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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꽃을 돋보이게 하는 안개꽃
ⓒ now038

'무슨 꽃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각자 좋아하는 꽃 이름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화려한 장미를, 또 어떤 사람은 청초한 수선화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고 말하면서,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한다.

만약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안개꽃'이라고 답할 것이다. 안개꽃을 좋아한다고 하면,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불분명하고 흐리멍덩한 꽃을 좋아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안개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 경험과 더불어 나만의 안개꽃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안개꽃과 맨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시절 한 병원에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과중한 공부와 스트레스 때문에 급성맹장염에 걸린 난 수술을 받고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막상 입원하고 보니, 공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막연히 꿈꾸던 낭만적인 병원생활과 실제 병원생활은 현저하게 달랐다.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내게 희망과 빛을 안겨준 안개꽃과 만났다. 병원 유리창으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던 어느 봄날 아침, 커다란 안개꽃다발이 나를 찾아왔다. 유난히 큰 안개꽃다발 뒤로 이모의 얼굴이 가려져, 햇살에 반짝이는 안개꽃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때까지 안개꽃이란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난, 영롱하고 화사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 후 난 내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준 안개꽃을 다른 이에게 선물하는 걸 좋아한다. 힘들고 지쳤을 때, 화사한 안개꽃 한 다발은 다른 어떤 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희망을 선사한다. 안개꽃이 내 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가 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 안개꽃다발
ⓒ cooljay0508
내가 안개꽃을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안개꽃은 여러 송이가 함께 있어야 화사함과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많지만,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 줄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더불어 사는 삶, 이것이 내가 안개꽃한테서 배운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꽃과 함께 있을 때 안개꽃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꽃을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안개꽃은 붉은 장미의 화려함을 살려주고, 노란 튤립의 세련된 모습을 돋보이게 한다. 홀로 있는 장미나 튤립보다는 안개꽃에 쌓인 장미나 튤립이 더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것도 이를 증명한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안개꽃 같은 사람은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아닐까?

안개꽃의 꽃말은 '약속'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을 한다. 자신과, 다른 이와, 나아가서는 하늘에 약속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 많은 약속 중 우리가 지키는 것은 얼마나 될까? 약속들 중엔 자신을 포기하고 버려야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하고 싶은 것을 양보하고 많은 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접을 수 있는 안개꽃의 희생정신이 있어야 그러한 약속들을 지킬 수 있다. 하얀 안개꽃 속 붉은 장미는 '사랑의 약속'이다. 정열의 붉은 장미를 더욱 붉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하얀 안개꽃이 필요한 것처럼, 끊임없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희생이 뒤따라야만 하는 법.

곱게 말려진 안개꽃을 책 사이에 넣어, 그동안 잊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한 편의 시와 함께 보내야겠다. 우정의 약속을 담아서.

▲ 안개꽃밭
ⓒ cooljay0508

안개꽃

다음은 안개꽃을 보고 지은 자작시입니다.

알알이 맺힌
사랑스런 말씀 하나.

기다림으로
감춰진 가녀린 속살.

가슴에 품은
질긴 추억.

입맞춤으로 물든 두 뺨에
순한 달빛은

기억 건져 올린
아득히 먼
봄이 오는 숨소리.
/ 구은희

덧붙이는 글 | 1. 구은희 기자는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 어드로이트 칼리지 학장이자 교수, 시인입니다. 
2. 코리아나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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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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