하나님이 나의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도록 명령했다고 믿고 이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 미국은 아직도 테러 공격에 취약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어떤 일을 벌이려고 하는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미국민들에게 항상 해악을 끼칠 가능성은 상존한다. 9·11 이후로 미국이 지난 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테러 공격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부시 행정부는 테러전과 관련하여 현재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어느 누구도 이 이상 잘 할 수 없다고 본다. 나는 그가 미국이 경험해 온 가장 위대한 대통령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9·11이 미 정부의 음모? 말도 안 된다"

- 9·11 테러와 관련하여 부시 대통령과 빈 라덴 가계와의 커넥션 등 여러 '음모설'이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내게는 헛소리일 뿐이며, 말도 안 되는 낭설이다. 그 날 그 자리에서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그 굉음을 들었다면 감히 그같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부에서 폭발물이 터진 것도 아니고, 크루즈 미사일에 맞은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그같은 낭설에 솔깃해 있다는 사실이 그저 서글플 뿐이다."

-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에 올바른 방향을 취해 왔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날 9·11 비극을 겪은 후 나의 철학은 미국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과 같은 비극을 다시 발생하게 해서는 안된다. 테러리스트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들의 거주지에서든 뉴욕에서든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미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350개 도시를 순회했다. 다음 행선지는 어딘가.
"잠시 집에 들렀다 12일 아침 켄터키 렉싱턴의 CCC(대학생 선교회) 집회에 참가했다 로스엔젤레스에 갈 예정이다. 이달 말 10일 여정으로 노르웨이에 갈 계획이다."

- 평생동안 이같은 증언사역을 계속할 생각인가?
"나는 이 일을 위해 하늘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미국내뿐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어떤 나라에도 갈 것이다. 나는 9·11 이후 풀 타임 증언 사역자가 되기 위해 내 직업을 포기했다. 이 일을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 가족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내가 밖에 나가 있는 날들이 많기 때문에 가족이 크게 희생하고 있는 것은 큰 어려움이지만 내게 중요한 소명이 있기 때문에 잘 견디고 있다. 아내는 두 자녀와 함께 달라스의 집에 머물며 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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