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는 아름다운재단(이사장 박상증)과 공동으로 '활동가와 차 한 잔'이란 제목의 기획기사를 내보냅니다. 바쁜 일상 속에 관심 갖지 못한 사회의 그늘진 곳, 그곳에서 우리를 대신해 희망을 찾는 공익활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과 시민운동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기획입니다. <편집자주>
[클릭!] 아름다운재단 활동가 추천하기 코너 바로가기

때만 되면 어김없이 터지는 학교급식 파동, 잊을 만하면 뉴스를 장식하는 음식물 파동….

위험천만한 식품들로 가득한 대한민국에 푸른 신호등을 밝히는 곳이 있다. 올해로 14년차가 된 중견 시민단체, 푸른생활협동조합(이하 푸른생협)이 바로 그 곳이다.

"나는 물건이 아닌 '관계'를 유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푸른생협의 총괄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상무이자 인천에서 처음 푸른생협을 만들었던 초창기 멤버 김성기(46)씨의 말이다.

생협은 그냥 '농산물 유통구조'가 아니다

최근 웰빙 열풍을 타고 생협이 확장 일로에 있지만, 뭇 사람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바로 이 호기를 김성기씨는 '위기'로 진단한다.

생협이 그저 '유기농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유통구조'로만 인식되면 자멸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유기농 농산물 유통에 손을 대기 시작한 대기업들은 규모면에서 봤을 때 생협들의 경쟁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씨는 "생협의 공동체정신을 살리면서 대중들에게도 매력적인 10년의 비전을 만들 때"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 "사람이 움직일 때 세상은 변할 수 있다"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관계를 만드는 활동가로 살고 싶고, 그런 관계들을 유통하는 생협을 만들고 싶다"는 기대감을 피력했다.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푸른생협의 생산자-소비자 직접 거래 방식은 방부제와 농약에 찌든 식품들 틈에서 안전한 먹을거리를 찾는 소비자들에게 확고한 신뢰를 심어줬다.

또 조합원들이 단순히 식품을 구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부 활동을 통해 부모교육·농촌체험·환경연구·대안교육 연구 등 다양한 생활 영역으로 푸른 기운을 뻗어나가고 있다. 한 마디로 21세기형 생활 시민단체라 할 만하다.

김성기씨를 만나 푸른생협의 푸른 이야기, 그리고 생협 활동가들의 고민과 전망 이야기를 들어봤다.

뭣 모르고 뛰어든 생협운동... 어느새 14년

▲ 푸른생협 김성기 상무.
ⓒ 이영주
- 푸른생협이 시작한 지 14년차, 시민단체 역사로 치면 중견급이라 할 만하다.
"푸른생협의 시작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이하 인사련)은 노동·지역·종교 등 거의 모든 영역의 활동가들이 모여 80년대 인천지역 운동을 이끌어 왔다. 그러다가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 이후 군사독재에서 문민정부로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뤄지고 실질적·내용적인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 1992년 말 해소했다.

당시 나는 인사련 활동가였는데 함께 활동하던 동지 두 명과 함께 시민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깊이 고민했다. 그러다 선택한 것이 생협 운동이었다. 솔직히 시작할 당시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 때는 하는 일 족족 시행착오였다. 뭣 모르고 덤볐다가 큰 코 다친 셈이다(웃음). 그렇게 부족하게 시작했지만, 인천 지역의 종교계 어르신들도 많이 도와주시고, 무엇보다도 열성적인 조합원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온 것 같다."

- 조합원이 5800명이면 규모가 상당하다.
"최근 몇 년 동안 매년 30~40%의 매출 성장 기록이 보여주듯, 지금 생협 운동은 양적 성장기다. 이는 최근 웰빙 열풍과 더불어 음식물 사고가 빈번해지면서 안전한 먹을거리를 찾는 이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생협 운동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양적으로 성장하는 지금이야말로 생협 운동의 가장 큰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대중에게 오로지 유기농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유통구조로만 인식되면 생협의 자멸을 불러올 것이다. 이미 대기업들이 유기농 농산물 유통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규모만 보더라도 경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생협은 '생활협동조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생산자와 소비자가 포함된 조합원들이 더불어 도우면서 이익을 도모하는 조합 정신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껏 13년 동안 생협 운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먹을거리를 유통한다고 생각한 적 없다. 땀 흘려 농사짓는 농부들과 그 생산물을 고맙게 먹는 소비자들의 1차적 관계를 만드는 게 생협의 몫이라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들이 농산물을 구입하는 게 희망을 잃어가는 농민들의 숨통을 틔우게 한다는 점에 보람을 느끼는 소비자, 그런 소비자들을 위해 정직하게 농사를 짓는 농민들. 그들이 이루는 공동체가 바로 생협이다. 나는 물건이 아닌 '관계'를 유통하는 사람으로 활동하고 싶다."

난 더딘 사람... 맨끝에서 따라가면서 자리를 지켰다

▲ 푸른생협 생산지 견학.
ⓒ 푸른생협
- 한 시민단체에서 10년 넘게 상근자로 일한다는 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다(웃음). 광주 출신이고 인천에 직장을 잡기 전까지 학교도 그 곳에서 다녔다. 내 나이에 광주 출신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앞장서서 학생운동을 했을 거라고 추측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시위하는 대열이 있으면 선두가 아니라 맨 끝에서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더딘 사람이다 보니 남들 다 떠난 뒤에도 떠날 줄을 모르고 자리를 지킨 거다.

90년대가 되니 예전에 대열 선두에 섰던 사람들은 운동을 떠나 복학해서 학교도 다시 다니고 고시도 치르고 해서 의사·변호사가 되더라. 그 때는 생협 초창기라서 작은 트럭을 몰고 배달을 다녔는데, 그 땐 그 친구들과 내 모습을 비교하니 솔직히 마음이 좋지 않긴 했다. 쥐꼬리만한 활동비로 어떻게 사나, 내게 미래가 있긴 한 건가, 의심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더디다 보니 지금까지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고, 이젠 생협 운동이 내 몫이라는 확신이 든다. 물론 노후에 대한 염려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웃음)."

- 지금은 조합원이 많이 늘어 그나마 나아졌겠지만, 경제적으로도 무척 어려웠을 텐데?
"사실 어려웠다. 그래도 큰 욕심이 없으니 살 만했다. 아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보다 매일 새벽이 돼서 퇴근하는 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 예전엔 왜 그렇게 새벽까지 회의를 했는지, 또 회의 끝나면 동틀 때까지 술을 마셨는지 모르겠다(웃음).

지금은 회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옮기고 늦은 술자리도 삼가서 되도록 10시 이전에 집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아내와의 관계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나도 좋다(푸른생협 직원들은 그를 '김데렐라'라고 부르는데 바로 통금 시간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대학생 아들과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도 불평없이 잘 자라줘서 고맙다. 아들은 중학교까지만 인천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대안학교에 갔는데 입시 스트레스 없이 학교 생활하면서 공부도 잘해 줘서 고맙다. 딸아이는 웬만하면 내 옆에 두고 키우고 싶은데(인터뷰 내내 딸에 대한 극진한 애정 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이 녀석도 고등학교는 대안학교 갈 거라고 해서 걱정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 아이들 키워 보니 대안학교가 돈이 많이 들 것 같지만 사교육비가 전혀 안 들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적게 들더라."

사람이 움직여야 사회가 바뀐다

▲ 푸른생협 공개 강좌.
ⓒ 푸른생협
- 조합원들이 대부분 주부일 텐데, 여성들과 함께 일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내게 여성적인 코드가 있는 것 같다. 여성들과 대화 나누는 걸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흔히들 말하는 '여성'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집에서도 요리하고 청소하고 집안일하는 게 재미있다. 이제는 오히려 남자들보다 여자들과 어울리는 게 더 편하다."

- 지금이 위기라고 했는데 이 위기를 뚫고 나갈 방도가 있는가?
"지금 조합원들과 푸른생협의 10년 비전을 만들기 위해 토론 중이다. 조합원 수가 많이 늘어난 만큼 조합원들이 생협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다양해졌다. 설문조사를 했더니 우리농촌살리기·환경운동·대안교육·안전한 먹을거리 공급 등등 가지각색이더라. 이건 시기에 따라 대중의 입맛에 맞게 생협 운동을 홍보했던 후과이기도 해서 막중한 책임의식을 느낀다.

이제는 조합원들의 지혜를 모아 생협의 공동체정신을 살리면서 대중들에게도 매력적인 10년의 비전을 만들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변해야 한다. 세상의 변화에 뒤쳐지지 않고 새로운 비전에 걸맞은 인재가 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10여 년 생협운동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이 움직일 때 세상은 변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관계를 만드는 활동가로 살고 싶고, 그런 관계들을 유통하는 생협을 만들고 싶다."

푸른생협은

▲ 푸른생협 2006년 총회 모습.
ⓒ푸른생협
생협은 생활에서 필요한 여러 요구를 협동의 힘으로 개선하고 해결하기 위한 소비자(생활인)들의 협동조합이다.

특히 안전한 먹을거리 공동 구입 사업을 통해 우리 농산물과 유기농산물을 소비하여 척박해진 땅을 살리고, 농민의 생산과 생활을 보장하며, 소비자의 주권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푸른생협은 조합원 스스로 주체가 되어 생활, 교육, 문화를 함께 협동하고 나누는 비영리 단체다.

1993년 4월 인천지역 시민단체 '시민의광장' 부설기관으로 출범했으며, 이듬해 독립했다. 현재 5800여명의 조합원이 있으며 조합원 및 어린이문화교실, 조합원과 지역주민을 위한 '생협월요포럼', 문화센터 개설 등 다양한 지역활동을 벌이고 있다.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에 사무실이 있고, 1994년에 연수구 매장, 2003년에 남동구 매장, 2005년에 부평구 매장을 개설해 운영 중이다. 홈페이지 : http://www.pureun.or.kr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